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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것이 중대(重大)하고 급(急)한 것이 아니라】

이 뭣고? 2021. 7. 11. 09:41

【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중요한 것이여.】



정체종래절성색(正體從來絶聲色)이요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묘봉정상일전신(妙峰頂上一轉身)하면
시방무처불봉거(十方無處不逢渠)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오늘은 신유년(辛酉年) 사 월(4월) 십칠 일(17일) 세등선원(世燈禪院) 하안거결제일(夏安居結制日)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초여름을 맞이해서 산야(山野)에는 온갖 나무가 푸릇푸릇 잎이 피고 봄에 찬란히 피었던 꽃은 여기저기 지고 있지만, 꽃 진 뒤에 그 싱싱한 신록(新綠)은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 숲 사이사이 가지가지에 온갖 새들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이리 날고 저리 날으면서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푸른 산, 흐르는 물, 한참 무성허게 피고 있는 온갖 나뭇잎, 지저거리는 새소리, 이러헌 것들이 어떠헌 경전(經典)에 설법(說法)보다도 더 여지없이 최고에 진리(眞理)법을 설(說)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승(山僧)이 법상(法床)에 오를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오르기 전에 이미 법(法)을 다 설해 마쳤고, 지끔도 계속해서 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눈이 있는 사람은 볼 것이며, 귀가 있는 사람은 들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 먼 데에서부터, 자기 있는 곳에서 그 법문을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있는 자리에서 무상법(無常法)을 들을 수 있건마는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내가 법상에 올라올 필요도 없는데 또 이렇게 올라 왔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방금 고(故) 전강선사(田岡禪師)에 법문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너무나도 자상(仔詳)하고 간절(懇切)하게 그리고 최고의 최상승법(最上乘法)을 여지없이 설(說)해 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십구 년(49년) 동안 설허신 경전(經典), 종이에 쓰여진 경전은 부처님께서 참으로 설하고자 한 법문에 찌께기에 지내지 못한 것입니다. 참으로 부처님께서 설하고자 한 법문은 종이에 담애... 담겨질 수가 없고, 담겨져 있지도 않습니다. 그 요긴(要緊)한 법문의 껍데기, 찌께기 그 일부분만이 경전에, 책으로 된 경전에 표현이 되아 있는 것뿐인 것입니다. 왜 부처님께서는 그 설하고자 한 법문을 왜 바로 설해 주시지 못하고 그 일부만을, 그 껍데기만을 설해 주셨으며 그것만이 왜 종이에 올려진 채 지금 우리에게 전해졌을까? 최고에 법은 입을 가지고 설할 수가 없으며 귀를 통해서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법을 설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법을 설하지 않는다면 귀 먹고 눈뜨지 못한 중생은 언제 눈을 뜨고 귀가 열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대자비를, 대자비심(大慈悲心)을 일으켜서 사십구 년(49년) 동안을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문(法門)을 설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부처님께서 설해 주신 그 법을 통해서 말로써 설할 수 없는 참 법문을 들어야, 듣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말로써 설할 수 없고 귀로써 들을 수 없는, 경전에도 쓰여지지 않는 진짜 진리(眞理)를 깨닫기 위해서는 참선(叅禪)을 해서 스스로 그 도리(道理)와 계합(契合)이 되는 길 밲에는 없는 것입니다.


정체(正體), 그 바른 그 진리의 체(體)는 종래(從來)로 절성색(絶聲色)이여. 원래 소리와 색상을 여읜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무슨 그 자체(自體)에 소리가 있고 그 진리 자체에 모냥이 있다면 눈으로 볼 수가 있고 귀로 들을 수가 있겠지만, 색상(色相)이 없기 때문에, 소리가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도 들을 수가 없는 것이여.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도 들을 수도 없는 것을 볼랴고 그러고 들을랴고 그것을 찾은 즉슨은 자최가 없어. 볼 수가 없어. 그러나 ‘이 무엇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판치생모(板齒生毛)’라든지 ‘시삼마(是甚麽)’라든지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든지 이러헌 교외별전(敎外別傳), 교(敎) 밖에 따로 전해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조사선(祖師禪)은 용궁(龍宮)에 있는 경전(經典) 속에도 이것은 들어있지 않다.

