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식출식入息出息에 상전경常轉經】
【소가 코 밑에서 뱅뱅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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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소산전설천기(花咲山前洩天機)하고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여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화소산전설천기(花咲山前洩天機)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로구나.
꽃이 산전(山前)에 웃으니, 꽃이 산 앞에 피니 천기(天機)를 누설(漏洩)함이요.
조가임외화무생(鳥歌林外話無生)이다.
새가 숲 밖에서 노래하니 무생(無生)을 말함이로다.
봄이 오면 울긋불긋 꽃이 피고, 또 가을에 오면 가을꽃들이 산에 모다 피는데, 그 울긋불긋 그 피는 꽃은 바로 천기를 누설헌 것이다. 말로써 표현 헐 수 없는 한없는 그 진리(眞理)를 바로 누설(漏洩)헌 것이다. 새가 숲 속, 숲 밖에서 그 갖인 목소리로 모다 노래를 부르는데, 그것은 바로 무생(無生)의 이치를, 남이 없는 이치를 말허는 것이다.
두두자유무궁의(頭頭自有無窮意)를,
낱낱이, 꽃은, 꽃이 피는 것, 온갖 색깔의 꽃이 피는 그 낱낱이 그, 그것이, 크고 작고 노랗고 빨간 온갖 새들이 부르는 노래, 그것들이 낱낱이 스스로 무궁(無窮)한 깊은 뜻을 가지고 있어.
득래무처불봉원(得來無處不逢原)이다.
무엇을 잡아오건, 꽃을 잡, 잡, 한 송이의 꽃을 들거나 한 곡조(曲調)의 새의 노래를 붙잡거나 무엇을 얻어오더라도 다 그 근본진리(根本眞理) 아닌 것이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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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묘년(丁卯年) 시월(10월) 첫째, 첫째 일요법회(日曜法會)를 맞이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조실(祖室)스님의 [심우송(尋牛頌)] 법문(法門)을 경청했습니다. 시간관계상 앞부분만을 들었습니다마는, 바닷물을, 그 넓고 끝없는 그 바닷물을 다 마시지 않고 바닷가에서 조끔만 손고락으로 찍어서 맛보더라도 ‘바닷물이 짜다’고 허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앞부분만을 한 삼십분(30분)간에 걸쳐서 들었지마는, 그 삼십분 동안에 설(說)하신 조실스님의 법문 속에, ‘우리가 참나를 어떻게 닦으며, 어디에서 찾으며, 왜 그것을 찾어야 한 가’에 대해서 정말 감동적으로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최상승법(最上乘法), 이 참선법(參禪法)은 자기가 자기를 찾는 공분데, 참나, 나에 불성(佛性), 그 ‘참나’ 그것을, 무량겁(無量劫)으로부터 그놈은 생겨난 때가 없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을 윤회(輪廻)허면서 항상 그와 더불어 오늘에까지 이르렀는데, 그와 더불어 같이 윤회를 하고, 같이 살고, 같이 고통을 받고, 같이 낙(樂)을 받으면서도 그놈을 자각(自覺)을 허지 못하고 전혀 그것을 잃어버린 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잊어버렸냐?
조실스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놈을 잃어버렸지만, 잃어... 잃어버려봤자 코밑에서, 콧속에서 뱅뱅 돈다.’ 이러헌 표현을 쓰셨는데, 아주 알기 쉽고 평범(平凡)한 표현을 허셨지만, 그보다도 더 정확하게 말씀을 허실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코밑에서 뱅뱅 돌아.’
