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위승(出家爲僧)이 기세사호(豈細事乎)아】
【출가해서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조그만한 일일까보냐?】
염추수불별무타(拈搥豎拂別無他)여
즉(직)요당인자도가(直要當人自到家)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발분주공번일척(發憤做功飜一擲)하면
현언묘구안중사(玄言妙句眼中沙)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염추수불(拈搥豎拂)이 별무타(別無他)여.
주장자(拄杖子)를 들어 보이고 불자(拂子)를 세우는 것이 다른 일이 없어.
직요당인자도가(直要當人自到家)라.
바로 당인(當人)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 집에 도달하게 하는, 하기 위해서이다.
발분주공번일척(發憤做功飜一擲)하면
분심(憤心)을 발(發)해서 정진을 해가지고 한바탕 뒤치면
현언묘구(玄言妙句)가 안중사眼中沙)여.
현묘한 말과 글귀가 눈 가운데 모래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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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끔 참선허다가 일기지사(一期之事)로 어떤 경계가 나타났다고 해서 그것이 구경(究竟)의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착각(錯覺)해가지고, 버뜻허며는(걸핏하면) 법담(法談)헌다고 소리지르고, 주먹을 내밀고, 주장자(拄杖子)를 휘두르고, 목침(木枕)을 내던져서 상대방의 머리를 깨고, 그러헌 일이 더러 있습니다마는, 아무리 자기가 입으로 법담을 해가지고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헌다 허더라도 구경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분상(分上)에는, 고인(古人)이 말씀허시기를 ‘그것은 변소(便所)에다가 단청(丹靑)을 헌 거와 같다’했어. 변소에다가 법당(法堂)처럼 울긋불긋허니 단청을 해봤자 그 안에는 더러운 것이 가뜩 차서 구더리(구더기)가 드글드글 끓는데, 변소 그 집에 건물에다가 아무리 금단청(金丹靑)을 헌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말이여. 구경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쪼끔 무슨 경계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갖다가 만족을 하고, 그래가지고 서로 자기가 도인(道人)인 것처럼, 자기가 큰 법, 법안(法眼)을 얻은 것처럼 주먹질을 하고 몽둥이질을 해봤자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말이여.
오늘 계를 받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 모인 모든 선지식(善知識) 도반(道伴)들은 겉으로 꾸며서 잘난 척 헐 것이 없고, 그저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목석(木石)처럼 그저 입 다물고 여법(如法)허게 정진(精進)을 해서 속으로 타성일편이 되고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서 순수무잡(純粹無雜)해가지고 확철대오(廓徹大悟)허도록. 확철대오 헌 다음에는 반드시 지혜의 눈을 갖친... 갖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낱낱이 점검(點檢)을 받고 인가(印可)를 맡아서 그런 연후(然後)에 다시 그때사 토굴(土窟)에 들어가는 거야. 토굴에 들어가서 정말 정진다운 정진을 해서 오후보림(悟後保任)을 해가지고 다생(多生)에 업기(業氣)를 다 소멸(消滅)을 하고, 그런 연후에 밑 없는 배를 타고 인연 따라서 모든 중생(衆生)을 제도(濟度)하라고 고조사(古祖師)들은 간곡히 다 말씀을 허셨습니다. 우리도 그러헌 고조사에 간곡한 당부 말씀에 의지해서 정말 실다웁게 닦어. 실다웁, 실참실오(實參實悟), 실다웁게 정진을 헌 사람이라야 참다운 깨달음을 얻는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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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위승(出家爲僧)이 기세사호(豈細事乎)아.
출가해서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조그만한 일일까보냐!
비구안일(非求安逸)하며 비구온포(非求溫飽)여.
편안하기를 바래서 출가한 것도 아니요, 배부리고 등 뜨신 것을 구해서 출가한 것도 아니여.
비구명리(非求名利)여.
명예(名譽)와 이끗(이익)을 구하기 위해서 출가한 것도 아니다 그 말이여.
