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임종할 때의 모습은 지금 모습]

이 뭣고? 2023. 6. 1. 21:00

[今是因,終是果]


問:「《觀經》明十六觀門,皆是攝心修定,觀佛相好,諦了圓明,方階淨域。如何散心而能化往?」
<관경(觀經)>에 십륙관문(十六觀門)을 밝히되, 「모두가 이 마음을 거두어 정(定)을 닦으며 부처님의 상호(相好)를 관(觀)하여 진실로 밝고 뚜렷함에 도달해야 바야흐로 정역(淨域)에 오를 것이다.」하였으니, 어찌 흐트러진 마음으로 능히 왕생(往生)할 수 있겠는가?


答:「九品經文自有昇降,上下該攝,不出二心:一、定心:如修定習觀,上品往生。二、專心:但念名號,眾善資熏,迴向發願,得成末品。仍須一生歸命,盡報精修。坐臥之間,常面西向。當行道禮敬之際,念佛發願之時,懇苦翹誠,無諸異念。如就刑戮,若在狴牢,怨賊所追,水火所逼。一心求救,願脫苦輪。速證無生,廣度含識;紹隆三寶,誓報四恩。如斯志誠,必不虛棄。
답하되, 구품(九品)의 경문(經文)에 스스로 오르고 내림과 위와 아래를 해섭(該攝, 갖추어 섭수)함이 나와있으나, 두 마음[二心]에 벗어나지를 않는다. 하나는 「정심(定心)」이니 정(定)을 닦고 관(觀)을 익혀서 상품(上品)에 왕생(往生)하는 것이요, 둘은 「전심(專心)」이니 다만 명호(名號)를 념(念)하고 온갖 선으로[眾善]으로 도와서 회향(迴向)하고 발원(發願)하면 반드시 말품(末品, 하품)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이에 모름지기 일생(一生)을 귀명(歸命)해서 보(報)가 다하도록 정진수습(精進修習)하되, 앉고 누움에 언제나 얼굴을 서쪽으로 향하고(언제나 부처님을 생각하고), 행도예경(行道禮敬)과 염불발원(念佛發願)의 때를 당해서 간절(懇切)히 정성(精誠)을 다하며, 모든 곳 모든 때에서 다른 생각이 없는 것[無諸異念]이 마치 죽음의 형벌을 받으러 가는 사람과 같고, 감옥에 갇힌 것 같으며 원수나 도적에게 쫓기고 물과 불에 핍박당하는 것과 같이, 일심(一心)으로 구호(救護)해주기를 구하면서 ‘이 고륜(苦輪)을 벗어나 속히 무생(無生)을 증득(證得)하고, 널리 함식(含識)을 제도하여 삼보(三寶)를 크게 이어서 맹세코 사은(四恩)을 갚으리라.’ 고 발원(發願)할지니, 이와 같이 뜻이 정성(精誠)스러우면 반드시 헛되이 버려지지는 아니하리라.



如或言行不稱,信力輕微;無念念相續之心,有數數間斷之意。恃此懈怠,臨終望生,但為業障所遮,恐難值其善友;風火逼迫,正念不成。何以故?如今是因,臨終是果,應預因實,果則不虛。聲和則響順,形直則影端故也。如要臨終,十念成就,但預辦津梁,合集功德,迴向此時,念念不虧,即無慮矣。夫善惡二輪、苦樂二報,皆三業所造、四緣所生、六因所成、五果所攝。
혹 말과 행(行)이 맞지 아니하고, 그 믿는 힘[信力]이 경미(輕微)하며, 생각 생각이 이어지는 마음이 없고, 자주자주 뜻이 끊어짐을 가지고서, 이러한 해태심(懈怠心)으로 임종(臨終)때에 왕생(往生)하기를 바란다면, 다만 업장(業障)의 가리운 바가 되며, 선우(善友)를 만나는 것도 아마 어려울 것이며, 또한 바람과 불[風火]이 핍박(逼迫)할 때를 당해서 정념(正念)을 이루지 못하리라. 왜 그런가 하면, 지금의 이 인(因)이 임종시(臨終時)의 과(果)이기 때문이니, 응당 먼저 인(因)이 실(實)다워야 그 과(果)도 헛되지 않는 것이다. 소리가 조화로우면 메아리도 (그대로)따르고, 형(形)이 곧은 즉 그 그림자도 단정(端正)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임종(臨終) 때의 십념(十念)을 성취하고자 할진댄, 다만 미리 나룻터[津梁] 부터 잘 판단하도록 할지니, 수행공덕을 합하고 모아서 이 때[此時]를 향해서 회향(迴向)하면 생각 생각이 이지러지지 않아서 곧 근심걱정이 없으리라.


