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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권經卷】

이 뭣고? 2021. 2. 1. 13:06

【손가락을 잊어버리면

 

백천경권(百千經卷)이 여표지(如標指)하야

인지당관재천월(因指當觀在天月)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월락지망무일사(月落指忘無一事)면 

기래긱반곤래면(飢來喫飯困來眠)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백천경권여표지(百千經卷如標指)요,

백천(百千)의 경전이, 부처님의 경(經), 경권(經卷)이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 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애서,

 

 

인지당관재천월(因指當觀在天月)이다.

그 달을 가리키는 그 손가락을 의지해서 마땅히 저 하늘에 있는 달을 볼 것이다. 

 

 

월락지망무일사(月落指忘無一事)여.

달이 지고 손가락을 잊어버려. 달을 가리키고 있는 그 손가락을 잊어버리면 한 일도 없어. 

 

 

기래긱반곤래면(飢來喫飯困來眠)이다.

배고픔이 오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한 숨 잔다. 

 

백천경권(百千經卷), 경(經)이라 하면 보통 <화엄경(華嚴經)>이나 <법화경(法華經)> <금강경(金剛經)> 모다 무슨 그러헌 종이에다가 인쇄한 그러헌 경을 생각을 허겠지만, 경(經)은, 참 경은 그런 종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경을 펴 봐도 한 글자도 쓰여 있지 않는 것인데, 그런 참다운 경 말고도 이 세상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거, 귀로 들을 수 있는 거,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거, 일체(一切)가 다 부처님의 경전(經典)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나 해나 별이나 구름이나, 저 높은 산 바위나 나무나 길가에 널어져 있는 조끄마한 돌멩이, 한포기에 풀, 한포기에 꽃에 이르기까지 경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경(經)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더라. 그 하늘에 떠 있는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 ‘저기에 달이 있다’고 가리키는 그 손가락과 같은 것이다 그거거든. 그 손가락이 달을,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지 아니하면 그 달 있는 곳을 볼 수가 없으니까 부득이 그 손가락이 필요허다 그 말이여. 그 손가락이 바로 뭣, 뭣이냐 하며는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그거거든. 

 

달을 봐버리면 그때는 손가락을 계속 쳐다보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여. 그 손가락을 보자마자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그 하늘에 떠있는 그 달을 척! 봐버리면 달을 가리켜주는 손가락을 계속해서 그걸 쳐다보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그걸, 손가락을 잊어버려야 한다. 달을 보는데 그 달도 저, 져버리고 손가락도 잊어버리고 그러면, 가리키고 있을, 있는 손가락도 보이지 아니하고 또 하늘에 떠있는 달도 저버렸으니 볼 것도 가리킬 것도 없으니 무슨 일이 있느냐 그 말이여. 한 일도 없어. 그러니 배가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한숨 자고, 그것 밖에는 무슨 일이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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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가(敎家)에서는 ‘경(經)을 읽는다’허며는 종이로 글씨 이루어진 경을,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나 <법화경>, <화엄경> 이런 경을 열심히 정성껏 읽는 것을 다 ‘경을 읽는다’ 그러지만, 이 최상승법(最上乘法), 활구참선법(活句參禪法)에 있어서는 그런 책으로 된 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공안(公案), ‘이 무엇고?’ 알 수 없는 그 본참공안(本參公案)을 올바르게 참구(參究)해 나가는 것이 바로, 이 경을 바로 읽는 것이다 그 말씀이여. 

 

