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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사大宗師에 마음경계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 뭣고? 2021. 8. 3. 13:07


자소내내관원방(自少來來慣遠方)하고
기회형악도소상(幾廻衡岳渡瀟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일조답착가향로(一朝踏着家鄕路)하고
시각도중일월장(始覺途中日月長)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자소내내관원방(自少來來慣遠方).
젊어서부터 여태까지 오면서 고향을 떠나서 저 타방(他方)으로 돌고 돌면서 객지(客地)생활만 해왔다 그 말이여.


기회(幾廻)형약... 형악도소상(幾廻衡岳渡瀟湘)이냐.
몇 번이나 중생(衆生) 아상(我相) 인상(人相) 탐진치(貪瞋癡)의 산을 돌고 돌아서 애정(愛情)에 얽힌 강(江)을 건너고 건넜더냐 이 말씀이여.


일조답착가향로(一朝踏着家鄕路)하고... 하니.
하루아침에 고향 길을 밟으니, 하루아침에 어진 벗을 만나서 바른 선지식(善知識)을 만나가지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와 보니,


시각도중일월장(始覺途中日月長)이로구나.
비로소 생사무대(生死舞臺)에서, 생사의 강과 산을 돌고 도는 시간이 너무나 길고 길었다는 것을 깨달랐다.

_______

신유년(辛酉年)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이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렇게 구름처럼 모였습니다. 제방(諸方)에서, 제방의 선방(禪房)에서 한 철 정진(精進)을 잘 마치고 선배 후배를 서로 만나고 좋은 도반(道伴)들의 얼굴을 반가운 얼굴로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그동안 자기가 공부한 것, 또 다른 도반이 어떻게 공부했는가를 타진(打診)하고 서로의 뜻을 교환허기 위해서 우리가 서로 여기에 모였습니다. 서로 혈육(血肉)을 나눈 형제간 만난 것이 이보다 더 반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혈육을 나눈 형제간(兄弟間)은 애정(愛情)으로 얽힌 것이라 윤회(輪廻)의 근본(根本)이 될 뿐이지만, 우리 사부대중 이 도반(道伴)이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하기 위한, 지혜(智慧)의 눈을 뜨기 위한 최상승법(最上乘法)으로 서로 뜻을 같이 한 불제자(佛弟子)로서 도문(道門)에 있어서의 형제간(兄弟間)으로서 이렇게 만났으니 이보다 더 뜻이 깊고 반가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

이번 해젯날 어떤 납자(衲子)가 찾아와서,

“정진을 허다가 화두(話頭)가 의단(疑團)이 풀리고 어떠헌 화두를, 자기가 알고 있는 공안(公案)을 들고 참구(參究)를 해보아도 다 의심이 풀렸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들고 있는 그 화두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이 없고 일부러 의심을 좀 해볼랴고 해도 의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여?”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다도, 그저 그렇습니다.”

“그러면 무슨 화두든지 물어보면 다 여지없이 이를 수가 있다 그 말이냐?”

“예, 물어주십시오.”

떠억 절을 석 자릴(三拜) 허고 꿇어앉으면서 물어달라고 그래. 물어볼 것도 없이 그 사람이 바른 깨달음이,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람을 그전에 부터서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고 평상시에 그 마음가짐이나 행동이 너무 진실하고 여법(如法)해서 거짓말로 알았다고 헐 사람이 아니여. 그래서 그렇게 일부러 해제(解制)를 기(期)해서 불원천리(不遠千里)허고 온 그 정성(精誠)으로 보나, 그 전부터서 잘 알고 있는 안면(顔面)으로 보나, 또 용화선원에서 여러 철을 지낸 바도 있고 그래서, 마조원상(馬祖圓相)을 그려놓고,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도 안해도 치니, 칠 테니 아 한마디 일러봐라.”

“원상 안에 들어가겠습니다.”

들어... “그러면 옛날 마조(馬祖)스님 당시에 마조스님이 원상(圓相, ○)을 그려놓고 「입야타불입야타(入也打不入也打), 이 안에 들어가도 치고 들어가지 아니해도 친다.」 허니 어떤 중(僧)이 그 안에 떡 들어갔다. 마조스님이 그 사람을 탁! 치니까 그 중이 말하기를, 「스님은 저를 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디 어... 그 치지 못했다는 뜻이 무엇이냐?” 물어보니까,

“이 육신(肉身)은 쳤지만 영혼(靈魂)은 치지 못했다 그 말입니다.” 그렇게 대답을 헌다 그 말이여.

