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衆生本有底一着子】
【중생衆生 본유本有의 일착자一着子】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허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요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여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어다.
억천공불복무변億千供佛福無邊허되,
억 천의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는 것이 그 복福이 갓이 없으되,
쟁사상장고교간爭似常將古敎看이리요.
어찌 항상 고교古敎, 옛 가르침을 가져서 본 것만 같으리요.
이 옛 가르침, 고불古佛의, 고불古佛의 가르침, 고불古佛의 경전經典, 이 고불古佛의 옛 가르침이라 하는 것은,
'불조佛祖가 항상 전傳하는, 불조가 서로 서로 전해 내려오는 심인心印', 마음의 인印을 가르키는 말이고,
'중생衆生 본유本有의 일착자一着子다'. 중생 본래 가지고 있는 한 물건, 이것을 예 고古자 가르칠 교敎자 고교古敎라 하는 것이여.
억천億千의 부처님께 공양供養을 올리는 그 공덕功德을 얼, 무슨 말로써 다 그 공덕을 다 표현할 수가 있느냐 그말이여. 무량무변無量無邊이여.
그렇지만은 우리가 본래本來 가지고 있는 이 한 물건, 본래 가지고 있는 이 한 물건이요, 불조佛祖가 서로서로 전해 내려오는 그 마음의 인印을, 그것을 가져서 보는 것만 어찌 같을 것이냐.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
흰 종이 상변에다가 검은 글자를 써 가지고,
청군개안목전관請君開眼目前觀이다,
그대에게 청하노니 여러분께 청請하노니 눈을 떠서 눈앞에 떡 관觀하라.
이 중생본유衆生本有의,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그 한 물건. 먹으, 종이에다가 먹으로 쓴 글자가 아니여.
한 글자도 없건마는 그 글자를 우리 일용중日用中에, 앉고 서고 눕고 밥 먹고 옷 입고 생각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하는, 우리 인연因緣 따라서 수용受用하는,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간語默動靜間에 항상 소소영영昭昭靈靈하는 바로 그것이 백지상변서흑자白紙上邊書黑字여.
그, 그 가운데에 알라야 알 수 없고 볼라야 볼 수 없는 우리의 그 본참공안本叅公案을 터억 거각擧却해서 그것을 관조觀照하는 것이 바로 백지상변白紙上邊에 검은 글자를 써 가지고 항상 눈앞에 그것을 보라.
이 경전을 읽어야 참으로 부처님께서 전하신, 역대조사가 전, 등등상속燈燈相續해서 전해 내려오는 그 심인心印을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을,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을 친견親見해서 거기에 공양을 올리는 공덕도 말로 할 수 없이 장하고, 또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만장경八萬藏經,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 이러헌 경전을 항시 손에서 놓지 않고 그것을 독송을 허는 거 그것도 참 공덕이 한량이 없지마는, 우리 최상승最上乘 학자學者는 벌써 종이로 된 경전을, 또 먹으로 된 경전을 그것을 읽는데 그쳐서 될 것이냐.
진짜 경전은 이 뭄띵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바로 거기에서 찾아야, 거기에서 찾아야 참 부처도 거기에서 친견親見할 수 있고, 참 경전도 거기에서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경전 그 참 부처님을 친견親見하고 독송讀誦하게 하기 위해서 부득이 해서 석가모니부처님이라 하는 화신불化身佛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출현을 하신 것이고, 이 문자文字로 된, 언어 문자로 된 경전을 부득이 해서 설說하신 것이다 그말이여.
아까 조실 스님의 녹음 법문을 통해서 계축년癸丑年에 설하신 그 계축년癸丑年 해제 때 설하신 그 법문法門, 오늘 이 용주사 중앙선원에서 삼동결제三冬結制를 마치고 온 대중, 천안 광덕사 태화선원에서 삼동안거三冬安居를 마치고 온 대중, 그리고 이 경기도 일원에 모다 회룡사라던지, 저 충청도, 옛날에 만공스님 보월스님을 모시고 여기 전강 조실 스님, 한국의 근대에 모다 여러 큰스님네들이 거기서 모다 정진을 하신 보덕사, 거기 선원에서 난 대중까지도 여기에 오늘 해제解制에 참석을 했는데, 여기 멀, 멀고 가까운 여러 선원禪院에서 정진精進을 하고 오늘 이 자리에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 한 자리에 모여서 해제법회解制法會를 갖게 되었습니다.