경(經), 종이로 된 경, 글자로 된 경, 그러헌 경은 법신불(法身佛)이 설하신 최상승경(最上乘經)에 겨우 백천만 분에 일도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가득 찬 삼라만상(森羅萬象)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다 경전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가, 저 자동차 소리나, 공장에 기계 돌아가는 소리나, 새 우는 소리나, 바람 부는 소리, 물 흘러가는 소리, 심지어는 모다 이 장(場)에서 주고받고 허는 일체 잡담(雜談)에 이르기까지도 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경 읽는 소리’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두를 놓쳐버리고 번뇌망상(煩惱妄想)으로 보면 일체가 경이 아니라 다 지옥(地獄)으로 우리를 끌어들여가는 지옥에 그 쇠사슬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화두(話頭)를 들고 들으면, 그것을 듣고 화두(話頭)를 들던지, 화두를 드는 가운데 모든 소리를 듣거나 모든 경계를 보거나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우리에게 와 닿는, 육근(六根) 육식(六識)을 통해서 와 닿는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깨달음에 나아가게 하는 훌륭한 경전(經典)으로 변(變)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전도, 정말 종이로 된 <화엄경(華嚴經)>이나 <법화경(法華經)>이나 <금강경(金剛經)> 이런 경전도 우리가 믿고 소중히 여기면 그 한 장에 경전, 한, 그 중에 한 글자라도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고 그 한마디로 우리는 생사(生死)를 해탈(解脫)헐 수도 있고 진리(眞理)의 눈을 뜰 수도 있으, 있습니다마는, 신심(信心)이 없이, 믿는 마음이 없이 보면 그러헌 경전은 휴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불법을 믿지 않는 무슨 다른 종교를 믿는 외도(外道)들이 불경이나 부처님경전을 보고 소중히 여기기 커녕은, 전부 그걸 마군(魔軍)이의, 사탄(Satan)에 소리다 해가지고 비방(誹謗)을 하고 불에 모다 싸지를라고 헐 것이다 그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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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참선을 해나갈랴면 화두, ‘이 무엇고?’ 화두는 우리가 항상 참선을 허면서 마음으로 참구(參究)해나가는 한 과제(課題)인 것입니다.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 이놈이 무엇이냐?’ 이 몸띵이는 손과 발이 있고 눈 ‧ 코 ‧ 입 ‧ 귀가 있고 이런 머리와 발이 다 있고 이렇게 사지백체(四肢百體)를 갖추어서 있고, 몸띵이 속에는, 피부 속에는 살이 있고, 살 속에는 창자와 오장육부(五臟六腑)가 다 들어있고 피와 오줌과 똥과 고름이 들어있는데, 이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뭉쳐진 이 물질, 아주 정밀한 기계로 이루어진 이 몸띵이, 이 몸띵이 속에 이 몸띵이를 운전(運轉)하는, 걸어가게도 하고, 오게도 하고, 일하게도 하고, 밥도 먹게 하고, 차를 타고 운전도 하고, 좋은 일도 하게하고 나쁜 일도 하게하고 허는 우리 이 몸띵이에 주인공(主人公)이 있는 것입니다. 그 주인공이 있어서 명령(命令)을 하고 주인공이 있어서 주관(主管)을 하고 운전(運轉)을 허기 때문에 이 몸띵이는 그러헌 행주좌와(行住坐臥) 일체 그 시청언동(視聽言動) 그러헌 운동을 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사람들은 이 몸띵이가 자기 전부(全部)ㄴ줄 알고 그렇게 이 몸띵이를 잘 맥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이쁘게 뀌미고, 그 일생동안을 이 몸띵이를 자기, 그렇게 소중허게 알고 잘 가꾸는데, 이 몸띵이를 운전(運轉)하는 진짜 자기(自己)는 있는 줄도 모르고 그것을 잘 가꿀 줄도 모르고 그냥 방치, 방치(放置)하고 푸대접한 채 일평생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중생(衆生)들의 생활인 것입니다. 성현(聖賢)은 이 몸띵이 속에 있는 참나를 그놈을 잘 깨달라서 그놈을 잘 가꾸어가지고 세세생생(世世生生)에 참다운 행복을 누리고, 중생은 이 몸띵이가 자기인줄 알고 이 껍데기만을 자꾸 맥이고 입히고 단속을 허고, 그래가지고 그 속에 있는 주인(主人)은 방치(放置)헌 채 많은 죄업(罪業)만 짓다가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허고 만다 그 말이여.