“그것보라”고.

자기가 그 원상 안에 들어가 놓고도 들어간 뜻을 바로 알지 못하고, 방맹이를 맞고도 어째서 맞은 중도 모르고, 원상을... ‘저를 치지 못했다’고 말을 하면서도 그 참뜻을 알지 못하고 분별심으로 ‘이 육체는 쳤지만 육체를 끌고 다니는 이 정... 마음은 치지 못했다’ 이러헌 귀신같은, 도깨비 같은 소견(所見)을 가지고 깨달랐다고 허는 그러헌 생각을 가지고 왔다 그 말이여.

이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공안을 주삼야삼(晝三夜三)에 거각(擧却)을 해서 대의단(大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정진을 해서 공안을 타파(打破)함으로서 자기(自己)의 면목(面目)을 깨닫고 불조(佛祖)에 면목(面目)을 깨닫고 생사(生死)문제를 해결하는 그러헌 관문(關門)이 되고, 종사(宗師)가 이 공안을 학자에게 물음으로써 학자(學者)의 소견(所見)을 여지없이 간택(揀擇)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문제다, 문제가 된다. 공안을 물어보면 그 사람의 소견이 어디에 빠져있다고 허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대중 가운데 지난여름 석 달 동안 그렇게 간절히 철저하게 정진을 했으면 자기 나름대로 어떠헌 소견이 난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어떠헌 소견이 났더라 하더라도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 아니라고 허는 것을 스스로 알고서 그것을 씻어버리고 ‘다맛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하도록 만 정진을 해야겄다’ 한 그렇게 스스로, 물어볼 것도 없이 스스로 자기의 공부를 다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정진(精進)이라 하는 것은 바른 스승의 지도 없이, 자기가 목숨 바쳐서 믿을 수 있는, 믿어지는 스승의 지도 없이는 세상없이도 바른, 바르게 헐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진을 바르게 못한 한에는 바른 깨달음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공안은 그러헌 분별심 사량심 가지고서는 도저히 타파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른 스승을 간택(揀擇)허지 않고는 바른 공부를 헐 수가 없고, 바른 공부를 허지 않는다면 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다. 바른 깨달음을 얻을랴며는 정진을 바르게 해야 하고, 바른 정진을 헐랴며는 바른 스승의 지도(指導)가 있어야만 되겠다.

아까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에 ‘어떻게 허면 그 바른 스승을 간택헐 수가 있느냐?’ 얼굴이 잘 생긴 것으로 스승을 가릴 것인가, 설법(說法)을 잘한 것으로서 바른 스승을 가릴 것인가, 계행(戒行)이 청정한 것으로서 스승을 가릴 것인가, 학식(學識)이 많은 것으로서 스승을 가릴 것인가, 친절하고 온화한 것으로서 스승을 가릴 것인가, 기운이 센 것으로서 스승을 가릴 것인가. 조실스님 말씀에는 ‘천하 간단한 방법이 있다. “스님이 견성(見性)을 허셨으면 어떠헌 공안(公案)에 깨달랐습니까? 어떠헌 공안에 깨달라가지고 어느 스님께 인가(印可)를 받았습니까?” 이렇게, 그것을 알아보면 그 스승이 바른 스승인가 아닌가를 알 수가 있다’ 고 하셨지만, 여지없이 이치에 합당한 말씀이지만, 우리가 감히 어디에 가서 ‘무슨 공안에 깨달랐느냐?’ 물어보기가 대단히 거북헐 것입니다.

바른 스승 만날랴며는 먼저 자기의 마음자세가 바르게 되는 것이 선행조건(先行條件)이 될 것입니다. 자기가 참다웁게 발심(發心)을 하고 참다웁게 분심(憤心)을 내서, 낸다면 선지식(善知識)은, 바른 스승은 반드시 만나질 것입니다. 스승을 만나는 것도 인연법(因緣法)으로 만나지는 것이라, 자기가 바른 스승을 만날 수 있도록 마음가짐과 신행(信行)을 철저히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자기가 바르게 발심을 못하고 바른 신심을 갖지 못하고 천하를 돌아댕이면서 스승을 찾으러 댕긴들 코앞에 스승이 있어도 바른 스승인 줄을 깨닫지를 못할 것입니다.

