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實相)의 눈】
【참다운 공양구, 참다운 향, 참다운 부처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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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구참선(活句參禪), 활구참선을 허는 사람은 첫째 바른 스승을 구해서 바른 스승의 지도(指導)를 받아서 참선(參禪)을 해야 할 것이며, 참선을 허되 사량분별(思量分別)로 화두(話頭)를 따져 들어가고, 의리(義理)로 따지고, 이론(理論)으로 따져서 그렇게 아는 그러헌 참선은 바른 참선법(參禪法)이 아니다. 그 화두를 들어가는데 있어서 콱 맥혀. 꽉 맥힌 의심(疑心). 앞도 끊어지고 뒷도 끊어지고 일체 사량분별을 쓰지 아니하고 꽉 맥힌 의심으로 화두(話頭)를 의심(疑心)하고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법문(法門)을 해주셨습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이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고 참선(參禪)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높아지고, 심지어 서양 사람들도 이 참선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모다 이것을 헐랴고 애를 쓰고 있는데, 이 참선이 참 꼭 인생으로 태어나서 꼭 해야 할 것은 이것 밖에는 없는 것이고, 특히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은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 참선법(參禪法)을 올바르게 믿고 올바르게 실천을 해서 참나를 깨달라야 하는데, 불법을 안 믿는 사람들도 이 참선을 헐랴고 애를 쓰고 서양 사람들까지라도 참선을 헐랴고 애를 쓰는데, 하물며 우리 불법을 믿는 법보제자(法寶弟子)는 정말 철저하게 이 법(法)을 믿고 실천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참선을 헐랴면 조용헌 디를(데를) 찾아가야하고 모든 것을 다,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사(世上事)를 다 멀리하고 오직 이것만을 위해서 해야겄다’ 그런 생각을 흔히 갖게 되는데, 사실 이 최상승법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그런 시비(是非)를 다 떠나고 시끄러운 것을 버리고 복잡한 것을 여의고 그리고서 찾는 공부가 아니여. 물론 초학자(初學者)는 그러헌 복잡한 것을 좀 멀리하고 선방(禪房)에 들어가서 방부(房付)를 들이고, 그리고서 이것 하나만을 위해서 전적(全的)으로 해야 할 필요는 있어요. 있지마는 모든 사람이 그러헌 여건(與件) 하(下)에서만 헐랴고 헌다면 종내(終乃) 참선은 못허고 할... 못허고 말 것이다 그 말이여. 진짜 이 활구참선은 시끄럽고 복잡한 일체시비(一切是非)를 떠나서 찾는 것이 아니여.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다 버리고서 깨달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시비(是非)에 즉(即)해서, 일체 시끄럽고 복잡한 디에 즉(即)해서, 번뇌망상(煩惱妄想)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 즉(即)해서 떠억 화두(話頭)를 관조(觀照)하는 것이여.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망상을 여의고 찾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깨달을 기약(期約)이 없어.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어디에서 나왔어. 바로 우리에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波濤)ㄴ데 그 파도를 여의고 물을 찾는 거와 같애. 파도를 여의고 물에 습성(濕性)을 찾는 거와 같다 그 말이여. 파도 여의고 물도 여의고 그리고 어떻게 습성을 찾을 것이냐 그 말이여. 습성을 찾을랴며는 물에서 찾어야 하고, 물을, 물에서는 항상 파도가 일기 마련이여. 근디 파도를 여의고 물을 어떻게 찾으며 물을 여의고 물속에 있는 그 습성을 어떻게 찾을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바로 일어나는 그 파도에서, 물 있는 곳에는 바로 파도가 있으니까 그 파도에 즉(即)해서 그 물을 찾아야 하고 물에 즉(即)해서 습성을 찾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이 번뇌망상 그놈 일어나는 곳이 바로 우리 자성(自性)으로부터 번뇌망상이 일어난 것이니까 그 번뇌망상(煩惱妄想)에 즉(即)해서 참나를 찾는데, 그 참나 찾는 법은 사량분별과 이론과 무슨 의리로 따져서 찾는 것이 아니여. 번뇌가 일어나면 바로 그 번뇌(煩惱)에 즉(即)해서 ‘이 뭣고?’ 망상(妄想)이 일어나면 그 망상을 버릴랴고 허지 말고 바로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이 뭣고?’ 썽이 날 때도 썽나는 놈을 버리고서 찾지 말고 썽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 뭣고?’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야 한다 그거거든.