 

오늘 이 화두, 화두는 우리가 항상 앉으나 서나 참구해야할 과제,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이놈이 무엇인고?’ 항상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놈이 무엇인고?’ 이 말을 줄여서 ‘이 무엇고?’ ‘이 무엇고?’ ‘이 무엇고?’ 그 말은 경상도 사투린데,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이에요. ‘이 ‧ 것 ‧ 이 ‧ 무 ‧ 엇 ‧ 인 ‧ 고?’ 그 말을 경상도 사투리로는 ‘이 뭣고?’ 이 글자 석자로 줄여진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영한 이놈이 무엇인고-?’ 그렇게 헐랴면 말이 너무 길고, 기니까 간단허게 ‘이 뭣고?’ 그렇게만 허시라 이거거든.

 

‘이 뭣고?’가 이 뭣고, 이 뭣고 허니까 ‘이머꼬’, ‘이머꼬’ 해가지고 ‘이뭣고?’가 대관절 무슨 뜻인지 그것을 전혀 아지를 못하고 좋다고 허니까 이뭣고, 이뭣고. ‘그럼 이뭣고 라는 게 무슨 말이냐?’ 물어보면 아는 사람도 있지마는, 그것이 전혀 무엇인중도 모르고 ‘이뭣고’허면 좋다니까 ‘이뭣고, 이뭣고’ 이렇게 허신 분도 상당히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뭣고?’는 ‘이 무엇고?,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이예요.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영한 이놈이 무엇인고?’ 눈으로 볼라고 해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잡을랴고 해도 잡을 수도 없고, 생각으로 아무리 알랴고 해도 알 수 없는데, 분명히 이 소소영영한 놈이 있거든. 그래서 부르면 대답헐 줄도 알고, 욕하면 썽낼 줄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할 줄도 알고, 정든 사람과 생이별(生離別) 사이별(死離別) 허면 슬퍼헐 줄도 알고, 아 그러헌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놈이 분명히 이 몸띵이 속에 있다 그 말이여. 그놈이 한 생각 옳게 먹으면 천사(天使)와 같이 되기도 하고, 한 생각 삐뚤어지게 먹으면 찰나간에 악마(惡魔)로도 변헌다 그 말이여. 그러헌 소소영영한 놈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것을 찾어. ‘이 무엇고?’ 그렇게 찾는 거다 그 말이여. 

 

알 수 없지. 찾아가, 찾을 수록에 알 수가 없어. 앉아서도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밥 먹으면서도 ‘이 뭣고?’ 똥 누면서도 ‘이 뭣고?’ 걸어가면서도 ‘이 뭣고?’ 차를 타고 가면서도 ‘이 뭣고?’ 누가 나한테 억울한 소리를 해서 확 속이 확 상헐 때에도 ‘이 뭣고?’ 기분이 나쁠 때에도 ‘이 뭣고?’ 기분이 좋을 때에도 ‘이 뭣고?’ 슬플 때도 ‘이 뭣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일을 헐 때나 앉았을 때나 차를 탈 때나 ‘이 뭣고?’ 귀로 무슨 소리를 들을 때에도 듣, 들리자마자 그 들리는 그 소리로 따라가지 말고 그 소리를 듣는 놈, 대관절 이놈이 무엇이냐? ‘이 뭣고?’ 눈으로 산을 보아도 ‘이 뭣고?’ 사람을 봐도 ‘이 뭣고?’ 마치 칠십 묵은 할머니가 잃어버린 아들 생각허듯이, 어디 젊은 청년만 봐도 그 청년을 보자마자 잃어버린 아들 생각 허듯이, 저 하늘에 뜬 구름을 봐도 아들생각, 해가 넘어가도 아들생각, 꽃이 피어도 아들생각, 맛있는 음식을 봐도 아들생각, 그러듯이 ‘이 뭣고?’ 항상 ‘이 뭣고?’가 끊어지지 않도록. 놓쳤다하면 또 챙기고 놓쳤다하면 또 챙기고. 