[위생사야(爲生死也)며 위단번뇌야(爲斷煩惱也)며 위속불혜명야(爲續佛慧命也)며 위출삼계도중생야(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그러면 무엇을 위해서 출가를 했느냐하며는, 생사(生死)문제를 위해서 출가한 것이다 그 말이거든. 번뇌(煩惱)를 끊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요,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고, 삼계에 모든 중생을 제도(濟度)허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다 그 말이거든. 출가한 목적이 오직 스스로 삼계화택(三界火宅)에서 해탈(解脫)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하는 그 목적 외에는 없어.
[불운(佛云), 무상지화(無常之火)가 소제세간(燒諸世間)이라하시고, 우운(又云), 중생고화(衆生苦火)가 사면구분(四面俱焚)이라하시며, 우운(又云), 제번뇌적(諸煩惱賊)이 상사살인(常伺殺人)이라하시니, 도인(道人)은 의자경오(宜自警悟)하야 여구두연(如救頭燃)이어다.]
무상(無常)의 불이 온 세상을 태우고, 그 불이 결국은 자기를 향해서 훨훨 타들어오고 있다 그 말이여. 그리고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번뇌의 도적(盜賊)이 항상 쳐들어오기 위해서 엿보고 있다 그 말이여. 팔만사천의 마군(魔軍)이는 무엇 때문에 수행자를 침범(侵犯)허기 위해서 엿보고 있느냐 하며는, 수행을 잘해서 도업(道業)을 성취허면, 견성성불을 허게되면 마왕(魔王)에 궁전(宮殿)이 흔들려서 무너지게 되아. 행여나 자기네 궁전이 흔들려서 파괴가 되까, 혹 마군이의 권속(眷屬)들이 도인(道人)과 부처님에 의해서 멸망(滅亡)이 될까봐 어쨌든지 도를 닦지 못도록(못하도록) 방해를 치는 거여. 틈, 그런데 계행(戒行)을 잘 지키면서 여법(如法)허게 수행허고 있으면 마군이가 침범을 못해. 계(戒)를 파(破)하거나 청규(淸規)를 어기거나 삿된 생각과 삿된 행동을 허며는 그 틈을 타서 마군이가 침범을 허는 것이다 그 말이거든. 그래서 도(道) 닦는 사람은 항상 경계(警戒)하고 항상 정신(精神)을 차려야 할 것이다.
[탐세부명貪世浮名 왕공노형枉功勞形 영구세리營求世利 업화가신業火加薪]
세상에 명예, 명예라고 허는 뜬 이름. ‘아무개가 훌륭허다. 아무개가 선지식이다.’ 그런 뜬소문이란 것은, 자기한테는 아무 소용도 없고 귀찬허기만 허는 것이여. 도에 방해만 되는 것이여. 세속에 이끗도 재산을 많이 모이고 이끗을 많이 구해봤자 훨훨 타는 업(業) 불에다가 휘발유를 찌튼(뿌린) 거와 같애. 출가해서 도 닦는 사람은 명예를 구헐 것도 없고 이끗을 구헐 것도 없다 그 말이여.
왜 그러냐? 부처님께서 백세까지 사실 수가 있는데, 팔십 세(80세)에 열반(涅槃)에 드셔가지고 이십 년(20년) 동안 부처님께서 수용(受用)할 복(福)을 우리 말세(末世) 제자(弟子)들에게 유산(遺産)으로 물려주셨어. 말세 제자들이 혹 박복(薄福)해서 도 닦는데 먹고 입고 의식주(衣食住)에 행여나 부족함이 있어서 도를 잘 못 닦을까 해서 부처님께서 받으실 이십 년(20년)간의 복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셨다 그 말이여. 그래서 머리를 깎고 법복(法服)을 수(垂)하고 열심히 도(道)만 닦으면, 먹고 입고 살 의식주 문제가 전혀 걱정이 없다 그 말이여. 먹고 입고 살 것이 걱정이 없는데 뭣허러 돈을 모일랴고 그러고 명예를 구하고 권리를 잡을랴고 헐 것이냐 그 말이여.
[오호(於戱)라, 불자(佛子)여. 일의일식(一衣一食)이 막비농부지혈(莫非農夫之血)이요 직녀지고(織女之苦)어늘, 도안(道眼)이 미명(未明)하면 여하소득(如何消得)이리오.]