‘용궁(龍宮)에 있는 경장(經藏)에도 들어있지 않는다’ 한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불법(佛法)이 사태(事態)가 나가지고 모든 스님네를 학살(虐殺)을 하고 모든 경전은 닥치는 대로 불을 사르고, 그렇게 해서, 그리고 온갖 사찰(寺刹)은 다 파괴(破壞)가 되고 이렇게 해서 인도(印度) 땅에 불교(佛敎)가 자최가 없어졌습니다. 그때에 용왕(龍王)이 부처님의 유촉(遺囑)을 받아가지고 그 흩어져있는 경전을 다 모아서 용궁에다가 보관을 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용궁에 가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경전이 그 안에 다 소장(所藏)이 되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궁에 있는 경장 속에도 ‘판치생모’나 ‘정전백수자’ 이러헌 것은 들어있지 않다 이것입니다.

그 교외별전에 최상승법 이 조사선(祖師禪)을 통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간에 이론을 떠나서 참구(參究)를 허면, ‘이 무엇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다맛 알 수 없는 의심, 일체사량분별심(一切思量分別心)을 여기에 사용을 허지 말고 오직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으로 화두(話頭)를 참구(參究)를 하면, 처음에는 화두 들 때는 의심이 있다가 금방 의심, 화두가 없어져버리고 딴 생, 딴생각이 들어오고 그렇지만 딴생각이 들어오면 그것을 없앨랴고 허지 말고, 그것을 누를랴고 허지도 말고, 성화(成火)도 대지 말고 그냥 고대로 놓아두고 ‘이 뭣고?’

다못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면, 나중에는 화두를 일부러 들지 아니해도 저절로 화두가 현전(現前)허게 된다, 들어지게 된다 그 말이여. 앞에 화두가 떠억 나타나게 돼. 앉아서도 화두가 고대로 있고, 서도 고대로 있고, 밥을 먹을 때도 고대로 있고, 걸어갈 때에도 고대로 있고, 누가 옆에서 떠들고 있어도 고대로 있고, 장바닥에를 가도 고대로 화두가 들어져 있게 된다 그 말이여. 이것이 의단(疑團)이 독로(獨露)여. 의단이 독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면 머지 안해서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허게 된다. 그 화두를 타파하게 됨으로써 조사(祖師)에 면목(面目)을 볼 수가 있고, 자기(自己)에 참 면목(面目)을 볼 수가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진면목(眞面目)을 볼 수가 있게 된다.


묘봉정상(妙峰頂上)에 일전신(一轉身)하면,
묘봉(妙峰), 묘고봉(妙高峰)이라 하는 것은 수미산(須彌山)을 ‘묘고봉’이라 하는데, 수미산 꼭대기에까지 올라가. 그 알 수 없는 의단이 독로해서 일체번뇌망상(一切煩惱妄想)이 다 끊어져버리고, 산을 보아도 산이 보이지 아니하고 물을 보아도 물이 보이지 아니하고, 온갖 소리를 들어도, 들어도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고, 밥을 먹어도 한 톨의 쌀도 씹은 바가 없고, 길을 걸어가도 걸어간 줄을 모르고, 이 몸띵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조차도 감각을 허지 못해. 그러한 가운데에도 오직 화두에 대한 의단(疑團), 알 수 없는 의단만이 독로헐 때 거기에서 단 한 생각이라도 딴 생각을 먹게 되면, 가령 ‘아, 인자 되았다’든지, ‘이러헌 상태로 영원히 갔으면’ 이런 생각을 먹는다든지, ‘이럴 때 어떤 선지식이 나를 탁 깨닫게 해주기를’ 바랜다든지, ‘어서 깨달랐으면’ 헌다든지, 잠깐이라도 딴 생각을 먹으면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여. 그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서도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계속 의심(疑心)을 관(觀)해나가다가, 나가면 거기에서 한 번 몸을 굴려. 거기에서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하게 되면,


