이 뭣고? 2018. 10. 2. 08:17

[1882년 6월]

라파르트R9

​​​​예술은 샘이 많아서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온통 독차지하고 싶어 하지.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그에게 바치고 나면 우린 이런저런 비현실적인 인간으로 취급받기 일쑤여서 남는 것이라곤 씁쓸한 뒷맛뿐이랄까, 뭐 그렇단다. 그래도 할 수 없지. 이대로 노력하면서 계속 싸워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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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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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채색도 조금 해서 요람 습작을 그렸 단다. 지금은 지난번에 네게 보낸 데생과 비슷한 풀밭 데생을 다시 그리고 있지.

내 손이 너무 하얗게 된 것 같은데, 그렇다고 어쩌겠니?
다시 밖에서 작업을 할 거야. 그러다가 후회하게 되더라도 일할 날을 마냥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겠지.
예술은 샘이 많거든. 병이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자신이 등한시되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는단다. 그렇다면 나도 그 뜻을 따를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네게 괜찮은 데생 몇 점을 곧 보낼 수 있었으면 해.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병이 나면 안 되지.

내가 예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넌 알아야 해. 본질에 이르려면 길고 고된 작업이 필요하단다. 내가 원하며 목표로 삼는 것은 손에 넣기가 무척 어렵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높은 목표를 겨냥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인물화든 풍경화든, 감상적인 작품이 아니라 진지한 슬픔을 담은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단다.

요컨대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면서 이 남자는 생각이 깊다든지 감수성이 예민하다든지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으면 해. 소위 말하는 나의 거친 면에도 불구하고 아니, 아마도 이 거친 면 덕분에 말이지.
이렇게 말하면 좀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싶은 거란다.

대다수 사람들의 눈에 나는 어떻게 비치는 걸까? 하찮은 존재, 괴짜나 불쾌한 인간? 그러니까 사회에서 어떤 직책도 맡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요컨대 미천한 자들 중에서도 미천한 자일까?

그래, 이 모두가 정말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내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 이 괴짜, 이런 하찮은 존재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이것이 내 야심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분노보다는 사랑에, 열정보다는 평화로움에 근거한 야심이지. 때로 성가신 일을 겪더라도 마음속에는 고요하고 순수한 조화와 음악이 자리하고 있단다.
​​“더없이 누추한 헛간이나 지저분한 구석에서도 난 그림이나 데생의 소재를 찾을 수 있어. 뿐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충동의 부추김을 당한 듯 내 영혼은 이 방향을 지향한단다.

다른 일들은 점점 더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어. 또 그럴수록 내 눈은 그림의 소재가 될 만한 것들을 더 잽싸게 포착하지. 예술은 끈질긴 노력을 요구한단다. 어떤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고 일하며 끊임없이 관찰해야 하는 거야. 끈질긴 노력이란 무엇보다 꾸준한 작업을 의미하지. 또 누군가의 이런저런 비평을 듣고 자신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것을 의미한단다.”


난 이제 예술과 삶 자체(예술이 그 본질인)에 대해 광범위하고도 자유로운 개념을 갖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그저 나를 몰아세우려 할 때면 그게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분명히 알 것 같단다. 현대 회화 중 많은 작품들은 과거 회화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매력을 지녔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야.

이 요람은 오늘 그린 것 외에도 백여 번은 더 끈기 있게 그리고 싶단다.

- Vincent van Gogh 빈센트 반 고흐 지음|
H. 안나 수 엮음| 이창실 옮김.
[생각의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