모두 들으니 각기 그 선원들에서 삼동三冬 석 달 동안을 정말 여법如法하게 일심분란一心不亂으로 알뜰하게 모다 정진精進들을 하고 모다 눈에는 정진精進을 해서 그 샛별같이 반짝거리는 그, 참 신심信心과 지혜智慧로서 그 석 달 동안을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해놨으니 모다 업장業障이 소멸消滅을 하고,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한 그러한 정진 뒤끝이라 모다 몸에서는 향내가 진동을 하고, 눈에서는 그 날카로운 빛이 아주 번쩍거린다 그말이여.
부처님께서 49년 동안을 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을 설說하시고 삼천三千 년을 내려오면서 역대 조사가 참 이 일대사를 위해서 등등상속해 내려오는 그 본지本旨가 무엇이냐 그거거든. 전강 조실 스님께서 여기에 법보선원을 창설하시고 중앙선원을 창설하시고 그러한 뜻이 오직 이 일대사를 위해서 우리 모두 후학자後學者들을 위해서 터를 닦아 놓으신 것이고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그말이여.
그런 부처님과 역대 조사와 근대의 여러 선지식들의 그러한 자비의 뒷받침이 없었던들 어떻게 우리가 오늘날 이 말세에 우리가 참선叅禪이라고 하는 말을 어디서 들으며, 참선을 하는 방법을 어떻게 잘 알 수가 있었으며, 어떻게 우리가 이, 이렇게 걱정 없이 이렇게 정진할 수 있었겠는가. 생각해 보면 불조佛祖와 선지식善知識들의 은혜恩惠를 생각하면 정말 우리가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목숨 바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신지 3천년이 지난 이 말세입니다.
온 세계는 말세末世의 여러 가지 현상이 도처에서 일어나 가지고 서로 죽이는 일 만을 연구하고, 서로 죽이고 도처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이 마치 파리 목숨만도 못합니다.
이러헌 시점에서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지해서 우리가 목숨 바쳐서 이 일대사를 위해서 도를 닦을 수 있는 이, 과거에 우리가 무슨 숙연宿緣을 심어 가지고 우리는 이러한 법을 만나게 되었는가. 참 뜨거운 것이 속에서 참 솟구쳐 올라올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이 이러한 정법正法을 만나 가지고 이렇게 이 중앙선원에서, 또 법보선원에서, 태화선원에서, 도처 선원에서 이렇게 옛날 부처님 때부터서 내려오는 이 동안거, 하안거 이 안거의 법도에 따라서 한철 한철을 결, 지내감에 따라서 점점 더 엄격하고 더 경건한 마음으로 이렇게 겨울살림, 여름살림을 이렇게 나고 있습니다.
그러헌 겉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생활 법도法度도 대단히 중요하지마는 그 내부에 대중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속에 진정한 신심信心, 정말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그 발심發心, 분심憤心,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또 들고 아무리 공부가 잘 안되어도 끈질긴 인내력으로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지혜롭게 용심用心을 해 가지고 알뜰히 정진을 해 나가면 기어코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고 순수무잡純粹無雜하여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제절로 들어지는 그러한 성성적적惺惺寂寂한 경계境界가 나타날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방금 조실 스님의 계축년 녹음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중국中國의 천목산天目山 고봉선사高峰禪師, 3년 사한死限하고 그 정진하신 말씀이 잠깐 나왔습니다마는, 우리는 일대사一大事를 요달了達할 때까지, 또 부처님과 같은 그러한 경지에 이를 때까지 신참新參 구참舊參을 막론莫論하고, 남녀와 노소를 막론하고, 스님네나 또는 이- 거사님이나, 또는 이- 청신녀를 막론하고, 오직 이 고봉高峰스님께서 도를 닦으신 바와 같은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정진을 해 나간다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우리도 그러한 대오大悟를 할 수가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대의지하大疑之下에 필유대오必有大悟하고, 소의지하小疑之下에는 소오小悟하고 무의지하無疑之下에는 무의라, 무오無悟라.