시방(十方)에 무처불봉거(無處不逢渠)라.
시방세계에 참나 아닌 것이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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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조실(祖室)스님 법문을 통해서 여러분이 들으셨는데, 조사선(祖師禪), 공안법(公案法), 공안법에 대해서 그렇게 분명허게, 간절허게 설해주셨습니다. 공안(公案)을 함부로 천착(穿鑿)을 해, 이리 따져보고 저리 따져보고, 이렇게 알아맞혀보고 저렇게 더듬어보고. 자기의 본참공안에,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타파(打破)해서 확철대오(廓徹大悟) 허기 전에는 절대로 다른 공안에 대해서 천착을 해서는 안 돼. 더듬어보고 알아보고 짐작해보고 비교해보고 따져보고 이것은, 그러헌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 그런 것으로써 공부를 삼는 사람은 바른 깨달음을 얻기는 영영 틀리는 것이고 마군(魔軍)이의 종자(種子) 밲에는 되지를 않는 것이여. 앉어서 헌다는 짓이 공부를 헌답시고 앉아서 밤낮 이리 저리 공안을 천착하고 따지고 분별사량심(分別思量心)으로 복탁(卜度)을 하고, 이러헌 사람을 가리켜서 ‘사견종자(邪見種子)’라 하는 것이여. ‘삿된 소견을 가진 씨알머리다.’ 아무리 공부를 해봤자 그것은 외도사견(外道邪見), 사견종자 밲에는 안 된다 이거거든.

차라리 참선(參禪)을 아니하고 그냥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열심히 부르면 차라리 나을지언정, 참선을 헌답시고 공안을 천착하고 분별사량심으로 따져서 알아맞힐랴 그러고, 과거에 조사스님네의 그 법문답(法問答)허는 흉내나 낼랴고 그러고, 그래가지고 눈치로 짐작하고 남 허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고, 그래가지고 그것이 어찌 참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겠느냐 이 말이여. 차라리 깨닫지 못한 채 일생(一生)을 마쳐. 오직 한 공안에 철두철미(徹頭徹尾), 충실히 의심(疑心)을 관(觀)해나가고, 마지막 깨닫지 못한 채 숨을 거두는 한이 있다하더라도 마지막 숨 거둘 그 순간까지도 ‘이 뭣고--?’ 허면서 숨이 딸깍 지도록 할지언정 깨닫지 못헐까 두려워 헐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법(如法)히 간절(懇切)히 허면 깨닫지 못헌 법이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죽을 때까지 시절인연(時節因緣)이 성숙(成熟)허지 못해서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끔도 한(恨)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법하게 간절히 공부를 헌 사람은 그다음 숨이 끊어지자마자 가장 공부허기 좋은 여건 하에 몸을 새로 태어, 받아나가지고 젊어서 일찌감치 확철대오허게 되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스님 법문 속에 여러 가지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 모다 이러헌 말씀을 자세히 해주셨지만, 그것은 모다 공안(公案)에 견처(見處)의 깊고 옅은 경우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해주셨냐하면, 그리고 「쥐가 고양이 밥을 먹었다」고 허는 그 공안에 대해서도 말씀을 해주셨냐하면, ‘그 공안을, 공안을 보는데 있어서 그러헌 미세(微細)한 그리고 분명(分明)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바른 선지식(善知識)의 인가(印可)가 꼭 필요허다고 허는 거, 인가 없이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어떠헌 견처가 있어가지고 그것으로써 만족을 삼고 그것으로써 살림을 삼아가지고 함부로 알았다고 허는 소견(所見)을 가지고 가짜 도인(道人)노릇을 허지 말아라.’고 허는 그 간절한 자비심(慈悲心)으로 일러주신 말씀이여.