 

생각 일어났다 생각이 꺼졌다, 우리는 일평생동안을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일어났다 꺼지고, 이것이 염기염멸(念起念滅)이여. 생각 염(念)자 일어날 기(起)자 염기(念起), 생각 염(念)자 멸할 멸(滅)자 염멸(念滅). ‘염기염멸(念起念滅)을 위지생사(謂之生死)다’ 그랬습니다. 생각 일어난 것은 생(生)이고 생각이 꺼지는 것은 사(死)다 그 말이여. 죽은거다 그 말이여. 이 몸띵이가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태어난 것을 생이라 그러고, 이 몸띵이가 병들어서 숨이 끊어져 죽으면 그것을 죽음이라 보통 다 그렇게 생각허지만, 엄격히 말허면 생, 몸띵이가 기준이 아니라 우리 생각 일어나는 것이 생(生)이고, 태어난 것이고, 그 생각 꺼지는 것이 죽음이다 그 말이여. 한 생각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이 벌써 한 생각 한, 한번 태어났다가 한번 죽는 것인데, 더 미세하게 따지면 한 생각 속에도 구백(900) 생멸(生滅)이 들어있어요. 마치 저 전등(電燈)불이 우리 눈에는 계속해서 켜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수, 일초동안에 수천 번 꺼졌다 켜졌다 꺼졌다 켜졌다 허, 허는 것이 워낙 빨리 계속이 되기 때문에 우리 육안(肉眼)으로 볼 때 계속해서 켜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이여. 그러나 사실은 계속해서 켜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꺼졌다 켜졌다 꺼졌다 켜졌다 이런 거란 말이여. 

 

우리가 지끔 태어나서 일평생 계속해서 한 평생을 쭈욱 계속해서 살고 있는 줄 생각허지만, 일초 동안에도 구백 번을 살았다 죽었다 살았다 죽었다 허면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여. 육체(肉體)를 자기의, 자기(自己)라고 착각(錯覺)을 허기 때문에 한평생을 한 몸띵이로 계속 살고 있는 걸로 착각을 허게 된 것입니다. 생사는 육체를 기준으로 해서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기준으로 해서 봐야 참으로 그 생사가 무서운 줄을 알고 생사의 참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한 생각 바른 생각을 하고 한 생각 착하게 먹으면 순식간에 그 사람은 이미 천상(天上)에 지금 탄생을 헌 것이고, 한 생각 독한 생각을 먹으면, 살생을 헌다든지 도둑질 헌다든지 사음을 헐 생각을 내면, 이 몸띵이 있는 고대로 찰나간에 지옥(地獄)에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지금 계를 받았습니다마는, 그 계 받는 것이 몸띵이로 실지로 산목숨을 죽이고, 또는 이 몸띵이, 손이 가서 남의 물견을 훔친다든지, 이 몸띵이로 사음을 헌다든지, 입으로 거짓말하고, 또는 입으로 술을 마시고 허는 그런 것도 물론 우리 범부(凡夫)의 입장에서, 초학자(初學者)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그 몸띵이로 지키는 계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정법(正法)을 믿고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지해서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헌 사람에게는 몸띵이로 계를 잘 지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으로 지키는 계도 잘 지켜야 한다 그 말이여. 마음으로 사람을 죽일 생각을 내면, 실지로 몸으로 죽이지는 안했어도 이미 마음으로 지키는 대승계(大乘戒)는 범(犯)한 것이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어떻게 허면 몸으로 지키는 계도 잘 지키고 마음으로 지키는 대승계, 최상승계도 잘 지킬 수가 있느냐 허면, ‘이 뭣고?’ ‘이 뭣고?’ 한마디를 처억 거각(擧却)험으로써 살생할 마음이 없어져버리고, 살생할 마음이 계속해서 화두(話頭)를 잘 들고 나가면 살생할 마음이 애당초에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러니 이 화두를 열심히 참구(參究)해나가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저절로 화두가 현전(現前)허도록 이렇게 공부가 숙달이 되면 계행은 저절로 지켜진다 그 말이여. 오계(五戒), 오계와 십계(十戒), 비구(比丘) 이백오십계(二百五十戒), 또는 보살(菩薩) 십중대계(十重大戒)나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가 저절로 지켜지게 되아. 지킬랴고 마음을 일으키지 안 해도 저절로 지켜지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화두 이 한마디 ‘이 무엇고?’ 이 알 수 없는 이 과제, 이 화두 한 마디는, 우리로 하여금 계(戒) 파(破)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 계를 지킬랴고 허지 안 해도 제절로 계를 지키게 해주는 것이며, 계를 옳게 지킨다면 무슨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허게 될 것이냐 그 말이여. 그래서 생사해탈(生死解脫)이 바로 이 한마디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그 말이여. 