‘큰-의심 크고 간절한 큰 의심을 가지고 그 큰 의심 아래에서는 큰-깨달음이 있고, 작은 의심 아래는 작은 깨달음이 있고, 의심이 없으면은 깨달음도 없다.’
이 말씀은 어쨌든지 우리는 큰 깨달음을 목표로 삼는데,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그 의심이 커야 한다.
의심이 크단 말은 무엇이냐?
들다가 말다가, 하다가 말다가, 환경에 끄달려서 시비是非에 빠지고, 이러한 상태에서는 큰 의심이 날 수가 없습니다. 큰 의심이 날라면은 큰 분심憤心이 있어야 하고, 큰 분심憤心이 일어날라면은 큰 신심信心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신심信心이던가.
'나도 부처님과 조금도 차등이 없는 존재다. 나도 본래 깨달음을 가진 사람이다. 내가 어쩌다가 한 생각 미迷해 가지고 이런 중생의 꼴이 되어 가지고 육도를 윤회하다가 오늘날까지 왔지만, 본래는 부처님과 똑 같은 부처'라고 하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옳은 방법으로 열심히만 하면 결정코 금생에 확철대오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추호도 의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근기가 약하니까, 내가 여자니까, 나는 몸이 건강털 못하니까, 또는 나는 무식하니까, 등등 자꾸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의 근기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해 봤자 어피차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으니까 암만 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이렇게 스스로 자포자기自暴自棄를 하면서,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앉아서 흉내만 내고 있어봤자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 여자가 되었건 근기가 하열下劣했건 나이가 먹었건 그럴수록에 백 배 천 배 더 분심憤心을 내서 목숨 바쳐서 정진精進을 잡두리를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경허鏡虛 큰스님께서 어려서부터 그렇게 총명聰明하시고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그러한 참 총명한 머리를 가졌지만 그 공부를 하실 때에 처음에 경을 배우실 때 다른 사람이 열 번 읽으면, 한번 읽으면 당신은 열 번을 읽고, 다른 사람이 열 번을 읽으면 당신은 백 번을 읽고, 다른 사람이 백 번을 읽으면 당신은 천 번을 읽었어.
한번만 쑥 보기만 해도 외어버릴 수 있었지만, 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경 한 마디 한 마디를 뼛 속에 새기고자 해서' 백 번, 천 번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셔 가지고 이십二十 여 세의 아주 새파란 젊은 나이에 참 대강사의 전강을 받아 가지고 팔도에서 모여든 학인學人들에게 경經을 설說하시다가 참 이- 퇴속退俗한 은사恩師 덕택으로 자신이 이렇게 대강사大講師가 된 것이 너무 너무 고마워서 인사 차 그 은사를 찾아 가다가 전염병이, 요새 같으면 장티푸스 같은, 지금은 여러 가지 예방 주사도 있고 모다 치료하는 방법이 있지마는 옛날에는 그러한 그 전염병을 방지할 방, 방책方策이 없어 가지고 걸렸다 하면 온 마을이 다 모조리 다 죽었습니다. 그러헌 무서운 전염병이 이- 들어서 차례차례 죽어 가는 그런 마을에서 그러헌 것을 보고서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해.
그래가지고 스스로 생각해 보니까,
'내가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다 보고 대강사가 되어서 그 경을 강講하고 있지마는 이것이 이러한 그 사람이 막 죽어 가는 꼴을 보고 공포심이 난 것으로 봐서 이것이 경을 육두로 다 외우고 종횡縱橫으로 설說한들 이것이 어찌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대발심大發心을 해 가지고 동학사東學寺로 돌아가서 학인들을 다 흩어버려.
"각자 너희들 인연 따라서 각자 다 흩어져라"
보내버리고서 그 동학사 실상사, 그 지금 암자는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는데 그때는 거기 암자가 있었어.