우리는 무량겁(無量劫), 이 우주(宇宙)도 생겨나기 이전(以前)에 부터서 우리는 생겨난 때가 없어. 생겨난 때가 없이 우리는, 우리의 자성(自性)은 있어왔습니다. 그놈이 무명(無明)의 한 파도가 읾으로 해서 무량겁을 둘고... 두고서 육도(六道)를 윤회(輪廻)허면서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온 것입니다. 그 무명(無明)으로부터 번뇌망상(煩惱妄想)이 일어나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거듭해서 오늘에까지 왔지만, 번뇌망상 그놈을 여의고는 우리의 자성을 찾을 길이 없어. ‘번뇌망상 때문에 공부를 헐 수가 없다.’ ‘성질이 고약해서 헐 수가 없다.’ ‘나이가 먹어서 헐 수가 없다.’ ‘머리가 나뻐서 헐 수가 없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서 정말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서 몸 바쳐서 목숨 바쳐서 헐랴고 허는 신심(信心)을 내지를 않고 자꾸 핑계를 대면서 자꾸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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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다 같이 두 눈동자가 있어서 모든 것을 보고, 붉은 것은 보고 ‘붉다’고 그러고, 노란 것은 보고 ‘노랗다’고 그러고, 까만 것은 보고 다 ‘까맣다’고 그러지만, 그 사람의 경계(境界)에 따라서, 능력(能力)에 따라서 견처(見處)가 다 다르기 마련이여. 범부중생(凡夫衆生)은 모든 것을 봐. 세간(世間)에 모든 것을 보되 전부가 무상(無常)한 것인데 그것이 영원(永遠)히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錯覺)을 하고 산다 그 말이여. 명예(名譽)도 그것이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권리(權利)도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재산(財産)도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모든 사랑하는 사람도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자기의 몸띵이도 영원성이 없는 것인데, 그것이 영원성이 있는 것처럼, 상주(常住)허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執著)을 하고 그놈을 붙잡고 늘어지고 그놈을 안 놓칠라고 애를 써. 그놈에 종이 되고 그놈에 관리인(管理人)이 되아가지고 그놈 관리허느라고 바뻐서, 행여나 그놈 놓칠까봐서 도 닦을 생각을 안 내. 도 닦을 생, 생각을 내지를 못혀. 그러니 범부중생이 가지고 있는 눈은 사람에 눈이 아니라 소나 염생이의 눈과 조끔도 다를 것이 없어. 소나 염생이나 돼지나 개는 먹을 것 밲에는 안보이거든. ‘개 눈에는 똥 밲에는 안 보인다’고 그런 속담도 있지만, 짐승은 밤낮 두리번거리고 돌아댕인 것이 ‘행여나 뭐 먹을 것 있는가’ 그것만 찾고 댕기고, 명태대고리라도 하나 앵겼다 하며는 만 가지를 다 불구허고 그 놈 먹으러 쫓아가. 우리 범부의 눈은 짐승의 눈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느냐 그 말이여.
성문은, 성문(聲聞)은 ‘일체(一切)가 다 무상(無常)한 것’으로만 보거든. 다 하나도 영원성이 없는 무상한 것으로 보고, 그래서 ‘일체(一切)가 다 공(空)이다’ 이렇게 보거든. 철저(徹底)하게 공(空)으로 봐. 그래서 공에 치우치는 그런 벽안(僻眼), 치우칠 벽(僻)자, 치우친 눈을 가지고 있어. 무상(無常)한 속에 영원(永遠)한 것이 있건마는, 영원한 것으로는 보지를 못하고 정말 무상하고 또 철저하게 모든 것이 공한 것으로만 딱 치우치게 보기 때문에 그것은 ‘벽안’이다 그말이거든.
보살은, 대승보살(大乘菩薩)은 무상 속에 영원한 상주를, 상주(常住)에 진리(眞理)를 보고, 일체가 영원하되 영원한 속에 또 무상하게, 무상함을 또 봐. 그래서 ‘무상하게 보되 무상에 빠지지 않고 영원한 도리를 보고,’ ‘영원한 도리를 보았으되 영원한 가운데에 또 무상한 것이 또 본다’ 그 말이여. 그래서 무상(無常)에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상주(常住)에도 떨어지지 아니해. 그래서 보살(菩薩)의 눈은 실(實)다운 상(相)이다. ‘실상(實相)의 눈’이다.
그러니 똑같은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본 바가 그렇게도 차이가 있다 그 말이여. 우리는 분명 확철대오를 못했으니 범부, 범부일시 분명하지만, 이러헌 법문을 통해서 확실히 무상한 줄도 알아야 하고, 무상한 속에도 영원성이 있다고 허는, 영원한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고, 무상하기 때문에, 무상한 줄 알기 때문에 집착(執著)허지 말 것이며, 무상한 속에도 영원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충실(忠實)하면서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이 뭣고?’ ‘이 뭣고?’를 해서 번뇌망상심 일어나는 그놈을 가지고 그놈을, 그놈 일어나는 뿌리를 돌이켜 찾음으로 해서 실상(實相)의 눈을 뜨는 것이 우리 정법학자(正法學者)에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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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심비불비시물(非心非佛非是物)헌디
만로피대긱산신(謾勞皮袋喫酸辛)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현전경색청여세(現前境色淸如洗)ㄴ대
일일위군세지진(一一爲君細指陳)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비심비불비시물(非心非佛非是物)이여. 그런데
만로피대긱산신(謾勞皮袋喫酸辛)이로구나.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이 물건도 아니여.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닌데, 공연히 이 가죽 푸대를 들볶고 피로허게 해서 그 쓰고 쓰라린 것만을 먹는구나, 겪고 있구나.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출세(出世)허신 뒤로, 또 출세허시기 이전에도 인도(印度)에서는 바라문(婆羅門)들이 그 생사해탈(生死解脫)을 헌답시고 그 참 말로써 형언(形言)할 수 없는 그 고행(苦行)을 해오고 있었습니다. 가시덤불 위에 굴르기도 하고, 훨훨 타는 불속에 몸을 건너가기도 하고, 단식(斷食)을 하기도 하고, 잠을 안자기도 하고, 사람으로서 헐 수 있는 온갖 이 몸띵이를 괴롭히는, 들볶는 그런 고행을 험으로써 생사를 해탈헌다 해가지고 그랬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처음에 출가하셔서 육 년(6년)간을 좁쌀... 그 곡식 몇 알을 가지고 그놈으로써 잡수면서 그 고행을 해서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허도록 그렇게 고행을 허셨어. 그러나 육년이 지내신 뒤에는 ‘육체만을 이렇게 괴롭힌 것으로써 생사해탈을 헐 수가 없는 것이다.’ 헌 것을 알으시고, 고행을 버리시고서 참다운 수행을 시작을 허신 것입니다.
현전경색청여세(現前境色淸如洗).
