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사람은 결과(結果)를 기다리는 것】
도(道)라고 허니까 굉장히 어렵고 복잡하고, 경전(經典)에는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을 닦아야 성불(成佛)을 헌다’고 그런 말씀까지 쓰여 있고, ‘극락세계(極樂世界)를 갈라며는 삼십... 십만팔천국토(十萬八千國土)를 가야 극락세계가 있다’고 또 그러한 표현도 있으나,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서는 도(道)는 절대로 먼 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아미타불(阿彌陀佛)도 십만팔천국토? 한 걸음도 옮기지 아니하고 우리는 극락세계도 갈 수 있고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도 갈 수 있다고 그렇게 믿어야 되는 것이여. 왜 그러냐 하며는 천당(天堂)도 내 마음 속에 있고 극락(極樂)도 내 마음 속에 있고 아미타불(阿彌陀佛)도 내 마음 속에 들어있어. 그러니 극락세계나 천당에 가고 싶으면 내 마음 속에서 찾어. 미륵(彌勒)부처님과 아미타불을 친견(親見)허고 싶으면 내 마음속에서 찾어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어떻게 찾는가? 그것이 바로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 아닌가! 아까 조실스님의 녹음법문에 「이 뭣고?」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처음에는 그렇게 허지만 차츰차츰 다구쳐 들어가서 「‘이 뭣고’ 하는 이놈이 무엇인고?」 그보다 더 다구쳐 들어가면 「이 뭣고? 헐 때 ‘이’ 허는 이놈이 무엇고?」 그러헌 뜻으로 「이 뭣고?」 나중에는 ‘이?’ 소리만 해도 벌써 의단(疑團)이 확 드러난다 그 말이여. 그밖에는 더 이상 빠른 공부가 없어. 도 닦는 방법이 여러 가지 방편(方便)이 있고 여러 가지 법(法)이 있지마는, 그 팔만사천(八萬四千) 방편법(方便法)을 한 덩어리로 뭉쳐서 탁 해놓은 것이 바로 ‘이 뭣고?’거든.
부처님 열반(涅槃)하신 뒤 삼천 년(3000년)이 지냈지만 역대조사(歷代祖師)가 등등상속(燈燈相續)으로 그 법등(法燈)을 전해오면서 계발(啓發)허고 또 계발하고 해서 우리 말세중생(末世衆生)에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이 뭣고?’ 거든. ‘이?’ 헐 때 바로 거기에서 극락세계와 천당, 미륵불과 아미타불도 거기를 떠나서 찾어서는 아니 되는 거여. 거기를 떠나서 경전 속에서 찾는다든지, 조사어록(祖師語錄)에서 찾는다든지, 인도까지, 네팔(Nepal), 인도(印度), 동남아시아(東南亞)를 샅샅이 뒤지고 다녀봐라 그 말이여. 어디에 아미타불이 계시며 어디에 도솔천내원궁이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경속에 글 속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마음속을 향해서 깨달음을 찾는 거여. 어리석은 사람은 모든 인연(因緣)을 닦아서 결과(結果)를 기다리는 것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본래공(本來空)한, 일념무생(一念無生), 한 생각 남이 없는 도리(道理)를 바로 봐버리면 대장부일대사(大丈夫一大事)를 요달(了達)한 것이다 그 말이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다 읽어도 그 속에서 아무리 찾어도 점점 깨달음에서는 멀어가, 멀어져버리는 거야. 지혜 있는 사람은 일용생활(日用生活),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앉았을 때나, 섰을 때나, 걸어갈 때나, 일을 헐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밥 먹을 때 바루를 펴고 밥을 떠먹고 국을 떠먹고 반찬을 집어먹고, 또 공양을 다하고 또 바릿대를 씻을 때, 닦을 때, 또 공양이 끝나고 차를 마실 때, 변소에 갈 때, 도량 청소를 할 때,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그, 그 하나하나의 동작, 그때 그 찰나찰나(刹那刹那)를 여의고 딴 디에서 깨달음을 구헌 사람은 삼아승지겁을 닦아도 깨달음을 얻기가 어려워.
대중선방(大衆禪房)에서 부득이(不得已)해서 사분정진(四分精進), 죽비(竹篦)를 치고 입선(入禪)하고 죽비를 치고 방선(放禪)을 허지만, 그건 대중이 여럿이 모여서 살다보니까 생활에 법 규율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허는 것뿐이지 그 시간만 공부허고 나머지 시간은 그럭저럭 지낸 그런 것이 아니거든. 사실은 입선시간 보다도 방선 허고나서, 자리에서 일어날 때 그 의단이 놓치, 의단(疑團)을 놓치지 않도록, 마루에 나와서 신을 신을 바로 그 찰나(刹那)에도 그 의단(疑團)을 놓치지 않도록, 신을 신고 한 걸음 한걸음 걸어서 변소로 갈 때, 또 변소에 가서 용변을 헐 때, 손을 씻을 때, 일체처 일체시가 하나하나에 어찌 그 화두(話頭)에 대한 의단(疑團)을 잠깐인들 놓칠 것이냐 그 말이여.
귀로 한 소리를 듣고, 그 새소리가 되았건, 어린아이가 우는 소리가 되았건, 자동차 소리가 되았건, 비행기소리가 되았건, 옆에서 무슨 말 소리가 들리건, 무슨 소리든지 그 소리가 귀에 접하자마자 바로 그 자리에서, 거기에 즉(即)해서, 그 소리를 듣고 ‘아 시끄러 공부를 못허겠다’고 진심(瞋心)을 낼 그럴 겨를이 어디가 있느냐 그 말이여. 그 소리가 귀에 닿자말자 동시(同時)에 ‘이 뭣고?’ 이렇게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눈으로 무슨 사람을 만나거나, 누가 아는 사람을 보거나, 대중에 누구를 보거나, 모른 사람을 보거나, 누가 잘못한 것을 보거나, 잘한 것을 보거나, 눈에 무슨 색상(色相)이 들어올 그 찰나(刹那)에, 바로 거기에서 이러쿵저러쿵 무슨 생각을 거기서 시비심(是非心)을 일으키고 거기에 분별심(分別心)을 일으킬 것인가 그 말이여. 어디에 그런 분별심 시비를 일으킬 겨를이 어디가 있어. 눈에 무엇이 딱 들어온 그 찰나에, 그 동시에 ‘이 뭣고?’ 이렇게 되아야 할 것이다 그 말이여.
그렇게 단속을 해간다면 도업(道業)을 성취 못할 사람이 없어. 그래서 고인(古人)은, 이 몽산(蒙山)스님은 “이렇게 여법(如法)허게 공부를 해가지고 만약 견성통종(見性通宗)을 못허면 산승(山僧)이 너를 대신해서 지옥(地獄)에 가겠다. 너를 대신해서 내가 지옥에 가겠다. 이러헌 비장한 맹서(盟誓)를 허셨습니다.
- 송담선사 법문 418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