깨달은 것이 중대(重大)하고 급(急)한 것이 아니라 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중요헌 것이여. 바른 길을 가는 사람, 바르게 수행을 해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헐 수 밲에는 없는 것이여. 바른 길을 가지 아니하고 아무리 깨닫기를 목마르게 기다린다고 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여. 가령 서울이 가고 싶어서, 빨리 서울에 도달허고 싶어서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조바심을 내고 초조허게 몸부림을 친다고 해서 서울에 빨리 가지는 것이 아니여. 서울에, 참으로 서울에 빨리 가고 싶거든 빨리 바른 길을 찾어서 열심히 그 길을 가는 것뿐인 거여. 열심히 그 바른 길을 향해서 가기만 허면 서울에는 반드시 도달(到達)하고야만 마는 것처럼,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하면 바른 수행(修行)을 열심히만 허면 되았지 열심히 공부는 허지 아니하고 빨리 깨닫기 만을 바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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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수성빙신유지(滴水成氷信有之)로되
녹양방초색의의(綠楊芳草色依依)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추일춘화무한의(秋日春花無限意)요
불방한청자고제(不妨閑聽鷓鴣啼)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적수성빙신유지(滴水成氷信有之))
깨달음. 우리가 깨달라야 할 그 당체(當體). 우리의 참나에 모습은 눈으로 볼래야 볼 수 없고 귀로 들을래야 들을 수가 없어. 마치 그 겨울 강추위 헐 때에 물방울이 딱 떨어지면 떨어지자마자 탁 얼어버리고, 또 물방울이 톡 떨어지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딱 얼어붙어버리고 그렇듯이, 이 참나 진여체(眞如體)라고 허는 것은 용납수(容納受)가 없어. 볼래야 볼 수도 없고 들을라야 들을 수도 없고 그것에 대해서 말로 표현을 헐래야 표현을 헐 수도 없고 모냥으로 그릴라야 그릴수가 없어. 그러나,


녹양방초색의의(綠楊芳草色依依)라.
푸릇푸릇한 저 버드나무, 울긋불긋한 꽃.....(녹음 끊김)


- 송담선사 법문 세등 3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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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


○ 정체종래절성색(正體從來絶聲色) 멱즉지군불견종(覓則知君不見蹤)
묘봉정상일전신(妙峰頂上一轉身) 시방무처불봉거(十方無處不逢渠)
정체(正體), 그 바른 그 진리의 체(體)는 종래(從來)로 절성색(絶聲色)이여. 원래 소리와 색상을 여읜 것이다 그 말이여.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도 들을 수도 없는 것을 볼랴고 그러고 들을랴고 그것을 찾은 즉슨은 자최가 없어. 볼 수가 없어. 그 수미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서도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계속 의심(疑心)을 관(觀)해나가면 거기에서 한 번 몸을 굴려. 거기에서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하게 되면, 시방세계에 참나 아닌 것이 없는 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 적수성빙신유지(滴水成氷信有之) 녹양방초색의의(綠楊芳草色依依)
추일춘화무한의(秋日春花無限意) 불방한청자고제(不妨閑聽鷓鴣啼)
깨달음. 우리가 깨달라야 할 그 당체(當體). 우리의 참나에 모습은 눈으로 볼래야 볼 수 없고 귀로 들을래야 들을 수가 없어. 마치 그 겨울 강추위 헐 때에 물방울이 딱 떨어지면 떨어지자마자 탁 얼어버리고, 또 물방울이 톡 떨어지면 떨어지기가 무섭게 딱 얼어붙어버리고 그렇듯이, 이 참나 진여체(眞如體)라고 허는 것은 용납수(容納受)가 없어. 그런데 푸릇푸릇한 저 버드나무, 울긋불긋한 꽃빛깔이 아련하구나. 가을에 뜨는 휘황창 밝은 달, 그리고 봄에 피는 울긋불긋 아름답게 피는 봄에 꽃들의 그 한없는 깊은 뜻은, 자고새가 노래하는 것을 한가히 듣는 것도 또한 방해롭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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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가 없이 자기가 자기 나름대로 어떠한 견처가 있어가지고 그것으로써 만족을 삼고 그것으로써 살림을 삼아가지고 함부로 알았다고 하는 소견(所見)을 가지고 가짜 도인(道人)노릇을 하지 말아라.’