부처님 말씀에, ‘아! 불자(佛子)는, 옷 한 벌과 한 그릇 밥이 농부에 피요 베 짜는 직녀에 고통에 결과로, 결과’라고 했어. 피땀 흘려서 농부가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한 그릇의 밥을 먹을 수가 있고, 다 고통을 이겨내면서 짠 직녀들의 수고로 인해서 한 벌의 옷을 입을 수가 있고, 또 피땀 흘려서 번 신도(信徒)들의 시주(施主)로 인(因)해서 우리가 먹고 입고 이렇게 살 수가 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도를 열심히 닦아서 도(道)의 눈을 뜨지 못하면 어떻게 이 농부(農夫)와 직녀(織女)와 신도(信徒)들의 그 은혜(恩惠), 그 빚을 갚을 수가 있겠느냐?
[고(故)로 왈(曰), 요식피모대각저마(要識披毛戴角底麽)아. 즉금(即今)에 허수신시자시(虛受信施者是)어늘 유인有人은 미기이식(未飢而食)하며 미한이의(未寒而衣)하니 시성하심재(是誠何心哉)아.]
‘저 가죽 옷을 입고 뿔을 이고 댕이는(다니는) 저 소를 봐라. 그 소가 다름 아닌 헛되이 시주(施主) 것을 받아먹은, 도는 이루지 못하고 헛되이 시주 것을 받아먹은 바로 그 사람이 죽어서 저 소가 된 것이다’ 그랬어.
여러분들은 어데를 지나다가 소를 보시면 정말 유심히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소가 전생(前生)에 스님이 도(道)를 이루지 못하고 헛되이 시주 것을 먹은 그 업(業)으로 소가 되아가지고 몸으로 꿍꿍 일을 하고, 그리고 죽어서는 그 고기로써 또 보시를 하고, 가죽으로써 또 보시를 하고 빚을 갚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래서 어떤, 그래서 스님네들은 소를 보면 ‘발보리심(發菩提心) 해라.’ 그게 아주 옛날 옛날부터 내려오는 하나의 그 풍, 풍속이라고 허까, 으레히 소를 보면 ‘발보리심 해라.’ 그러고 지내가거든. 아, 그런데 그 소가 그 말을 알아 듣는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면서,
“너도!”
(대중 웃음)
‘너도, 스님도 조심허라 이거여. 나보고만 발보심 허지말... 허라고 허지 말고 스님도 정말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해서 내처럼 되지 말라’고 헌 것처럼 눈을 뚝 뜨고 요렇게 빠꼼히 쳐다보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어요.
이 자리에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많이 모이셨는데, 출가 ‧ 재가의 구별이 있는데, 출가(出家)에도 두 가지 출가가 있고 재가(在家)에도 두 가지 재가가 있어. 몸은 출가했으면서도 마음은 속가(俗家)에 가 있는 분, 또 몸도 마음도 다 출가한 분 이 두 가지가 있고. 제가에도 몸은 속가에 가 있으면서도 마음은 출가한, 그 행실(行實)과 언행(言行)과 마음가짐이 완전히 출가한 스님네와 같이 그렇게 세속에서 사는 분이 있어. 몸도 마음도 고대로 속가(俗家)에 아주 그냥 빠져있는 사람. 이렇게 해서 몸도 마음도 출가한 사람, 몸은 속가에 가 있지마는 마음은 정말 출가한 사람, 몸은 출가했으면서도 마음은 속가에 가 있는 사람, 몸도 마음도 속가에 가 있는 사람 이 네 가지가 있는데,
이 자리에 모이신 모든 스님들은 몸도 마음도 출가한 스님이고, 이 자리에 모이신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는 비록 몸은 속가에, 어쩔 수 없이 속가에 있지마는 그 마음은 출가한 스님네나 다름없이 출가한 분이라고 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헌 마음으로 우리 사부대중이 정법(正法)을 믿고 철저히 수행(修行)을 허신다면, 우리 사부대중은 좋은 가족이요 좋은 대중이요 좋은 도반이 되어줄 것입니다.
[도불사목전지락(都不思目前之樂)이 변시신후지고야(便是身後之苦也.)]