앞에 나타나는 경색(境色), 경계(境界),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경계,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 청황적백(靑黃赤白), 춘하추동(春夏秋冬) 계절 따라서 나타나는 모든 경계,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喜怒哀樂) 온갖 번뇌망상(煩惱妄想), 이러헌 것들이 고대(로) 청정법신(淸淨法身)의 나타남이여 그것이. 우리의 범부 눈으로는 도저히 그렇게 인식(認識) 헐 수가 없고 믿어지기 어렵지만, 이것을 우리는 꼭 믿어야 하는 것이여.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다 청정비로자나법신불(淸淨毘盧遮那法身佛)의 나타남이요,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망상, 팔만사천(八萬四千) 번뇌망상(煩惱妄想)도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나타나는 현상(現狀)이라고 허는 것을 우리는 철저하게 믿어야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일위군세지진(一一爲君細指陳)이여.
그 팔만사천 번뇌망상과 팔만사천 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낱낱이 그대를 위해서 자상(仔詳)하게 생사 없는 진여실상(眞如實相)을 표현헌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놈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손에 만지키거나, 발부리에 차이거나, 우리의 생각에 일어나는 온갖 번뇌망상 희로애락 모든 것들이 일어날 때에, 나타날 때에, 바로 그놈에 즉(即)해서 화두(話頭)를 들어야 해. 나를 괴롭히는 어떠헌, 정신적(精神的)으로 나를 괴롭히거나 육체적(肉體的)으로 괴롭히거나 물질적(物質的)으로 괴롭히거나 괴롭히는 어떠헌 증상(症狀)이나, 나를 칭찬하고 나를 기쁘게 허는 어떠헌 현상(現狀)이나, 그놈에, 그 경계에 속지 말고 바로 그 경계(境界)에 즉(即)해서 떠억 화두(話頭)를 즉각(即刻) 챙기라 이거거든. 그렇게 해가다보며는 바로 거기에 법신불(法身佛)을 친견(親見)하게 되고, 그 번뇌망상(煩惱妄想) 바로 그것이 법신불의 설법(說法)이라고 하는 것을 타악 깨닫게 될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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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제일 해(害)로운 것이 경계(境界)에 끄달리고 경계에 속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으믄 기쁜 디에 속고 슬픈 일을 만나면 슬픈 디에 속고, 순경계(順境界) 역경계(逆境界)에 끄달리는데, 역경계 가운데에는 진심(瞋心), 썽 내는 거. 그 내 뜻에 조끔 어긋나며는 썽을 내거든. 이 사바세계(娑婆世界)는 내 뜻에 맞는 좋은 일 보단 내 뜻에 안 맞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것이 이 사바세계의 특징인데, 그 내 뜻에 안 맞는,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과거에 모든 성현(聖賢)들은 그 내 뜻에 안 맞는 것이 만(滿)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태어나서, 태어나기를 원(願)을 세웠습니다. 그래야 발심(發心)허기가 좋고 도(道) 닦기가 좋고 용맹심(勇猛心)을 일으키기가 좋아서 빨리 그리고 더 크게 큰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 천당(天堂) 낙(樂) 받고 즐겁고 좋은 데가 있지만 천당에 태어나기를 별로 바래지를 않고 이 사바세계를 택한 것입니다.
지옥(地獄)에는 너무 고통이 심해서 도저히 정신을 채릴 수가 없어서 안 되고, 축생(畜生)으로 태어나며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법문(法門)도 못 알아듣고 그러니 축생으로 태어나면 참으로 안되고,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나야 첫째 말귀를 알아 들어서 법문을 들을 수가 있고, 그리고 이 사바세계에는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고 모든 것이 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 있어서 그러헌 것들이 모두 발심(發心)헐 수 있는 좋은 계기(契機)가 되고 도 닦기에 가장 알맞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가 그렇게 좋은 곳이다 그 말이여.
우리는 다행히 숙세(宿世)에 좋은 인연(因緣)을 심어가지고 이 사바세계에 태어났고, 사바세계에 지금 현재 오십 억(50억) 인구라고 헌디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불법(佛法)을 만났다 말이여. 불법을 만났으면서도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을 만나게 되았다. 불법을 만나도 이 최상법... 승법 만나기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저 팔만사천(八萬四千) 방편법(方便法)에 떨어져가지고 ‘뭣 허면 좋다’ ‘뭣 허면 좋다’ 해가지고 그런 디에 빠져가지고 조매(좀처럼) 헤어나지를 못하고, 끝끝내 이 최상승법은 만나지 못하고 간 불교신자(佛敎信者)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행히 우리는 그 어려운 고비 고비를 다 극복해가지고 이 최상승법까지 믿게 되았고 그것을 또 실천(實踐)헐 수 있게까지 되았으니 얼마나 다행하고 경행(慶幸)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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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사바세계에는 내 마음에 안 맞는 일이 많기 때문에 항상 속이 편틀 못하고 썽 내는 일이 많아.
면상무진공양구(面上無瞋供養具)요
구리무진토묘향(口裏無瞋吐妙香)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심내무진시진보(心內無瞋是珍寶)하니
무구무렴즉진상(無垢無染即眞常)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면상무진(面上無瞋)이 공양구(供養具)요.