「깨달은 것이 중대(重大)하고 급(急)한 것이 아니라 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중요한 것이여.」 바른 길을 가는 사람, 바르게 수행을 해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여. 바른 길을 가지 아니하고 아무리 깨닫기를 목마르게 기다린다고 해봤자 소용이 없는 것이여. 가령 서울이 가고 싶어서, 빨리 서울에 도달하고 싶어서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조바심을 내고 초조하게 몸부림을 친다고 해서 서울에 빨리 가지는 것이 아니여. 참으로 서울에 빨리 가고 싶거든 빨리 바른 길을 찾아서 열심히 그 길을 가는 것뿐인 거여. 열심히 그 바른 길을 향해서 가기만 허면 서울에는 반드시 도달(到達)하고야만 마는 것처럼,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하면 바른 수행(修行)을 열심히만 하면 되었지 열심히 공부는 하지 아니하고 빨리 깨닫기 만을 바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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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頌】 滴水成冰이 信有之하나 綠楊芳草가 色依依로다. 秋月春花無限意에 不妨閑聽鷓鴣啼로다.

물방울 떨어지어 얼음됨이 진실로 있으나, 파란 버들과 꽃다운 풀의 빛이 의의依依하도다(아련하도다). 가을 달과 봄꽃의 그지없는 뜻에, 자고鷓鴣의 울음을 한가로이 들음이 방해롭지 아니하도다. 【의의依依는 버들잎이 드리워 능청능청한 모양이라. 자고鷓鴣는 남방南方에 있는 새이니 봄에 우나니라.】


【說誼】 此事는 寒威威冷湫湫하야 滴水滴凍하야 江河가 絶流하야 纖塵이 不立하며 寸草가 不生하나니

이 일은 서늘하여 씩씩하며(위엄이 있으며) 냉冷함(차가움)이 서늘서늘하여, 방울로 떨어지는 물이 떨어지자마자 얼어 강하江河(강과 하천)가 흐름이 끊어져 가는 티끌이 서지 아니하며 마디만한 풀도 나지 아니하나니,


【說誼】 雖然如是나 寒暄이 不常이라 日煖風和하야 山川이 競秀하며 玄黃이 可判이며 黑白이 分明하니 伊麽則秋月春花無限事에 各各自有無限意하도다.

비록 이 같으나, 추우며 더움이 한결같지 아니하여, 날이 더우며 바람이 화和하여 산과 시내가 다투어 빼어나며 검으며 누럼이 가히 구별되며 검으며 흼이 분명하니, 그러면 가을 달과 봄꽃의 한없는 일에 각각 제 스스로 한없는 뜻을 두었도다.


【說誼】 事事가 一一天眞이라 著著에 可以明宗이리니 可以向翠竹黃花邊하야 明得此事이며 可以向鶯吟燕語邊하야 明得此事이며

일마다 낱낱이 천진天眞이라 붙은 데마다 가히 종宗을 밝히리니, 가히 푸른 대와 누런 꽃 갓(邊)을 향向하여 이 일을 밝힐 것이며, 가히 꾀꼬리 울음과 제비 말의 갓(邊)을 향向하여 이 일을 밝힐 것이며,


【說誼】 以至一見一聞하야도 一一皆是發機的時節이며
一色一香이 一一開我에 活眼的物事이로다. 須信道山僧이 未陞座이어늘 風鐸이 已搖舌이니라.

한 번 보며 한 번 들음에 이르러도 낱낱이 다 이 기機(기틀)를 발發하는 시절時節이며, 한 빛 한 향香이 낱낱이 나의 산 눈을 열게 하는 것이로다. 이르되, “산승山僧이 좌座에 오르지 아니하였거늘, 바람에 주엽쇠(풍경)가 이미 혀를 흔드는구나(설하는구나).” 함을 모름지기 믿을지니라.

  • <금강경삼가해金剛經三家解諺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