그 암자에서 문을 쳐 닫고 그 구멍으로 밥을 넣어 달라고 해 가지고는 아주 죽기로 각오를 하고 용맹정진을 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했습니다.
그래가지고 우리나라 이조 때 이 최상승법이 얼마동안 침체를 하고 이- 경을 숭상하는 시대가 있었는데, 이 경허鏡虛스님께서는 그러헌 침체된 선풍禪風을 갖다가 부흥復興을 했어. 그래가지고 한국에 침체沈滯했던 선풍을 갖다가 이렇게 진작振作을 해 가지고 오늘날에 참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이 이렇게 참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경허鏡虛스님 밑에 모다 육대六大 선지식善知識이 모다 나오시고, 그 선지식 밑에 오늘날 이렇게 전국에 선풍이 이렇게 진작하게 된 것은 경허 큰스님의 그러한 참 출현으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 세계 도처에 참선법이 이렇게 일어나고 있지만 모두가 다 일본에서 모다 소개가 된 탓으로 모다 의리선義理禪, 의리義理로 따지는, 의리로 따져서 공안公案을 통과하는 그러한 참선법이 모다 소개가 되어 있지마는 우리 한국에 남아있는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법活句叅禪法은 이 경허鏡虛스님 만공滿空스님으로 해서 이렇게 내려오는 이 법이 아직 남아 있는 한, 부처님의 정법은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최상승법을 요원爎原의 불길처럼 다시 진작을 시켜서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이 활구참선법을 선양宣揚을 해서 불일佛日이 제, 제휘再輝하도록 헐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사부대중 한사람 한사람이 그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어쨌든지 이 몸뚱이 있을 때 목숨 바쳐서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 해 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고인古人의 전지田地에 이르러서 스스로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고 이 정법을 세계에 선양宣揚을 함으로써 우리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을 실천을 해야할 때가 바야흐로 온 것 같습니다.
춘종동해남비석春從東海南飛錫하고
추향서산우북방秋向西山又北方이로구나
삼백육순장요요三百六旬長擾擾되
부지하일도고향不知何日到故鄕이로구나
춘종동해남비석春從東海南飛錫,
봄에는 동해로 좇아 남으로 주장자를 날리고,
추향서산우북방秋向西山又北方이로구나.
가을에는 서산西山을 향하다가 또한 북방北方으로 가는구나. 저- 남방南方에서 해제를 하고 북방北方으로 가고, 북방에서 해제를 하고 저 남방으로 가고, 철철이 여기서 해제했다 저기 가서 결제하고, 저기서 결제했다 이리 오고, 오고 가고 동서사방東西四方으로 춘하추동春夏秋冬 계절 따라서 걸망을 짊어지고 왔다갔다 한다 그말이여.
삼백육순三百六旬을 장요요長擾擾하되,
삼백육십일三百六十日을 마냥 부산하게 왔다 갔다하되,
부지하일도고향不知何日到故鄕이여.
어느 날에 고향에 이르를까 알 수가 없구나.
인생人生으로 태어나서 인생의 오욕락五欲樂을 버리고 청춘을 버리고 출가出家를 해서 걸망을 짊어지고 선방禪房으로 이렇게 돌아 댕겨.
주지住持도 버려, 안하고 무슨 일체 것을 다 버려버리고 이렇게 걸망을 지고 선방을 나온 것만 해도 참 장하고 기특하고 훌륭하지.
그러나 결제하고 해제하고 걸망을 지고 동쪽 서쪽으로 이 선방 저 선방으로 다니는 것도 생각해 보면 장하고 또한 멋진 인생이라 할 수가 있지마는, 어찌 그것만으로써 청풍납자淸風衲子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정말 정든 고향을 버리고, 부모 형제를 버리고, 인생의 오욕락까지 다 버려버리고, 출가해 가지고도 명예名譽와 이, 이익利益 명리名利를 다 버려버리고 탁 걸망을 짊어지고 나왔다면 진발심眞發心을 해야겄드라.