얼굴에 썽냄이 없은... 없는 것이 이 공양(供養)하는 것이요,
부처님께 마지(摩旨)도 올리고, 떡도 올리고, 꽃도 올리고, 온갖 것을 다 이 공양을 올리는데, 그래가지고 그 공덕(功德)을 쌓고 그 공덕으로 소원(所願)을 성취허기 위해서 그 공양을 올리는데, 불공(佛供)을 드리는데, ‘얼굴에 썽 내는 것이 없는 거, 항상 얼굴이 방정(方正)하고 화평(和平)하고 환허니 밝에 얼굴을 가져. 그것이 시방법계(十方法界)에 계시는 삼세제불(三世諸佛)께 올리는 공양(供養)이더라’ 그거거든. 밤낮 신경질을 내고 썽을 내고 허면서 부처님 앞에 정성스럽게 공양을 올리고 그것만이 진... 불공 딜인 것인 줄 대부분 다 그렇게 생각허는데, 물론 절에 정성스럽게 모두 그 꽃도 올리고 쌀도 올리고 모다 떡도 올리고 그런 참 정성스런 그 공양을 올린 것도 그것도 참 좋지요. 좋지만 그러헌 때는 일 년에 몇 번이 되냐 그 말이여. 진짜 일 년 열두 달 항상 이 법계에 가득 차계신 삼세제불께 공양을 올릴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그 말이여. 그 공양이 다름이 아니고 얼굴에 진심(瞋心)을 내지 아니하고 항상 화평(和平)한 얼굴을 가진 것이 그것이 참다운 공양(供養)이더라 그거거든.
구리무진(口裏無瞋)이 묘토향(妙吐香)이다.
다 부처님께 향(香)을 올리기 위해서 중국산(中國産) 향(香), 일제(日製) 고급향(高級香)을 일부러 사람을 시켜서 사오고 외국(外國)에 나가서 사다가 그 비싼 향을 갖다가 부처님 앞에 올리는데, 참 그것도 좋은 일이지. 그 향그럽고 좋은 향을 올리니 그것 참 좋은 일이지만, 입 속에 썽낸 말, 썽냄이 없는 것이 이것이 참으로 묘(妙)한 향(香)을 토(吐)해내는 것이더라.
조끔 비우(비위)에 거슬리며는 온갖 입에 못 담을 욕을 퍼붓거든. 그 독기(毒氣)가 서린 오, 사람 오장육부(五臟六腑)를 찍어서 긁어 잡아댕이는 소리. 그 갈기갈기 송곳으로 찌르고 고치가루, 고춧가루 뿌리는 그런 독한 소리, 한 번 들으면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지 잊지 못할 그 잊을 수가 없는 그러헌 참 그런 소리를, 까딱하면 그런 소리를, 꺼떡허면 그런 말을 토해낸다 그 말이여. 남편한테, 아내한테, 며느리한테, 또 시어머니한테는 안 듣는 데서도 허고, 또 그 사랑하는 자식한테도 그 못된 그 어머니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그러헌 욕이, 부회(부아)가 나며는 나온다 그 말이여. 내 입이 더러워질까봐서 흉내도 내기도 싫은 그러헌 말을 허는데, 그, 그러헌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이거거든.
그래서 항상 입을 벌렸다 하면, 입을 벌리고 말을 했다면 그 말이 우아(優雅)하고 고상(高尙)한 말. 남이 들으며는 그 듣기 좋고 그 말로 인해서 그 사람을 존경헐 수가 있고, 참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밉다가도 그 말을 들어보면 이쁜 생각이 나도록, 아 그렇게 말을 허면 얼마나 좋겄냐 그 말이여. 그 ‘말’이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표현(表現)’이기 때문에, 그 말을 이쁘게, 아름답게, 우아하게, 고상하게 허면, 그 사람의 마음씨가 좋고 아름답다고 허는 것이 바로 그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말을 허는 데에는 뭐 돈이 그렇게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큰 힘이든 것도 아니고. 그 같은 말이며는 좋게 허면 상대방이 썽이 났다가도 그 말 한마디에 스르르르 풀어져버리고 ‘아 내가 잘못했다’고 아 이렇게 헐텐데, 상대방이 뭔 말 기분 담는 말 한마디 하면 나는 거기다 덤을 올려가지고 더 고약한 소리를 탁 해버리면, 쪼끔만 부회 낼라다가 그도 크게 썽을 내가지고 아주 본격적으로 눈에다 독기를 가지고 싸울라고 달라든 거다 그 말이여.
그래서 좀 기분 나쁠 때도 기왕 말을 좋게 해버릇하고, 그런데 그것이 자기의 감정(感情)을 조종(操縱) 헐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게 안 됩니다. 평상시(平常時)에 항상 이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하면서 화두(話頭)를 들어 버릇 헌 사람은 뭔 고약헌 말이 나올라다가도 금방 탁 돌릴 수가 있거든. ‘이 뭣고?’로 항상 돌이키는 연습을 해놨기 때문에 여간 속상하는 일을 당해도 불쑥 뭔 말이 함부로 나가지를 않고 ‘이 뭣고?’가 먼저 나오거든. ‘이 뭣고?’가 나오는데 언제 그 욕이 나올 겨를이 있냐 그 말이여. ‘이 뭣고?’가 떠억 나와버리는데. 그래서 얼굴에 신경질, 썽 내지 않는 것도 ‘이 뭣고?’를 헌 사람은 제절로 그것이 되는 거고, 말도 고약한 말이 잘 안 나오게 헐라면 평상시에 ‘이 뭣고?’를 허면 되는 거다.
심내무진(心內無瞋)이 시진보(是珍寶)여.
마음속에 썽 내는 마음 없는 것이, 이것이 항상 보배, 그것이 바로 보배다 그 말이여.