‘목전(目前)에, 눈앞에 즐거운 것이 이것이 신후(身後)에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우선 편허고 우선 좋은 것이, 우선 편하고 우선 좋은 것만을 쫓다가 이 몸 버린 뒤에 지옥고(地獄苦)가 기달코(기다리고) 있다 그 말이여. 우선은 괴롭지마는 가행정진(加行精進) 용맹정진(勇猛精進)해서 잠이 와도 그 잠을 이겨내고 정진을 하고, 애써서 정진을 해놓면 우선은 괴롭지마는 그것이 나중에 생사해탈(生死解脫)의 대안락(大安樂)을 얻는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금년(今年) 삼동(三冬)은 유독 추우리라고 허는 기상대(氣象臺)에 발표를 들었습니다마는, 여러 도반(道伴)들은 각자 있는 그 도량(道場)에서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선지식(善知識)을 모시고 사는 그런 마음으로 경건하고 엄숙하게, 여법하게 알뜰히 정진(精進)을 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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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본망언난지주(道本忘言難指注)허고
갱무형색가사량(更無形色可思量)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암전취죽화운립(巖前翠竹和雲立)한디
대상황화대로향(臺上黃花帶露香)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도본망언난지주(道本忘言難指注)여.
도(道)라고 허는 것은 본래 말이 없어. 말로써 표현을 헐 수 없는 것이고, 없어서 뭐라고 도에 대해서 설명을 헐 수가 없... 어려운 것이다.
갱무형색가사량(更無形色可思量)이여.
도라고 허는 것은 형색(形色)이 없어. 어떠헌 형상과 빛깔이 있는 것이 아니여. 그래서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말이여.
암전취죽화운립(巖前翠竹和雲立)헌데
바위 앞에 푸른 대는 구름과 함께 서있는데,
대상황화대로향(臺上黃花帶露香)이로구나.
대 우에(위에) 노란 꽃은, -요새 국화 꽃이 한창인데- 노란 꽃이 이슬을 띄고 향기를 풍기고 있구나.
- 송담선사 법문 48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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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八
出家爲僧이 豈細事乎아 非求安逸也며 非求溫飽也며 非求利名也라
爲生死也며 爲斷煩惱也며 爲續佛慧命也며 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 몸의 안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고,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니라。
五九
佛云, 無常之火가 燒諸世間이라 하시고 又云, 衆生苦火가 四面俱焚이라 하시며
又云, 諸煩惱賊이 常伺殺人이라 하시니 道人은 宜自警悟하야 如救頭燃이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덧없는 불꽃이 온 세상을 살라 버린다」하시고, 또 「중생들의 고뇌의 불이 사면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하시며, 또 「모든 번뇌의 적이 항상 너희들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다」하시니, 수도인은 마땅히 스스로 깨우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할지어다。
六O
貪世浮名은 枉功勞形이요 營求世利는 業火加薪이니라
세상의 뜬 이름을 탐하는 것은 쓸데없이 몸만 괴롭게 하는 것이요, 세상 잇속을 쫓아 허대는 것은 업의 불에 섶을 더하는 것이니라。
六一
名利衲子는 不如草衣野人이니라
이름과 재물을 따르는 납자는 초의를 걸친 야인만도 못하니라。
六三
於戱라 佛子여 一衣一食이 莫非農夫之血이요 織女之苦어늘 道眼이 未明하면 如何消得이리요
아 ! 불자여。그대의 한 벌 옷과 한 그릇 밥이 농부와 직녀의 피와 땀 아닌 것이 없거늘, 도의 눈이 밝지 못하다면 어떻게 소화하리요 !
六四
故로 曰, 要識披毛戴角底麼아 卽今에 虛受信施者是어늘 有人은 未飢而食하며 未寒而衣하니 是誠何心哉아 都不思目前之樂이 便是身後之苦也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말씀하시되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을 알고자 하느냐? 그것은 지금 신도들이 베푸는 것을 헛되이 받은 자가 이것이어늘,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 진실로 무슨 마음일까? 눈앞의 쾌락이 바로 후생의 괴로움인 줄을 도무지 생각지 않는구나! 」하시니라。
- <선가귀감禪家龜鑑> 서산대사西山大師.
용화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