정말 아까 고봉, 조실 스님 법문 가운데 나오는 천목산天目山 고봉高峰스님처럼 정말 한번 목숨 바쳐서 한바탕 해봐야 할 것이다 그말이여.
여기서 한철 지내보고는 또 그저, 또 저리 걸망 지고 가고, 또 다른 선방에 가서 조금 해 보다가 또 그 해제하면 이 선방에 오고, 철새처럼 저 갈매, 저 오리, 기러기나 저 두루미 또 황새처럼 그냥 무의미하게 철 따라서 저 시베리아로 갔다가 저 한강으로 왔다가, 저 낙동강으로 갔다가 저 중국 양자강으로 갔다가, 그렇게 무의미하게 그렇게 왔다갔다 하면, 하나의 일반 사람들이 볼 때에는 멋지게 사는 납자일런지는 모르나 그렇게 멋, 그렇게 참 철새처럼 살아서 또 뭣할 것이여.
그렇게 살다보면 내생來生에는 그런 황새 같은 것이 되어 가지고 또 세계를 계절 따라서 날아다니는 황새 밖에는 더 될 것이냐 그말이여.
우리가 출가한 목적, 부처님께서 이 출가 제도를 만들어 놓은 이, 이 목적은 황새처럼 떠돌아 다니라는 데 목적이 있는게 아닐 것이다 그말이여.
정말 진발심眞發心을 해야겠더라.
어느 곳이고 한 곳에서, 기왕 이 용화사 법보선원에 왔으면 이 법보선원에서 그 간절한 녹음 법문일망정 조실 스님의 법문을 살아 계신 조사 스님의 법문으로 알고 그 법문에 의지해서 정말 한바탕 '아주 뿌리를 뽑, 뽑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한번 닦아줬으면.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이 송담松潭이 원력願力을 세우고 참 잘 외호外護를 해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한철 겨우 나고 또 걸망 지고 갔다가 이럴 것이 아니거든. 한번 들어왔다 하면은 여기서 아주 뿌리를 뽑아버려 아주.
'죽어서 송장으로 나갈지언정 이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
부처님께서도 정각산正覺山에 들어가서 '내가 여기서 성불을 하지 아니하면 이 자리에 뜨지 아니하리라.'
일어서지 아니하리라.
고봉스님도 '내가 여기에서 확철대오를 못하면 여기서 내가 살아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는 이런 삼 년 사한을 하고, 이러한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이 아니고서는 되지 아니한 것입니다.
석 달을, 삼 년을 사한을 하고 그 자나깨나 화두를 들고 했지만 조금도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들어지지도 않고, 망상妄想 아니면 혼침昏沈, 혼침 아니면 망상으로 삼 년을 그렇게 지내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가 안 된다고 한탄을 하고 다른 데로 떠날 생각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고봉스님이 만약에 한철 해보고 안되어서 다른 절로 가고, 또 거기서 안 된다고 이리 오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떠돌아다니고 말았다면 그러한 대각大覺을 성취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보살선방의 여러 보살님네들도 이 정묘년丁卯年 삼동안거에 133명이라고 하는 많은 대중이 방부房付를 들이고 이렇게 정진을 했습니다. 방이 상당히 큰, 크고 저쪽 별당別堂까지 모다 이 선실을 했지마는 그래도 모다 중좌를 하고 빡빡하게, 그 공기도 나쁘고 이 자동차 소음 소리는 밤낮을 끊이지 않고 그렇게 소란스럽고 여러 가지가 시설도 불충분하고 하지마는, 그런 불평 한마디 없이 참 애써서 모다 정진들을 하셔서 원장으로써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진에 있어서는 이만 했으면 되었다 하는 그런 한도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화두를, 화두가 순일純一하게 잘 들리고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들린다 해도, '하! 참 공부가 잘된다, 참 기쁘다.'그 생각 내면 벌써 정진이 아닌데 어떻게 되어야 이만 했으면 공부가 잘된다고 만족滿足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금강경에 사다함, 수다원須陀洹, 사다함斯陀含, 아나함阿那含, 아라한阿羅漢 이러한 사과四果의 성현聖賢이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하는 생각을 내면 수다원이 아니요. '내가 아라한과를 증득證得했다' 하면 아라한이 아니요, '내가 보살과를 증득證得했다' 하면 보살이 아니라고 하는 그 법문이 구구절절이 씌어 있어.