‘부처님께 시주(施主)를 좀 허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한다.’ ‘부처님께 좀 공양(供養)을 좀 올리고 불공(佛供)을 좀 딜이고 싶어도 참 형편이 넉넉지를 못해서 못헌다.’ 그런 말씀들을 허시는 분을... 들이... 허는데 전혀 그건 걱정 허시지 마셔. 얼굴에 진심 내지 아니하고, 말에 썽내는 말 함부로 배앝지 않고, 마음속에 항상 진심(瞋心)을 내지 아니허면, 노상 불공(佛供)을 허고 있고, 노상 부처님께 향(香)을 피고 있고, 노상 부처님께 큰 시주(施主)를 허고 있는 거여. 왜 그러냐. 부처님은 쌀이나 떡을 안가, 안올려도 부처님 ‘배고프다’고 허신 말은 나 들어보지를 못했습니다. 또 부처님이 향 잔뜩 갖다가 그냥 법당이 연기가 꽉 차도록 피, 피지 안 해도 ‘아이구 향이 없어서 내가 코가 심심허다’고 (대중 웃음) 그런 말 허신 걸 내가 들어보질 못했어. 꿈에서도 내가 들어보지 못했고, 부처님께 뭐 백만 원 천만 원 시주금 안올려도 스님네가 불사(佛事)하는 데에는 혹 돈이 없으면 못헐랑가 몰라도 부처님은 조끔도 뭐 돈 많이 안 가져온다고 해서 그 사람 미워허시지 않습니다.
부처님을 기쁘게 허실라면 얼굴에 썽내지 말고 입에, 말에 썽내지 말고 마음속에 항상 진심을 내지 않고 항상 환희심(歡喜心)을 가지고 염불(念佛)하고 ‘이 뭣고?’ 열심히 하면 돈 한 푼 안 가져와도 부처님은 그 사람한테 복(福)을 주신다 그 말이여. 그러니 그 돈 없어서 시주(施主) 못헌다고 조끔도 걱정 허시지 마셔. 진심(瞋心)만 안내면 그 사람은 언제나 시주(施主)를 허고 계시는 거여. 무가, 무가진보(無價珍寶)를 항상 지니고 살고, 노상 비로자나법신불(毘盧遮那法身佛)에 아주 창고 채 아주 그냥 탈탈 떨어서 공양(供養)을 올리고 시주를 허되 털어내기가 무섭게 도로 가득 차.
무구무렴(無垢無染)이 즉진상(即眞常)이다.
그래서 마음에 때가 없고 마음에 물들림이 없는 것이, 이것이 바로 진, 진여불성(眞如佛性)이요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진리(眞理)와 항상 계합(契合)한 것이더라.
사바세계에 살라면 워낙 내 뜻에 안 맞는 일만 조석(朝夕)으로 만나게 되고, 원허는 대로 잘 안되니까 노상 속이 바글바글바글 썩기 마련이지마는, 최상승법을 믿는 사람은 속이 팍 상해가지고 주먹팅이 같은 놈이 일어서며는 우선 숨을 깊이 들어마셔. 들어마셨다 잠깐 참었다가 후~ 허고 내뿜어. 또 한번 써억 들어마셨다가 후~ 허고 내 뿜으면서... 내 뿜고, 이렇게 한 두 번을 떠억 허고서 스르르르 허니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이 뭣고?’ ‘이 뭣고?’ 허면, 허면서 자연히 숨을 길게 내쉬면서 ‘이 뭣고?’ 길게 나 내쉬면 또 스르르르 허니 들어마셔. 들어마실 때는 아랫배가 약간 볼록, 배꼽 밑에 단전(丹田)이 볼록 해지도록 들어마시다가, -너무 가뜩, 처음에 두 번은 배로 허지 말고 가슴으로, 가슴이 미어지도록 들어마셨다가 후~ 허고 내 뿜어. 그건 준비호흡이니까 그렇게 허지만, 그 다음에는 가슴은 가만 놔두고 배꼽 밑에 단전, 아랫배가 약 팔부쯤, 팔부쯤 볼록허도록 스르르르 들어마셨다가- 약 삼초 동안 정지했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허시라 그 말이여. 아 그러면 썽내는, 썽내... 이렇게 올라갔던 놈이 언제 내려간중 모르게 스르르, 다 숨 내쉬는데 빠져나갔는지 어디 녹아가지고 그냥 ‘이 뭣고?’가 되아부렀는지 그냥 스르르르 없어져부리는 거여.
누가 미운 생각이 날 때도 그렇게 하고, 괴씸한 생각이 날 때도 그렇게 하고, 억울하고 분헐 때도 그렇게 허란 말이여. 이렇게 허지 않고 그냥 무조건(無條件)허고 꾹꾹 참는 게 절대로 나쁜 거여. 꾹꾹 참으면 그놈이 쌯이고 쌯이고 해가지고는 나중에는 해소병(해수병, 咳嗽病)이 생기기도 하고, 기관지병(氣管支病)이 생기기도 하고, 또 그냥 눈이 침침해지기도 하고, 나중에는 심장병(心臟病)이 생기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나중에는 그냥 무릎이 아픈 관절염(關節炎)이 생기기도 하고, 나중에는 그냥 암(癌)이 생기기도 하고 헌다 그 말이여. 절대로 참으면 안 돼. 보통 많이 ‘참으라’, ‘인욕을 해라’, ‘인욕을 하라’ 허지만, 덮어놓고 꾹꾹 참었다 해 놓면 그놈이 나중에 그런 무서운 병(病)으로 돌아지니까 절대로 그렇게 함부로 참을 것이 아니여.
참는 것으로써 능사(能事)를 참지 말고(삼지 말고) 심호흡(深呼吸),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허거든. 들어마셨다 후~, 아 물론 속이 상할 때는 후~ 후~ 단전호흡이 좋은 중도 모르고 후후~ 해쌓지요? 그렇게 해야 살게 되거든. 그렇게라도 해야 살게 되니까 그렇게 헌데, 그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배와서 허는 게 아니라 자동적으로 그렇게 헌걸 보라 그 말이여. 아 그렇게 해보면 훤하이 풀리거든. 한 두 번 허고 말아부리니까 안되고, 세 번 네 번 다섯 번 계속해서 단전호흡을 허면서 ‘이 뭣고?’까지 곁들여서 허면 굉장히 효과적(效果的)이여. 그래가지고 병도 안 생겨. 해소병도 안생기고, 기관지병도 안생기고, 암병도 안생기고, 눈이 침침허지도 않고, 또 무릎 아프는 관절염도 안생기고, 병도 안생기면서 생사해탈(生死解脫)까지 허는 확철대오(廓徹大悟)까지 허게 되니 이 얼마나 이 법(法)이 좋은 법이냐 그거거든.