 

경 읽는 소리를 듣다가 화살에 맞어 죽고, 작대기에 꽂혀서 죽고, 짐승한테 물려서 죽어도 원한심(怨恨心)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바로 천상(天上)에 태어나서 마침내 성과(聖果)를 얻었거든, 하물며 우리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속에 항상 화두(話頭)를 들고 ‘이 뭣고?’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해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허도록 그렇게 잡두리를 해가면, 응당 진심(瞋心)을 낼만한 경계를 당해도 진심이 안 일어나고, 응당 사람을 죽여야 할 만한 환경을 당해도 사람을 죽이지 않게 되고, 사음이라든지 거짓말이라든지 또는 술을 머시... 마시는 일이라든지 항상 화두가 독로해나가면 그런 계율을 범할 일이 없고, 그런 어려운 지경(地境)에 봉착(逢着)을 허더라도 한마디 화두로써 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고, 그러다 내가 죽게 되더라도 바로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이나 극락세계(極樂世界)에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미물(微物)에 중생(衆生)도 그렇게 참 비참하게 죽어간대도 불구하고 천상에 태어나거든, 하물며 우리가 불자(佛子)로서 불명(佛名)을 받고, 오계(五戒)를 받고, 또 화두(話頭)를 타고 공부를 해나가는 이런 정법문중(正法門中)에 부처님의 제자가 화두를 들고 올바르게 공부해나간다면 무슨 두려워 헐 생사(生死)가 있겠느냐 그 말씀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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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즉노순지환(逆之則怒順之歡)하고 

천하인정몰양반(天下人情沒兩般)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긍신순궁환역지(肯信順窮還逆至)하면 

안개휴파자심만(眼開休把自心瞞)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역지즉노순지환(逆之則怒順之歡)이요,

내 마음에 거슬리면 썽을 내고 내 마음에 순(順)하면, 내 마음에 합당(合當)하면 다 기분 좋게 생각을 헌다 그 말이여. 

 

 

천하인정(天下人情)이 몰양반(沒兩般)이여.

천하에 모든 사람들이 다 이 두 가지 일에 다 빠져있다 그 말이여.

 

칭찬해주면 기뻐하고 욕허면 썽내고, 자기 뜻에 합당하면 좋아하고 자기 뜻에 거슬리며는 썽내고, 그렇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몇 사람이 되겠느냐 이거거든.

 

 

긍신순궁환역지(肯信順窮還逆至)여.

아무리 내 마음에 합당한 기분 좋은 일이 있다 해도 잠시 동안이지, 시간이 지내가면 그 내 마음에 합당했던 것이 결국은 다시 내 마음에 거슬리는 일로 변해버려. 

 

대인관계(對人關係)도 그렇고 어떠헌 일에 대해서도 그렇고, 사람이, 저 사람이 좋다 해도 세월이 지나가며는 미워지고, 또 그 일에 대해서도 참 내 마음에 합당하다 생각해도 세월이 지나가면 그것이 싫어지고, 명예(名譽)나 권리(權利)나 일체 부귀영화(富貴榮華)도 얻기 전에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참 갖인 고생을 하고 헐일 못 헐일 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을 허지만, 얻어놓고 보면 또 그것이 별것이 아니여. 얻기 전에는 뭐 시(詩)에도 ‘저산 너매 행복이 있다기에... ’ 뭐 뭐 그러헌 노래가 있지요? 가서보면은 또 그게 아니다 그 말이여.