정진을 하다가 좀 화두가 순일純一하고 성성한 경계가 나타났다고 해서 어찌 그까짓 경계를 가지고 족한 마음을 내서야 어찌 그것을 참 납자衲子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말이여.
한 철 두 철 열심히 하면 그만한 경계쯤이야.
무슨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그 경계요, 경전이나 조사의 어록을 봐도 하나도 의심헐 것이 없고 모두가 그 소식 같지마는 그까짓 것을 어찌 이사理事의 맥힘이 없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경지境地라 할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여.
조사祖師의 경지, 불조佛祖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바로 봤다고 헐 수가 없거든, 정진하다가 조금 깨끗하고 고요한 경지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까짓 것을 족한 줄을 알고, 처, 한 생각에 천만 길 지옥 구덩이로 떨어지는 결과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그말이여.
공부가 잘된다고 좋아하는 생각도 내서는 안되지만, 아무리 화두를 들어도 화두가 들리지지를 않고,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하지를 않고, 들을 때 뿐이지.
돌아, 금방 일분도 안되어서 딴 생각이 일어나고, 딴 망상이 일어나고, 번뇌가 일어나고, 그렇지 않으면 혼침이 일어나고, 그런다고 해서 아 이거! 퇴태심을 내고 자포자기를 할 수야 더군다나 없는 일이여.
그럴수록에 악착같이 대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말이여.
사자가 새끼를 낳아 가지고 그놈을 따뜻하게 품안에 앉고 젖을 먹이고 그러는 게 아니라, 그 놈을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뜨려서 수십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 떨어뜨려 버리면 그 놈이 떨어져 내려 가지고 죽지 않고 뻑뻑 기어올라온 놈, 고놈에 한해서 젖을 먹여서 키운다 그말이여.
그 떨어져 갖고 맥을 못 추리고 죽어버리는 것은 그건 버려버리는 거고, 올라오지도 못하고 뻐리적거리는 것도 그런 것도 돌아보지도 안해.
그 놈이 에미 있는 데를 찾아서 뻑뻑 기어올라온 놈, 고놈이라야 되거든.
옛날 부처님을 비롯한 역대 조사는 오늘날처럼 이렇게 선방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먹는 거, 입는 거, 처소處所가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을만한 그렇게 박한 상태에서 그래도 거기에서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해 가지고 그러헌 대도를 성취를 한 것입니다.
아무리 용화사가 공기가 나쁘고 주변이 시끄럽고 공양을 비롯한 여러 가지 수용이 박하다고 헌, 해도 부처님께서 겪으신 그러한 고행 정진에다 비하면, 비교하면 이것은 만 분의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도 참 무던히 여러 가지 좋지 않는 여건에서 참 정진하느라고 애들 쓰셨지만 앞으로는 여건이 나쁠수록에 수용이 박할수록에 더 대용맹심을 내서 결정코 대도大道를 성취를 해서 여러 단월檀越들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의 몸띵이를 낳아주신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로 하여금 공부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선방과 전통을 남겨주신 우리의 조사와 선지식과 부처님의 은혜를 보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해제를 하고 계속해서 눌러서 정진精進을 하시는 분은 말할 것도 없고, 또 부득이한 인연因緣으로 다른 처소處所로 가시더라도 어쨌든지 오늘 조실 스님의 말씀과 산승의 이 말을 가슴속 깊이 새기시고 정말 알뜰히 정진을 해 주시기를 거듭 부탁을 합니다.
게송 한마디를 읊고서 내려가고자 합니다.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니라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하면
하구녹수여청산何拘綠水與靑山이리요
약인투득상두관若人透得上頭關하면,
만약 사람이 상두관上頭關을 뚫어버리면,
시각산하대지관始覺山河大地寬이다,
비로소 산하대지 너그러운 것을 깨달을 것이다.