달마(達磨)스님께서 [혈맥론(血脈論)]에 말씀 허시기를, 「불급심사(不急尋師)면 공과일생(空過一生)이다. 급히 스승을 찾지 아니하면 헛되이 일생을 보내리라.」 「무사자오자(無師自悟者)는 만중희유(萬中希有)다.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은 사람은 만 명 가운데에도 있기가 어렵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승에게 무엇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바른 스승이 아니라면 나를 바르게 지도헐 수가 없고 바른 지도가 없이는 세상없이도 올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도(邪道), 삿된 스승을 스승으로 해서 공부를 헌다면 아무리 밤잠을 안자고 열심히 헌다고 헌들 삿된 소견에 떨어질 수밲에는 없을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은 바른 스승 밑에, 바른 스승의 지도하에서만 이룰 수가 있다. 바른 스승 지도 없이 공부하는 공부는, 혼자 토굴(土窟)에 가서 허거나 어디에 가서 허거나 열심히 헐수록 빨리 미치게 되거나 삿된 소견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_______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에, 처음에 소견이 나셔가지고 혜봉(慧峰)스님, 만공... 경허(鏡虛)스님의 제자이신 혜봉스님을 찾아가 뵈았어. 혜봉스님은 그때 마나님 한 분을 얻어가지고 지남철(指南鐵)을 차고 풍수(風水)질을 하면서 보림(保任)을 하고 계실 때 그때 그 혜봉스님을 찾아가 뵈었는데... 뵈아가지고 법담거량(法談擧揚)허신 것을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처음에 조실스님께서 그 혜봉스님을 찾아가서 뵈웁자마자, 조주(趙州)에 무자(無字).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조주스님이 대답허기를 「‘무(無)’」 했는데, 그 무자의 뜻, 무자(無字)의 뜻을 반(半)만 일러주십시오.” 이렇게 혜봉스님께 물었습니다.

혜봉스님이 답허시기를, “무(無)” 허셨는데,

조실스님께서 “어찌 그것이 무자(無字) 반(半)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혜봉스님이 “그러면 수좌(首座)가 일르게. 어떤 것이 무자 반인고?” 그러니,

조실스님이 대답허시기를 “무(無)” 허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끝에 혜봉스님께서 물으시기를,
“「거년(去年)가난이 비(非)가난이여. 거년에 가난은 가난이 아니여. -‘가난하다’ 하는 것은 빈... 빈공허다... 빈궁(貧窮)허다 그 말이여. 아주 가난해 빠졌다 그 말이여.- 거년(去年)에 가난한 것은 가난이 아니요[未是貧], 무입추지지(無立錐之地), 송곳 꽂을 땅이 없어... 없더니, 금년(今年)가난이 시 가난이여[始是貧], 금년 가난이 참으로 가난해서 송곳마저도 없다. 이렇게 대답했는데, 이렇게 대답헌 것은 겨우 여래선(如來禪) 도리(道理) 밲에는 안 된다.」그랬으니 어떻게 하면 조사선(祖師禪)이 되도록 이를 수가 있겠는가?”이렇게 혜봉스님이 조실스님께 물었습니다.

조실스님이 대답허시기를,
“능각첨첨첨사타(菱角尖尖尖似他)ㅂ니다. 뾰족허고 뾰족허기가, -‘능각(菱角)’이라 하는 것은 마래... 마램(마름)이라고 호수에 가면 삼, 세모꼴로 되아가지고 송곳처럼 뿔이 세 개가 뾰쪽 뾰족이 나와서 까맣게 물에 떠있는, 이파리는 물에 떠있으면서 그것을 뿌리를 더듬어 들어가면 거기에 까만 세 뿔난 열매가 있는데 그것을 까서 먹으면 그 맛이 고스롬허니 그 ‘마름’이라 하는 것인데- 그 마램(마름)이의 뿔이 뾰족허고 뾰족하기가 저 송곳과 같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말이여.

그때에 혜봉스님이 아무 말이 없으셨다.

