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無?】
【무無? 어째서 무無?】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몰심사(沒心思)하되
철벽은산백부지(鐵壁銀山百不知)다.
철벽(鐵壁)과 은산(銀山)이 앞에 꽉 앞을 가로막고 있어.
(의래의거의무간(疑來疑去疑無間)
고목개화만고지(枯木開花滿故枝))
의심허고, 화두(話頭)에 대한 의심(疑心)이 간절하고 또 간절해서 그렇게 의심해 오고 의심해가서 사이가 없으면, 고목(枯木)이 꽃이 피어서 가지에 가득한 때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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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허면 윤회(輪廻)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가? 그것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눈으로 무엇을 볼 때 보면 그것이 그리 쫓아가지 말고, 또 귀로 무엇을 들으면 듣는 데로 끌려가지 말고, 눈으로 무엇을 보는 그 찰나(刹那)에, 귀로 무슨 말을 들은 찰나(刹那)에 바로 ‘이 뭣고?’ 자기, 자기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화두(話頭)를, ‘판치생모화두(板齒生毛話頭)를 탄 사람은 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그 찰나에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모든 화두에 근본(根本)인 ‘시삼마(是甚麽) 이 뭣고?’는 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찰나에 ‘이 뭣고?’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험으로 해서 무량겁에 윤회의 사슬로 부터서 깨달음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복잡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힘이든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무상(無常)을 깨닫고 발심(發心)만 했다면 우리는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어디에서라도 ‘이 뭣고?’는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썽이 날 때도 그리 쫓아가지 말고 바로 그걸 발판으로 해서 ‘이 뭣고?’ 이렇게 ‘이뭣고’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자꾸 허다보면 그것이 나중에 저절로 될 때가 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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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산승(山僧)은 ‘무자화두(無字話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왜 무자화두를 말씀을 드리게 되았냐하며는, 해제를 맞이해서 여러분이 화두를 신청을 했습니다. 천칠백(1700) 공안(公案) 가운데 무엇을 말씀을 드릴 수도 있으나 특히 무자(無字)를 말씀해드린 것은, 산승이 조실스님으로부터 무자화두를 타가지고 십 년(10년) 동안을 묵언(默言)을 허면서 무자화두(無字話頭)로 정진(精進)을 했습니다. 그래서 무자에 대해서는 유독 마음속에 감명이 깊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헌 감동을 바탕으로 해서 무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스님께,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조주스님은 “무(無)” 그랬습니다.
-우리말로는 ‘없다’하고 번역을 허게 되겠습니다마는-
그러니 그 「부처님 말씀에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는데 왜 조주스님은 ‘무(無)’라고 하셨는가?」
그것이 의심(疑心)이 날 수밲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무(無)?’
‘어째서 무(無)?’
이렇게 무자화두를, 화두를 탄분은 그렇게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이래이래 해서 무라고 허셨을 거다.’ ‘아니 그것이 아니고 이래서 했을 것이다.’ 그것을 이론적으로 따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無)?’
‘어째서 무(無)?’
어떠헌 분은 무자화두를 들면서 ‘무(無)—’ 허면서 항상 무자(無字)만 들여다보는, 그렇게 허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사구참선(死句參禪)인 것입니다. 의심이 없이 무자만 들이다보고 ‘무(無)—’ 그렇게 허는 공부는 죽은 참, 죽은 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갖고는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신통일(精神統一)은 허는 데에는 도움이 될는지 모르나 절대로 의심이 없이 무자만 들이다 보고 있으면 그것은 죽은 참선이요 사구참선이라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무(無)?’
‘어째서 무(無)?’
이렇게 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을, 의심(疑心)의 무(無)자를 관(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화두 신청헌 사람은 그렇게 철저히 정진을 해갈 것이고, 그동안에 ‘이 뭣고?’나 ‘판치생모’나 다른 화두를 하신 분은 화두를 무자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그동안에 해오신대로 해나가되 ‘이 뭣고?’가 되았건 ‘판치생모’가 되았건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있는 화두관(話頭觀)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몸띵이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타고 있으나, 눈으로 무엇을 볼 때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들었거나, 코로 무슨 냄새를 맡거나, 혀로 무슨 맛을 보거나,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느끼거나, 누구한테 욕을 얻어듣거나 칭찬하는 말을 듣거나, 육체에 안이비설신의가 있음으로 해서 그 안이비설신의의 상대(相對)가 되는 것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인데, 색성향미촉법을 대(對)하게 되면 거기에 육식(六識)이 일어나는데 그 육식(六識)을 어떻게 단속(團束)해나가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허느냐, 금방 말씀드린 화두로써 떠억 정진을 해나가느냐에 따라서 생사(生死)의 해탈(解脫)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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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지시잠시간(百年只是暫時間)이요
막파광음당등한(莫把光陰當等閒)이다.
인생이 많이 살면 백년 살고 백년 못 살고 구십(90), 팔십(80), 칠십(70), 육십(60), 오십(50), 오십 안에도 죽은 사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백년이라고 해봤자 잠시 동안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광음(光陰)을 그럭저럭 헛되이 지내지 말아라. 일초를 함부로 보내지 마라.
약요불경염노안(若要不經閻老案)인댄
염라, 죽어서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끌려가가지고 심판을, 엄한 심판을 받, 받기를 원치 않거든,
(직수참투조사관(直須參透祖師關))
본참화두, 조사관(祖師關),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이 뭣고?’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철저허게 정진을 해야 한다.
이런 조사(祖師)의 게송(偈頌)입니다.
우리는 생사(生死)가 오늘 죽느냐 내일 죽느냐가 아니라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입니다. 숨 한번 내 쉬었다가 들어마시지 못하면 벌써 그것이 내생(來生)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의 도반이요 훌륭한 선사(禪師)인 정일(正日)스님도 열반(涅槃)하셨는데, 엊그제 봉철선사(峰徹禪師)라고 헌, 여러분도 아시는 분도 많으시리라고 생각이 됩니다마는, 참 걸림이 없이 말하고 걸림이 없이 행동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걸림이 없이 사는 분이지마는 철저히 조실스님을 신(信)하고 그런 가운데에도 수행을 하는 그런 도반(道伴)이었었는데 엊그제 작고(作故)했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의 형제자매 도반 여러분도 ‘생사는 호흡지간에 있다’고 허는 생각을 철저히 명심(銘心)을 하시고 ‘이 뭣고?’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우리가 헐 일은, 정말 목숨을 바치고 정성을 바쳐서 헐 일은 이보다 더 헌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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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담선사 법문 745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