사람이 헐 일은 이것 밖에는 없어요. 아까 모든 것은 영원성이 없는 것인데, 영원성이 없는 가운데에 영원한 길을 찾는 법이, 무상(無常)한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는 법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이거든. 정말 한 숨, 호흡 한 번 헐 때마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한걸음씩 가고 있는 것이고, 일초 일초가 지내갈 때마다 사형언도(死刑言渡)를, 사형언도, 사형 집행일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호흡을 허되 단전호흡을 하고, 생각을 허되 ‘이 뭣고?’를 생각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이렇게, 일초 일초를 이렇게 다구쳐 나가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렇게 돌이켜서 나간다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오탁악세(五濁惡世)라고 허지마는 이 세계가 바로 상주불멸(常住不滅)한 법신불(法身佛)이 계시는 적광토(寂光土)로 변허는 것입니다.
부디 다시 한 번 오늘 이 시간을 기(期)해서 발심(發心)을 돈독(敦篤)히 하시고, 일어나는 생각은 바로 찰나간(刹那間)에 ‘이 뭣고?’로 돌리고, 이 세상에 모든 역경(逆境)은 바로 그 역경에 즉(即)해서 해탈도(解脫道)로 나아가는 법문(法門)으로 돌리고 선불장(選佛場)으로 돌려나가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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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일심춘불견춘(盡日尋春不見春)하고
망혜편답농두운(芒鞋遍踏隴頭雲)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귀래소무매화취(歸來笑撫梅花臭)하니
춘재지두이십분(春在枝頭已十分)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진일심춘불견춘(盡日尋春不見春), 망혜답편농두운(芒鞋踏遍隴頭雲)이여.
종일토록 봄을 찾기 위해서 미투리(짚신)가 다 닳아지도록 강산(江山)을 해매다가, 해맸지마는 종내(終乃) 봄을 발견(發見)허지를 못하고,
귀래소무매화(歸來笑撫梅花)... 매화지(취, 臭)하니, 춘재이(지)두이십분(春在枝頭已十分)이여.
집에 돌아와서 매화가지가, 매화가 하도 곱게 피어서 그 매화를, 가지를 어루만지면서 냄새를 맡어보니, 봄이 바로 이 집 뜨락에 있는 매화가지에 벌써 봄이 와 있었구나.
게송(偈頌)은 아마 소동파(蘇東坡)라고 허는, 중국(中國)에 당송팔대문장(唐宋八大文章)의 한사람이요, 거사(居士)로서 견성(見性)을 해서 [전등록(傳燈錄)]에까지 올린 천하문장(天下文章) 소동파(蘇東坡)의 시(詩)라고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거사님들도 다 도(道)를 닦아서 참선을 해가지고 확철대오를 해서 다 [전등록]에 올랐거든, 우리 거사님네들, 우리 보살님네들이라고 해서 못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사부대중도 협존자와 같은, 그렇다고 해서 또 전부 옆구리를 땅에 안대고 오늘 저녁부터 잠을 안주무신다면 그것도 참 큰일인데, 최소한도로 대여섯 시간씩은 주무시고, 그 대신 일쯕 주무셔. 아홉시? 아홉시는 좀 이르고 열시나 늦어도 열한시 이전에는 주무시고, 그 대신 아침에 새벽에 일찍 일어나시도록. 열한시 열두시 한시 되도록 늦게까지 안주무시고 그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시기는 어렵고, 늦게 주무셔 놓니까는 아침에 느지막허니 일어나니 몸도 무겁고 밥맛도 없고, 그러니 그러지 말고 일쯕 주무시고 일쯕 일어나면 그것도 건강에 참 좋고 공부허기도 좋고 그러니까 그렇게 허셔서, 협존자의 그 뜻은 우리가 배울지언정 옆구리 땅에 대지 않는 고것만 배우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정말 생사(生死)가 두렵고 일대사(一大事)를 허기 위해서는 이 가운데에 정말 이 협존자(脅尊者)와 같은 그런 분이 몇 분쯤 나오신다 해도 그것도 또한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 송담선사 법문 40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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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 내용]
* ‘참선을 헐랴면 조용헌 데를 찾아가야하고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사(世上事)를 다 멀리하고 오직 이것만을 위해서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흔히 갖게 되는데, 사실 이 최상승법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그런 시비(是非)를 다 떠나고 시끄러운 것을 버리고 복잡한 것을 여의고 그리고서 찾는 공부가 아니여.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다 버리고서 깨달음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시비(是非)에 즉(即)해서, 일체 시끄럽고 복잡한 데에 즉(即)해서, 번뇌망상(煩惱妄想) 일어나는 바로 거기에 즉(即)해서 떠억 화두(話頭)를 관조(觀照)하는 것이여.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것이다 그 말이여.