그래서 조실스님 생각에, ‘아하, 내가 바로 일렀다고... 일렀기 때문에 아무 말씀이 없으시구나. 그 내가 이른 것이 옳게 일렀구나. 그래 나를 인가(印可)해주셨구나.’ 이렇게만 생각하고 흐뭇하게 생각하셨는데, 나중에 당신이 정진을 허셔서 나중에 떠억 그 공안을 살펴보니까, “크! 그것이 내가 잘못 일렀다. 만약에 그때에 내가 바로 일렀던들 혜봉스님이 그 반갑게 손을 붙잡고 춤을 덩실덩실 추셨을 텐데 내가 바로 일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말씀이 없다고 허는 것을 나중에사 깨달랐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대종사(大宗師)에 마음경계라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설사 그때에 당신이 잘못 일렀다 하는 것을 후일(後日)에 알았다 하더라도 이것을 감히 다른 사람 앞에, 수십 년 뒤에 이것을 대중 앞에 폭로(暴露)를 한다고 허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자기의 체모(體貌)를 생각해서 챙피해서라도 그 사실을 아무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데 그것을 대중 앞에 공포를 허지 아니헐 것입니다. 그러나 조실스님께서는 여지없이 그것을 대중 앞에 발로(發露)를 해서 공포(公布)를 허셨습니다. 조사(祖師)에 한마디, 이 공안에 내리신 한마디 말씀이라 하는 것은, 정법(正法)에 안목(眼目)을 가리워버리는 것이 되고 지혜(智慧)에 일월(日月)을 어둡게 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학자(學者)에 안목(眼目)과 생명을 죽이고 마는 것이 되는 까닭에 조실스님은 이것을 여지없이 만천하(滿天下)에 팍 털어 내놓고 공포를 허신 것입니다.

안목(眼目)을 갖춘 사람은 지끔이라도, 또는 앞으로 언젠가 바른 눈을 떴을 때에는 이 조실스님의 이 한 말씀이 과연 얼마나 중대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정말 이와 같은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식이 한마디 말로해서 소 배때기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말 뱃속으로 들어가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마치 불 무데기와 같애서 가까이만 갔다하면 대번에 내 몸에 불이 붙어서 나를, 나의 생명을 앗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선지식으로부터 받은 공안 하나만을 의지해서 목숨 바쳐서 참구(參究)할지언정, 이 공안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저 공안 가지고 이리저리 따져보고 이러헌 식으로 함부로 공안을 희롱(戲弄)하는 사람은 바른 깨달음에 이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 공안에 철두철미(徹頭徹尾)하면, 그래서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그 의단을 타파(打破)하면 결정코 천칠백 공안(1700공안)에 맥힘이 없게 될 날이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_______

요사이 일본(日本)에 의리선(義理禪), 사구참선(死句參禪)이 한국에 흘러들어와가지고 일부 거사(居士)들이 그러헌 식에 참선을 하고 그러헌 식에 참선을 자꾸 학생들에게 모다 가리키고 해가지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러헌 삿된, 못된 참선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의리선은 따질 것이 있고 알아들어갈 것이 있고 더듬어볼 것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며칠 동안 이리저리 해보면 그럴싸헌 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에 해보면 심심치 않고 무엇인가 공부가 나날이 되어간 것 같이 느껴지고 그래서 어떤 결론을 얻어서 그 선생한테 가서 일르면 “옳다” 그러고, 또 다른 공안 하나를 주어서 또 주면 그걸 가지고 이리저리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을 총동원해서 그럴싸한 무슨 결론을 얻어가지고 가서 말을 허면 또 다른 화두를 일러주고 해서, 다섯 개(5개) ‧ 열 개(10개) ‧ 스무 개(20개) 이런 식으로 해서 자꾸 따져 들어간다 그 말이여.

그래가지고 와서, 가끔 와서 인가(印可)를 해달라고 오는 학생 청년들이 있는데, 도저히 이것은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고 ‘옴 마니 반메 훔(oṃ maṇi padme hūṃ)’을 허고 ‘고왕경(高王經)’을 읽을지언정, 이러헌 죽은 참선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기위(旣爲) 참선을 헐 바에는 철저한 활구참선(活句參禪), 최상승참선(最上乘參禪)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활구참선(活句參禪)이라는 게 무엇이냐? 알 수 없는 의심(疑心), ‘이 무엇고?’ ‘「이 무엇고?」 하는 이놈이 무엇고?’ ‘무자화두(無字話頭)’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화두’를 하는 사람은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 무엇인고?’ 선지식으로부터 화두를 받은 그 화두 하나만을 정말 간절한 의심으로 오직 한결같이 분별심으로 따지지 말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이렇게만 해가는 것입니다.