 

 

(안개휴파자심만(眼開休把自心瞞))

그래서 정말 눈을 바르게 뜨고 모든 경계에 스스로 속지를 말 것이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하나도 영원성(永遠性)이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 무상(無常)한 것이고 믿을 것이 못된 것이여. 그래서 우리가, 모든 행복은 밖에서 구헐 것이 아니다. 밖에서 구해, 구(求)해서 얻어진 것은, 구헌다고 해서 다 얻어지기도 어렵지만, 설사 다행히 마음먹은 대로 얻어졌다 하더라도 반드시 다 내 몸으로부터 다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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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네 가지 영원성이 없는, 믿을 것 없는 것이 네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무상(無常)해.’ 하나도 영원성 있는 것이 없어.반드시 지금 우리의 욕심 같애서는 모든 것이 고대로 있어주기를 바래지만, 우리 마음에 든 것이 영원히 고대로 있기를 바래지만 내 마음에 든 것은 머지 안해서 떠나버리게 되고, 내가 싫어한 것은 영원히 나한테 돌아오지 않기를 바래지만 내가 싫어헌 것은 반드시 또 나한테 돌아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상(有相)한 것은 반드시 무상(無常)하다.

 

둘째는 ‘부귀(富貴)는 반드시 빈천(貧賤)하게 된다.’ 부귀, 부귀영화는 그 영원히 내가 누리고 싶고 나한테서 떠나가지 않기를 바래지마는 반드시 가난하고 천하게 될 때가 오고야만 만다. 

 

셋째는 합... 만나... ‘회합(會合), 만나고 합해진 것은 반드시 이별(離別)을 허게 되아.’ 사람과의 사람관계, 사람과 물질과의 관계, 일체가 다 만난 것은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 그 말이거든. 

 

넷째는 ‘강한 자는 반드시, 아무리 강하고 건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죽게 되고야만 만다’ 그 말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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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相(유상)한 것이 무상(無常)하니까 대단히 나쁜 것 같지마는, 그리해야 금생(今生)에 잘못 태어났어도 그 잘못된 몸띵이는 금생에 어찌하지 못하니까 그걸 버리고 새로운 좋은 몸을 받아날 수가 있어서 다행이고, 

 

지금 부귀를 누리면서 -그 부귀라 하는 것은 부처님 말씀에 ‘삼생(三生) 웬수’라 그러는데, “그놈을 얻느라고 죄 짓고, 그놈을 누리느라고 죄를 짓고, 그놈을 또 쓰느라고 죄를 지어서, 결국은 나로 하여금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게 허는 그 원인(原因)이 바로 이 세상에 무루... 유루복(有漏福)이다” 그렇게 말씀을 했는데- 그것이 없어져야, 없어진 때가 있어야 나도 참 바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고, 또 금생에 빈천(貧賤)한 사람은 누군가가 가난, 가난해져야 또 가난했던 사람이 또 부자(富者)로도 되는 것이고 해서 돌고 돌아야 하는 것인디, 그것이 참 큰 눈으로 보면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 그렇게 꼭 나쁘다고만 볼 것도 없다 그 말이여. 만나는 사람이 반드시 이별(離別)허게 되는데, 정들었던 사람이 얼마동안 살다보면 또 그 싫어지고, 또 친했던 사람이 웬수가 되기도 하는데, 또 만났다가 헤어질 때가 있어야지, 헤어져야 다시 또 새롭게 만날 수 있어서, 한번 만난 사람이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다면 그것도 참 대단히 괴로울 일이라 할 것, 말할 수가 있어요.

 