* 망상을 여의고 찾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깨달을 기약(期約)이 없어.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어디에서 나왔어. 바로 우리의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부터 일어나는 파도(波濤)인데 그 파도를 여의고 물을 찾는 거와 같애. 파도를 여의고 물의 습성(濕性)을 찾는 거와 같다 그 말이여. 파도 여의고 물도 여의고 그리고 어떻게 습성을 찾을 것이냐 그 말이여. 습성을 찾을랴며는 물에서 찾아야 하고, 물에서는 항상 파도가 일기 마련이여. 근디 파도를 여의고 물을 어떻게 찾으며 물을 여의고 물속에 있는 그 습성을 어떻게 찾을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물 있는 곳에는 바로 파도가 있으니까 그 파도에 즉(即)해서 그 물을 찾아야 하고 물에 즉(即)해서 습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 그와 같이 번뇌망상 그놈 일어나는 곳이 바로 우리 자성(自性)으로부터 번뇌망상이 일어난 것이니까 그 번뇌망상(煩惱妄想)에 즉(即)해서 참나를 찾는데, 그 참나 찾는 법은 사량분별과 이론과 무슨 의리로 따져서 찾는 것이 아니여. 번뇌가 일어나면 바로 그 번뇌(煩惱)에 즉(即)해서 ‘이 뭣고?’ 망상(妄想)이 일어나면 그 망상을 버릴랴고 하지 말고 바로 일어나는 그 자리에서 ‘이 뭣고?’ 썽이 날 때도 썽나는 놈을 버리고서 찾지 말고 썽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것을 발판으로 해서 ‘이 뭣고?’ 이렇게 공부를 지어가야 한다 그거거든.
* ‘인생으로서 태어나서 할 것은 이것밖에는 없다’고 하는 생각이 철저하다면, 머리에 불붙었을 때 머리에 불 끄는 일 잦혀놓고 그밖에 무슨 더 먼저 할 일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천하(天下) 없는 일이 있어도 머리에 불 먼저 끄고 그 다음에 다른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이 말씀하시기를, ‘여구두연(如救頭然)이라. 여구두연, 머리에 불을 끄듯이 하라.’ 아무리 자식이 걱정이 되어도 머리에 불 끄는 것 보다는 더 급할 수가 없고, 천하 없는 일도 머리에 불 끄는 일보다 더 급한 일이 없어. 우리가 화두(話頭)를 들고 공부하는 것도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어떠한 황급한 가운데 있더라도 우선 화두 먼저 들고 봐야해. ‘이 뭣고?’
*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두 눈동자가 있어서 붉은 것은 보고 ‘붉다’고 그러고, 노란 것은 보고 ‘노랗다’고 그러고, 까만 것은 보고 다 ‘까맣다’고 그러지만, 그 사람의 경계(境界)에 따라서, 능력(能力)에 따라서 견처(見處)가 다 다르기 마련이여.
* 범부중생(凡夫衆生)은 세간(世間)에 모든 것을 보되 전부가 무상(無常)한 것인데 그것이 영원(永遠)히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착각(錯覺)을 하고 산다 그 말이여. 명예(名譽)도 그것이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권리(權利)도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재산(財産)도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모든 사랑하는 사람도 영원성이 없는 것이고, 자기의 몸띵이도 영원성이 없는 것인데, 그것이 영원성이 있는 것처럼, 상주(常住)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 집착(執著)을 하고 그놈을 붙잡고 늘어지고 그놈을 안 놓칠라고 애를 써. 그놈에 종이 되고 그놈에 관리인(管理人)이 되어가지고 그놈 관리하느라고 바뻐서, 행여나 그놈 놓칠까봐서 도 닦을 생각을 안 내. 도 닦을 생각을 내지를 못혀. 그러니 범부중생이 가지고 있는 눈은 사람에 눈이 아니라 소나 염생이의 눈과 조끔도 다를 것이 없어.
* 성문(聲聞)은 ‘일체(一切)가 다 무상(無常)한 것’으로만 보거든. 다 하나도 영원성이 없는 무상한 것으로 보고, 그래서 ‘일체(一切)가 다 공(空)이다’ 이렇게 보거든. 철저(徹底)하게 공(空)으로 봐. 그래서 공에 치우치는 그런 벽안(僻眼), 치우칠 벽(僻)자, 치우친 눈을 가지고 있어. 무상(無常)한 속에 영원(永遠)한 것이 있건마는, 영원한 것으로는 보지를 못하고 정말 무상하고 또 철저하게 모든 것이 공한 것으로만 딱 치우치게 보기 때문에 그것은 ‘벽안’이다 그 말이거든.
* 보살은, 대승보살(大乘菩薩)은 무상 속에 영원한 상주(常住)의 진리(眞理)를 보고, 일체가 영원하되 영원한 속에 또 무상함을 또 봐. 그래서 ‘무상하게 보되 무상에 빠지지 않고 영원한 도리를 보고,’ ‘영원한 도리를 보았으되 영원한 가운데에 또 무상한 것을 또 본다’ 그 말이여. 그래서 무상(無常)에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상주(常住)에도 떨어지지 아니해. 그래서 보살(菩薩)의 눈은 실(實)다운 상(相)이다. ‘실상(實相)의 눈’이다.
* 그러니 똑같은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 본 바가 그렇게도 차이가 있다 그 말이여. 우리는 분명 확철대오를 못했으니 범부일시 분명하지만, 이러한 법문을 통해서 확실히 무상한 줄도 알아야 하고, 무상한 속에도 영원한 진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믿고, 무상한 줄 알기 때문에 집착(執著)하지 말 것이며, 무상한 속에도 영원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충실(忠實)하면서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이 뭣고?’ ‘이 뭣고?’를 해서 번뇌망상심 일어나는 그놈을 가지고 그놈 일어나는 뿌리를 돌이켜 찾음으로 해서 실상(實相)의 눈을 뜨는 것이 우리 정법학자(正法學者)에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 비심비불비시물(非心非佛非是物), 만로피대긱산신(謾勞皮袋喫酸辛).