상두관上頭關, 우리의 본참공안本叅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요철了徹해 버리면 이것이 상두관을 투득透得하는 것이여.
그래버려야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너그러운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불락인간, 불락인간분별계不落人間分別界인데, 인간의 모든 시비是非와 분별分別의 경계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면 어찌 녹수 청산綠水 靑山에 걸릴 것이 있느냐?
인간의 시비와 분별경계에 떨어지기 때문에 녹수 청산에 걸리게 된다 이거여.
여기 이 법보선원이 공기가 좀 나쁘고, 자동차 공장 모다 소음이 있고, 또 공양 모다 그런 수용이 박하고, 여러 가지 시설이 불충분하다고 한들, 참으로 진발심眞發心을 해서 분별경계分別境界에 떨어지지 아니한다면, 차라리 좀 시끄러운 것이 공부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수용이 좀 박한 것이 오히려 도업道業을 성취하는데 좋은 채찍이 될 수도 있고, 여기에 모인 대중 가운데 발심한 사람도 있고, 발심이 덜되안 사람도 있고, 또 괴객이 있어서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사람이 있고, 그러한 것들이 발심만 제대로 허고 보면은 그러한 좋지 않는 여건이 훨씬 공부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거거든.
자기 자신이 발심發心이 부족하고 분심憤心이 부족하고 용맹勇猛이 부족한 것을 한탄할지언정, 주변 환경 좋지 않는 여건에다가 허물을 돌리지 말 것이다.
자기 밖에의 어떠한 경계, 다른 사람의 그런 허물을 돌리고 그러한 마음을 가지는 한은 삼천리 방방곡곡 어디를 간들 어찌 내게에 맞는 도업 성취할 수 있는 도량道場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모든 허물을 밖에서 찾는 한은 천당에다 갖다놔도 그 사람은 행복하지를 못할 것이여. 도솔천 내원궁兜率天 內院宮에다 갖다놔도 그 사람은 흡족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기해서 모든 허물은 자기에서 찾고, 모든 부족한 것은 자기 스스로 점검하는 데에서 해결을 한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거나 선지식善知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좋은 도반道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이고, 어디를 가나 선불장選佛場을 만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보살님 여러분들도 해제를 하고 오늘 다 댁으로 모다 돌아가시게 되는데, 댁으로 돌아가셔서 이 선방과 같지 못하다고 불평을 하시지 말고, 바로 그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 시끄럽게 떠들고 모든 것이 마, 내 마음과 같지 못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를 들고, 숨을 깊이 들어 마셔서 단전호흡을 하면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 나간다면 그 복잡한 세속,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는 세속, 가정, 사회가 온통 다 불보살佛菩薩이요, 남편은 부처님이요, 아들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이요, 며느리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요, 손자 손녀는 남순동자南巡童子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또 한 동안을 지내다가 다음 또 여름철에 오셔서 방부를 들이고 또 우리 모두 다 같이 정진하게 되시기를 바라면서 법상法床을 내려가고자 합니다.
- 송담선사 법문 35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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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億千供佛 福無邊 爭似常將古敎看
白紙上邊 書黑字 請君開眼目前觀.
風寂寂水漣漣 謝家人 秪在魚船.
억천의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복福이 갓이 없으나
어찌 항상 옛 가르침을 가져서 보는 것만 같으리오.
흰 종이 상변上邊에 검은 글자를 써서
그대에게 청하노니 눈을 떠서 눈 앞에 관觀하라.
[說誼]
他本、 謝家人、 在釣魚船.
要識古敎在處麽.
似海之深、 如山之高.
要識古敎文彩麽.
煦日發生舖地錦、 無紋印字錦上舒.
[설의]
다른 본本에는 <사씨謝氏집 사람은 고기잡이 배에 있다>라고 되어있다.
옛 가르침 있는 곳을 꼭 알고싶은가?
바다와 같은 깊음이요 산과 같은 높음이다.
옛 가르침의 문채文彩를 알고싶은가?
따듯한 햇살이 발생發生하니 땅에 비단을 펴고, 무늬 없는 인(無紋印)의 글자가 비단 위에 나타나네.