若一念心,瞋恚邪淫,即地獄業;慳貪不施,即餓鬼業;愚癡闇蔽,即畜生業;我慢貢高,即修羅業;堅持五戒,即人業;精修十善,即天業;證悟人空,即聲聞業;知緣性離,即緣覺業;六度齊修,即菩薩業;真慈平等,即佛業。若心淨,即香臺寶樹,淨剎化生;心垢則丘陵坑坎,穢土稟質。皆是等倫之果,能感增上之緣。是以離自心源,更無別體。《維摩經》云:『欲得淨土,但淨其心;隨其心淨,即佛土淨。』又經云:『心垢故眾生垢;心淨故眾生淨。』《華嚴經》云:『譬如心王寶,隨心見眾色;眾生心淨故,得見清淨剎。』《大集經》云:『欲淨汝界,但淨汝心。』故知一切歸心,萬法由我;欲得淨果,但行淨因。如水性趣下,火性騰上,勢數如是,何足疑焉?」

만일 한 생각 마음에 진애사음(瞋恚邪淫)을 일으키면 곧 지옥업(地獄業)이요, 간탐불시(慳貪不施)하면 곧 아귀업(餓鬼業)이며, 우치암폐(愚癡闇蔽)하면 곧 축생업(畜生業)이요, 아만공고(我慢貢高)하면 곧 수라업(修羅業)이며, 오계(五戒)를 굳게 지니면 곧 인업(人業)이요, 십선(十善)을 닦으면 곧 천업(天業)이며, 인공(人空)을 증오(證悟)하면 곧 성문업(聲聞業)이요, 반연(攀緣)하는 성(性)을 여읠 줄 알면 곧 연각업(緣覺業)이며, 육도(六度)를 고르게 닦으면 곧 보살업(菩薩業)이요, 진실의 자비(慈悲)가 평등(平等)한 즉 곧 불업(佛業)이다. 이와 같이 마음이 청정(淸淨)하면 곧 향대보수(香臺寶樹)의 맑은 국토[淨剎]에 화생(化生)하거니와, 마음이 더러우면 곧 구릉갱감(丘陵坑坎)의 예토(穢土)에 몸을 받는 것이다. 모두가 지은대로 받는 과보(果報)며 능히 증상(增上)의 연(緣)을 감득(感得)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자기의 심원(心源)을 떠나서는 다시 별다른 체(體)가 없는 것이니, 곧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른바 「정토(淨土)를 얻고자 할진댄 마땅히 그 마음을 깨끗이 해야 할지니, 그 마음의 깨끗함을 따라서 곧 불토(佛土)도 깨끗해지는 것이다.」고 하였다.

-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권상卷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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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散과 定 ]

敺陽 文忠公遊嵩山。放意而往。至一古寺。風物蕭然。
구양敺陽 문충공文忠公이 숭산嵩山을 유람하다, 어느 오래된 절에 이르니 풍경이 호젓하고 적막하여 쉬어가고자 하여 그곳에 들렀다.

有老僧閱經自若。公與語。不甚顧。
태연하게 경을 읽는 노승이 있어서 문춘공이 그와 함께 자연스레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公問曰。古之高僧臨死生之際類皆談笑脫去。何道致之。
문춘공이 묻기를, “옛날 수행이 높은 스님은 생사를 마칠 때가 되면 모두가 담소를 하시고 좌탈입망하시며 떠나셨는데, 어찌하여 그리 할 수 있었습니까?

僧曰定慧力。
노승이 이르기를, “선정과 지혜의 힘입니다.”

公曰今寂寞無有何哉。
문춘공이 말하길, 오늘날에는 어찌하여 그런 분이 없습니까?

僧曰。
古人念念在定。臨終那得散。
今人念念在散。臨終安得定。
노승이 이르길,
옛 사람은 념념念念이 생각마다 정定으로 있었으니, 임종할 때에 어찌 어지러울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사람은 념념念念이 생각마다 산란散難으로 있으니, 임종할 때에 어찌 정定에 들 수가 있겠습니까?

文忠嘆服之。
문춘공이 이에 탄복하였다.


- [임간록林間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