건강한 사람이 안 죽고 백세(百歲), 천세(千歲), 만세(萬歲) 안 죽고 산다면 정말 이 세상은 사람과 사람이 콩나물시루처럼 꽉 붙어가지고 다 떠죽을 것이다 그 말이여. 다행히 얼마동안 살다가 죽어주니까 동서고금(東西古今)에 모든 사람들이 자꾸 병들어서도 죽고, 늙어서도 죽고, 오다가다 사고로도 죽고 해서 죽어가니까 새로 태어난 목숨들이, 생명들이 또 살수가 있는 거고, 봄, 여름 모든 산천초목(山川草木)이 무성(茂盛)허게 이렇게 자라서, 자란데 가을이 되아가지고 서리치고 눈 내려서 그것이 다 숙살(肅殺)이 되니까, 되아가지고 그 이듬해 또 다시 새봄에 새싹이 터오니까 살지, 만약에 서리도 안 내리고 눈도 안와가지고 일 년 열두 달 무성허기만 헌다면 우리는 풀에 묻혀서 죽을 것이다 그 말이여. 풀과 나무에 묻혀서 죽을 것이다 그 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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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네 가지의 영원성(永遠性) 없는 현상(現狀)이 중생(衆生)의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으로 보면 참 고통스럽게 생각헐런지 모르지만, 탐진치 삼독을 버리고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으로써 우리의 부처님의 진리,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의지해서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精進)을 해나간다면, 봄에는 잎이 피고 꽃이 피어서 좋고, 가을에는 단풍이 지고 결실을 해서 좋고, 여름에는 더워서 좋고, 겨울에는 또 눈이 내려서 좋다 그 말이여.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기쁜 일만 마냥 있으면 좋을 것 같지마는, 그 우리의 마음에 희로애락이 계절에 있어서는 바로 그것이 춘하추동(春夏秋冬)이다 그 말이여. 봄은 ‘기쁨’이요 여름은 ‘썽내는 표현’이요 가을에는 ‘슬픔의 표현’이요 겨울에는 ‘낙(樂)에 표현’이다 그 말이지. 춘하추동이나 희로애락이 다 그 진리(眞理)에 있어서는 똑같은 것입니다. 진리를 깨닫고 보면 희로애락이 다 같은 것이고 춘하추동이 다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써 가면 이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춘하추동(春夏秋冬)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생사없는 진리속에서 영원을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인가? 이 ‘무상(無常) 속에 영원(永遠)을 산다.’ 한 생각 일어날 때 ‘이 뭣고?’ 한 생각 꺼질 때 ‘이 뭣고?’ 이 생사 속에 생사심을, 생사심(生死心)을 버리고 열반(涅槃)을 찾는 것이 아니에요. 번뇌(煩惱)를 버리고 보리(菩提)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생사심(生死心)에 즉(即)해서 ‘이 뭣고?’ 우리가 애써야 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정말 정신 차려서 가다듬을 것은 오직 ‘이 뭣고?’ 자꾸 잊어버리면 챙기고 또 챙기고, ‘이 뭣고? 한 이놈이 뭣고?’ 이렇게 해서 화두를 들고 화두를 드는 놈을 다시 들고,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까빡 까빡 놓쳐버리고 잊어버리는 시간이 많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자꾸 돌이켜 찾고 또 돌이켜 찾다보면 나중에는 화두를 들랴고 안 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순일무잡(純一無雜)이여. 아침에 한 번 들었던 화두가 점심때까지 있고, 점심때 들었던 화두가 저녁까지 있고, 저녁에 들고 자던 화두가 꿈속에서도 들려있고, 아침에 눈 딱 뜨면 엊저녁에 들고 그 잠들었던 화두가 고대로 딱 들어져 있다 그 말이여. 이것이 바로 ‘순일무잡하다’, 또는 ‘타성일편(打成一片)이다’ 이렇게 말 헐 수가 있는데, 

 

이렇게 되았을 때에 번뇌망상(煩惱妄想)은 제절로 자최가 없다 그 말이여. 그래서 그 마음경계가 적적허기가, 적적(寂寂)허다 할 수가 있는데 그 적... (녹음불량)...을 자기도 모르는 새에 화두가 언제 없어진지 화두가 없어져버리고 그냥 그 고요하고 맑고 깨끗한 경계에 포옥 빠져 있게 된다 그 말이여. 그것이 대단히 주의할 점이여. 적적하고 고요한 가운데 화두 ‘이 뭣고?’ 헌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없으면 그것을 무기공(無記空)이라 그래. 무기(無記). 무기공에 빠져있으면 그것은 못 쓰는 거여. 영원히 깨달을 분(分)이 없어. 그 고요하고 맑고 깨끗한 가운데에도 ‘이 뭣고?’헌 그 알 수 없는 의단, 의단(疑團)이 딱 현전(現前)해 있어야 그것이 바로 ‘적적(寂寂)허면서도 성성(惺惺)허다’ 이렇게 말을 하는 거여. 적적허기만 하고 성성허지 못하면 그것은 공부가 옳게 되아간 것이 아니여. 적적허면서도 화두가, 알 수 없는 의단이 깨끗허게 현전을 해 있어야 한다 그 말이여. 이것이 바로 공적영지(空寂靈知)라. 이렇게 공부를 지어나가서, 지어나가면 불일성지(不日成之)라 그랬어. 몇 일이 안가서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헌다 이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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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일지두개난만(昨日枝頭開爛漫)터니 