請君大開娘生眼、十二時中、 常照了.
常照了、 內外無侵眞境現、 一人獨擅其中事.
又古敎者、 以迹言之則、 古佛能詮之敎也
以理言之則學人、 一卷經也.
此一卷經、 佛祖相傳底法印、 衆生本有底一着子、 其來無始、故云古敎.
白紙上邊書黑字者、 經卷、 本具文彩也.
白屬偏、 自性隨緣二用也、 黑屬正、 寂滅一體也.
그대에게 청請하노니 어머니가 낳아주신 눈 뜨고 하루 열 두 때에 항상 비추어보라.
항상 비추어 봄이여!
안 팎으로 넘어섬이 없는 참 경계가 나타나리니, 한 사람이 '그 가운데 일'을 혼자서 마음대로 처리함이다.
또 옛 가르침이라는 것은, 적문迹門으로 말하면 고불古佛이 능전能詮한 가르침이다.
이치(理)로 말하면 학인學人의 한 권의 경(一卷經)이라.
이 한 권의 경은 불조가 서로 전하는 법인法印이며, 중생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일착자一着子니, 그 오는 것(由來)이 비롯함이 없을새 고故로 말하길 옛 가르침(古敎)이라 한다.
'흰 종이 상변上邊에 검은 글자를 쓴다'라는 것은, 경권經卷에 본래 갖추어진 문체文彩다.
'희다'는 것은 치우침(偏)에 속하니 자성自性과 수연隨緣의 두 용用이요, '검다' 라는 것은 바름(正)에 속하니 적멸寂滅한 하나의 체体이다.
請君開眼目前觀者、 勸令諸人、 不離日用、 轉一大經卷也.
風寂寂云云、 若轉得一大經卷、 卽外而境風自寂、內而智水澄淸、隨緣任眞、逐處消遙.
一似虛舟駕浪、 自東自西、 隨高隨下也.
'그대에게 청하나니 눈을 떠서 눈 앞에 관觀하라'하는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일상생활(日用)을 떠나지 아니하고 일대경권一大經卷을 굴리도록 권유한 것이다.
'바람은 적적하고 云云(물결은 잔잔한데)'은, 만약 일대경권一大經卷을 굴리면 곧 밖으로는 경계의 바람이 스스로 고요해지고 안으로는 지혜의 물이 투명하게 맑아 인연을 따라 진리에 맡기고, 곳을 따라 소요消遙함이 흡사 빈 배가 물결을 타는 것이 스스로 동東으로도 가고 스스로 서西로도 가며 물결따라 높이 올라갔다 또 낮게 내려오는것과 꼭 같은 것이다.
又風寂寂云云、謂釣得錦鱗時、也合風停而水面漣漣、
觀照實相時、也宜情忘而智水澄澄.
船爲釣魚之具、敎爲悟眞之法、悟眞者、專心悟眞之法、
則必有悟眞之期、
釣魚者、只在釣魚之船、則必有釣魚之時也.
또 '바람은 적적寂寂하고 운운云云'이라 한 것은,
비단 물고기를 낚아 얻은 때에, 바람이 멎고 수면이 잔잔해짐이 아울러 합해지고,
실상實相을 관조觀照한 때에, 마땅히 정情을 잊고 지혜의 물이 맑고 맑아짐(澄澄)을 말한(謂) 것이다.
배(船)는 물고기를 낚기 위한 도구(具)요 교敎는 진리를 깨닫기 위한 법法이니, 진리를 깨닫는 자가 진리를 깨닫는 법에 마음을 오롯이 하면 반드시 진리를 깨달을 기약이 있으리라.
물고기를 낚는자가 단지 낚시하는 배에 있기만 하면 반드시 고기를 낚는 때가 있으리라.
- [金剛經五家解說誼 금강경오가해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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請君開眼目前觀者、 勸令諸人、 不離日用、 轉一大經卷也.
'그대에게 청하노니 눈을 떠서 눈 앞에 관觀하라'하는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일상생활日常生活(日用)을 여의지 아니하고 일대경권一大經卷을 굴리도록 권유勸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