‘어째서 따진... 따지는 것이 오히려 졸음도 안 오고 재미도 있고 해보면 무엇인가 헐 것이 있고 씹히는 것이 있어서 심심치 않은데 어째서 따지지 말라고 헙니까?’ 우리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허게 된 근원(根源)이 무엇이냐 하며는 무명(無明) 때문에 생사윤회를 허게 되고, 무명이라는 것이 다시 말을 바꽈서 말하면 분별심(分別心)이요 사량심(思量心)인데, 분별사량심이 그것이 바로 번뇌(煩惱)요 망상(妄想)인데, 그것이 바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근본(根本)인데, 어찌 참선을 한답시고 앉아서 번뇌망상, 중생의 분별사량심(分別思量心)으로 따져가지고 생사 없는 도리(道理)를 증득(證得)헐랴고 허느냐 그 말이여. 하나도 의심날 것도 없고 상식적인 얘기고 아무나 알 수 있는 얘긴데 어째서 그것을 모르고 따지고 있느냐 그 말이여.

따져서 알 수 있는 것이라면 가르켜주어버리면 그만인데 왜 안 가르켜주고 자기보고 따지라고 허냐 그 말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가리켜줄 수 있는 것이여?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배와서 아는 것이여? 얻기 어려운 사람 몸을 받았고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을 만났으면 바르게 닦아서 바른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거여.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는 것,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라 하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여. 다못 알 수 없는 생각. 앞으로 나아가자니 은산철벽(銀山鐵壁)이요 뒤로 물러서자니 천길만길 낭떠러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그렇게 콱 맥힌 그 자리에서 ‘이 무엇고?’ 앉아서도 ‘이 무엇고?’ 서서도 ‘이 무엇고?’ 누워서도 ‘이 무엇고?’ 밥을 먹을 때도 ‘이 무엇고?’ 옷을 입을 때에도 ‘이 무엇고?’ 똥을 눌 때도 ‘이 무엇고?’ 일을 할 때도 ‘이 무엇고?’ 산을 보아도 ‘이 뭣고?’ 새소리 물소리 기차소리를 들어도 ‘이 뭣고?’ 다못 그렇게만 해가는 것이여.


_______


견색비유색(見色非有色)이요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니라.

나무아미타...(南無阿彌陀...) (녹음 끊김)





.....알 수 없는 의단(疑團) 뿐이여.

문성불시성(聞聲不是聲)이라.
소리를 듣되 이 소리가 아니여.

개소리가 듣되 개소리가 아니여. 어찌 ‘저것이 개소리다’, ‘저것은 새파트(shepherd) 소리다’, ‘저것은 삽살이 소리다’, ‘저것은 똥개 소리다’, ‘저것은 기차소리다’, ‘기차 저것은 디젤(diesel)기관차다.’ 어찌 그러헌 분별심(分別心)을 계속 내서 가지에 다시 가지가 뻗고 잎에 가지... 다시 잎이 뻗고 뿌리에 다시 뿌리가 뻗어서 끊임없이 생사(生死)의 흐름 속에 휘말려 들어 가냐 그 말이여. 산을 보되 산인 줄을 모르고 꽃을 보되 꽃인 줄을 모르고 개소리를 듣되 개소린 중을 모르고 기차소리를 듣되 기차소린 줄을 모르고 누가 나를 칭찬하되 좋아헐 중도 모르고 누가 나를 비방(誹謗)허되 썽낼 줄도 모르고 다못 알 수 없는 의심.

(색성불애처(色聲不礙處))
온갖 색상(色相), 온갖 소리에 걸리지 아니할 때,


친도법왕성(親到法王城)이라.
바로 법왕(法王)이 계시는 곳에 이르른 것이다. 그렇게 정진을 해갈 때 어찌 공안을 타파하지 못하며 생사해탈(生死解脫)을 못할 것인가?

…….


- 송담선사 법문 세등 35번.



* 마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