금조지면낙분분(今朝地面落紛紛)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영인차석번생괴(令人嗟惜飜生愧)하니 

영욕무심숙사군(榮辱無心孰似君)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작일지두개난만(昨日枝頭開爛漫)터니,

어제 나무가지 끝에는 울긋불긋 꽃이 피었더니,

 

 

금조지면낙분분(今朝地面落紛紛)이로구나.

오늘 아침에는 우수수 땅 우에 다 져버렸구나. 

 

 

영인차석번생괴(令人嗟惜飜生愧)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그 애석(愛惜)한 마음을 내게 헌, ‘그 아름답고 그 고운 향내나는 꽃이 그렇게 하룻밤 새에 저버리니 너무, 너무 너무 참 아깝다’고 생각허다가 도리어 부끄러운 생각이 마음에 나는구나.

 

 

영욕무심숙사군(榮辱無心孰似君)고.

이 세상에 영화(榮華)롭고 욕(辱)되고 허는 디에 무심(無心)허기를 어찌 그대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 아름답게 그렇게 찬란(燦爛)하게 핀 꽃이 하룻밤 새에 져버렸다 그 말이여. 그 꽃을 보는 사람은 아 그 아름다운 꽃이 오래오래 피어있기를 바래고 그랬었는데 하룻밤 새에 져버리니까 너무너무 애석하게 생각허지만, 그 꽃 자체는 그렇게 아름답게 피고 있으면서도 ‘내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없고, 하룻밤 새에 져버렸어도 하룻밤 새에 졌다고 해서 자기가 ‘애석허다’는 생각도 없이, 다만 무심(無心)하게 피었고 지는 데에도 무심(無心)하게 져버렸... 진다 그 말이여. ‘인간(人間)이 만물(萬物)에 영장(靈長)이라고 허면서 차라리 너희들 초목(草木)만도 못하는구나.’ 이래서 그 꽃이 졌다가(폈다가) 지는 것을 보고 부끄러운 생각을 냈다 이거거든. 

 

우리는 인생(人生)으로 태어나서 빈부귀천(貧富貴賤) 남녀노소(男女老少) 별의별 처지(處地)에 별의별 형상(形像)으로 이렇게 태어나서 한 세상(世上)을 이렇게 살다가 갑니다. 과거에 지은, 자기(自己)가 지은 인연(因緣)과 자기가 지은 과보(果報)에 따라서 그렇게 태어나고, 거기에 태어나고, 이렇게 우리는 만나고 한 평생을 삽니다. 누구의 탓도 아니고 자기 자신이 지은 인연에 따라서 그렇게 만나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원인, 좋은 것은 자기가 그렇게 잘해서 그런 좋은 것을 누린다고 생각하고, 잘못된 것은 조상 탓이나 부모 탓이나 다른 사람에게 그 원인(原因)을 전가(轉嫁)를 헙니다마는, 이것이 모두다 무심(無心)허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동(擧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무심(無心)하면, 희로애락이나 생로병사가 바로 춘하추동에 꽃이 피고 잎이 지고 허는 것과 조끔도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허면 무심허게 해나갈 수가 있을 것인가? 무심헐랴고 허면, 헐랴고 허면 오히려 한 생각이 더 일어나게 되는 것이여. 마음을 일으켜서 무심헐랴고 허면 무심이 되기 커녕은 오히려 새로운 마음 하나가 더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두(話頭)를 들고 열심히 참구(參究)를 허다 보면 무심헐랴고 허지 안 해도 제절로 무심허게 되는 것입니다. 무심허게 되면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일체고통(一切苦痛)을, 고통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고, 무심(無心)의 경지에를, 거기에도 빠지지 아니하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해서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바로 봐버리면 바로 그것이 깨달음의 세계로 되는 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360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