현전경색청여세(現前境色淸如洗), 일일위군세지진(一一爲君細指陳).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닌데, 공연히 이 가죽 푸대를 들볶고 피로하게 해서 그 쓰고 쓰라린 것만을 겪고 있구나. 앞에 나타나는 경색(境色),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경계(境界),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喜怒哀樂) 온갖 번뇌망상(煩惱妄想) 이러한 것들이 고대로 청정법신(淸淨法身)의 나타남이여 그것이.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다 청정비로자나법신불(淸淨毘盧遮那法身佛)의 나타남이요,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망상, 팔만사천(八萬四千) 번뇌망상(煩惱妄想)도 진여불성(眞如佛性)에서 나타나는 현상(現狀)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철저하게 믿어야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팔만사천 번뇌망상과 팔만사천 이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낱낱이 그대를 위해서 자상(仔詳)하게 생사 없는 진여실상(眞如實相)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놈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손에 만지키거나, 발부리에 차이거나, 우리의 생각에 일어나는 온갖 번뇌망상 희로애락 모든 것들이 일어날 때에, 나타날 때에, 바로 그놈에 즉(即)해서 화두(話頭)를 들어야 해. 나를 괴롭히는 어떠헌 증상(症狀)이나, 나를 칭찬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어떠한 현상(現狀)이나, 그 경계에 속지 말고 바로 그 경계(境界)에 즉(即)해서 떠억 화두(話頭)를 즉각(即刻) 챙기라 이거거든. 그렇게 해가다보며는 바로 거기에 법신불(法身佛)을 친견(親見)하게 되고, 그 번뇌망상(煩惱妄想) 바로 그것이 법신불의 설법(說法)이라고 하는 것을 타악 깨닫게 될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이여.
* 지옥(地獄)에는 너무 고통이 심해서 도저히 정신을 채릴 수가 없어서 안 되고, 축생(畜生)으로 태어나며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법문(法門)도 못 알아듣고 그러니 축생으로 태어나면 참으로 안되고, 그러니 사람으로 태어나야 첫째 말귀를 알아 들어서 법문을 들을 수가 있고, 그리고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고 모든 것이 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다 있어서, 그러헌 것들이 모두 발심(發心)헐 수 있는 좋은 계기(契機)가 되고 도(道) 닦기에 가장 알맞기 때문에 이 사바세계가 그렇게 좋은 곳이다 그 말이여.
* 면상무진공양구(面上無瞋供養具), 구리무진토묘향(口裏無瞋吐妙香).
심내무진시진보(心內無瞋是珍寶), 무구무렴즉진상(無垢無染即眞常).
부처님을 기쁘게 하실라면 얼굴에 썽내지 말고, 말에 썽내지 말고, 마음속에 항상 진심(瞋心)을 내지 않고 항상 환희심(歡喜心)을 가지고 염불(念佛)하고 ‘이 뭣고?’ 열심히 하면 돈 한 푼 안 가져와도 부처님은 그 사람한테 복(福)을 주신다 그 말이여. 그러니 돈 없어서 시주(施主) 못한다고 조끔도 걱정 하시지 마셔. 진심(瞋心)만 안내면 그 사람은 언제나 시주(施主)를 하고 계시는 거여. 무가진보(無價珍寶)를 항상 지니고 살고, 노상 비로자나법신불(毘盧遮那法身佛)에 아주 창고 채 아주 그냥 탈탈 떨어서 공양(供養)을 올리고 시주를 하되 털어내기가 무섭게 도로 가득 차. 그래서 마음에 때가 없고 마음에 물들림이 없는 이것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요 상주불멸(常住不滅)의 진리(眞理)와 항상 계합(契合)한 것이더라.
* 사람이 할 일은 이것 밖에는 없어요. 모든 것은 영원성이 없는 것인데, 영원성이 없는 가운데에 영원한 길을 찾는 법이, 무상(無常)한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는 법이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이고 최상승법(最上乘法)이거든. 정말 한 숨, 호흡 한 번 할 때마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한걸음씩 가고 있는 것이고, 일초 일초가 지내갈 때마다 사형언도(死刑言渡)를, 사형 집행일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흡을 하되 단전호흡을 하고, 생각을 하되 ‘이 뭣고?’를 생각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일초 일초를 이렇게 다구쳐 나가고 한 생각 한 생각을 이렇게 돌이켜서 나간다면,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오탁악세(五濁惡世)라고 하지마는 이 세계가 바로 상주불멸(常住不滅)한 법신불(法身佛)이 계시는 적광토(寂光土)로 변하는 것입니다.
* 진일심춘불견춘(盡日尋春不見春), 망혜편답농두운(芒鞋遍踏隴頭雲).
귀래소무매화취(歸來笑撫梅花臭), 춘재지두이십분(春在枝頭已十分).
종일토록 봄을 찾기 위해서 미투리(짚신)가 다 닳아지도록 강산(江山)을 해맸지마는 종내(終乃) 봄을 발견(發見)하지를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 매화가 하도 곱게 피어서 그 매화 가지를 어루만지면서 냄새를 맡아보니, 바로 이 집 뜨락에 있는 매화가지에 벌써 봄이 와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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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안實相眼
大凡小乘以有物即能見。離物即不見。
무릇 소승은 물物이 있음으로써 곧 능히 볼수 있다. 그러나 물物을 여의고서는 곧 보지 못한다.
若是大乘。他開實相眼。凡見色即見自心。故能頭
頭見道。物物全真。此小大之辨也。
만약 대승이라면 그와는 달리 실상實相의 눈을 열어, 무릇 색을 보되 곧 자심(自心자신의 마음)을 본다. 그런 까닭에 능히 두두頭頭에서 도道를 볼 수 있으니 물물物物이 온전히 참되다. 이것이 소승과 대승을 분별함이다.
- 楞嚴經正見-清-濟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