임제선사(臨濟禪師)는 ‘우리의 면문(面門)으로 출입(出入)을 한다. 우리의 얼굴, 우리의 낯, 얼굴을 통해서 낯바닥 면문을 통해서 출입을 헌다’ 그랬습니다. 눈이... 코 ‧ 입 ‧ 귀 모다 이런 것들이 붙어있는 부분이 얼굴인데, 그 가운데도 가장 그 중심이 코지요? 그 면문(面門)을 통해서 ‘무위진인(無位眞人), 위없는 참사람이 면문을 통해서 출입을 헌다.’ 이렇게 임제스님은 말씀허셨는데, 조실스님은 ‘우리가 무량겁으로부터 오늘날까지 오면서 잃어버렸던 그 소가 코밑에서 뱅뱅 돈다.’ 이런 표현을 허셨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증거로서 가장 뚜렷한 것은 ‘숨 쉬는 것’입니다. ‘살았느냐, 죽었느냐’를 알아볼랴면 콧속에 콧김이 들랑날랑 헌가 안 헌가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콧속에 숨이 나왔다 들어갔다 허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고, 완전히 숨이 딱 끊어지면 벌써 그것은 죽었다고 볼 수밲에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도는 그 들랑거리는, -그렇게 말허면 ‘그러면 콧속에 콧구녘으로 들랑날랑 하는 그 공기가 참 나냐?’ 이렇게 이해를 헌다면 참 말도 안 되지만,- 하여칸 눈을 통해서 모든 색깔을 판단하고, 귀를 통해서 온갖 소리를 알아보고, 코를 통해서 온갖 냄새를 알아보고, 혀를 통해서 온갖 맛을 분별하고, 몸띵이를 통해서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느끼고, 생각을 통해서 선악시비(善惡是非)를 분별(分別)하고 그러헌 놈.
그러헌 놈인데, 설사 눈으로는 아주 의식(意識)을 잃어서 빛깔을 판단하지를 못하고, 귀를 통해서도 누구 말인지 뭣인지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생각이 몽롱헐 지경에 이르렀어도, 그래도 콧구멍으로 쪼끔이라도 가는 숨이 드나들면 아직 죽은 것이 아니여. 그래서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그 한 물견’을 소에다가 비유하고, ‘그 잃어버린 소가 코,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고 허는 그 표현을, 우리가 그 표현을 통해서 나의 존재하는 곳을 확인을 허고 그곳에 즉(即)해서 항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나간다면 도처(到處)가, 방에 앉었건 뜨락을 거닐으건, 차를 타건, 똥을 누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참나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허던지 코밑에 들랑거리는 그 숨이 있는 곳에 언제나 자기(自己)를 확인(確認)할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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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戒)는 계기(戒器)라, 그릇, 그릇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그리고 정(定)은 정수(定水), 물에다가 비유를 하고, 혜월(慧月), 혜(慧)는 달에다가 비유를 했습니다. 계(戒)를 잘 가짐으로 해서 참선, 정(定)을 잘 장애 없이 닦을 수가 있고, 그래서 지혜의,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있다. 그릇이 온당해야, 계의 그릇이 온당(穩當)해야 선정(禪定)의 맑은 물을 그 그릇에 담을 수가 있고, 그 맑은 물이 그릇에 잘 담겨져 있어야, 있어서 딱 안정(安定)이 되아야 하늘에 있는 밝은 달이 그 그릇에 나타나는 거와 같이, 계(戒)를 지키지 않고서는 온당하게 도(道)를, 참선(參禪)을 헐 수가 없고, 온당하게 정진(精進)을 허지 않고서 지혜(智慧)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허고자 하고 지혜의 눈을 뜨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부처님의 계를 받아서 그것을 잘 가짐으로 해서 도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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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계를 받았으니 이제 정식(正式)으로 부처님 제자(弟子)가 되았습니다. 아까 몸으로 지키는 이 소승계(小乘戒)와 마음으로 지키는 그 대승계(大乘戒)를 우리는 다 같이 지켜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허며는 이 두 가지 계를 원만허게 잘 지킬 수가 있느냐? 참 마음으로 지키는 죄는(계는) 대단히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리 이를 악물고 잘 지킬랴고 해도 지킬랴고 허는 생각 낼 때 벌써 범하버리... 범허게 되는 것이 이것이 대승계이기 때문에 참 지키기가 어려우나, 그래도 잘 지킬 수 있는 묘(妙)한 방법(方法)이 있어. 그것은 화두(話頭)를 타가지고 참선(參禪)을 열심히 허는 것이여. 참선을 열심히 허면 소승계나 대승계 헐 것 없이, 지킬랴고 헐 것 없이 제절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앉어서나 서서나 일을 헐 때나 무엇을 헐 때든지 항상 화두(話頭)를 들어. ‘이 무엇고?’ 한문(漢文)으로는 ‘시심마(是甚麽)’ 그러는데, 중국음(中國音)으로는 ‘씨 씀마’ㄴ데, 씨씀마, 시삼마란 말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인데, 경상도 표현... 말로는 ‘이 뭣고?’ 거든, ‘이 무엇고?’ ‘이 무엇고?’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인데, 경상도 사람들은 ‘이 뭣고?’ 이렇게 간단하게 말을 허기 때문에 옛날부터 이 참선해나가는 데에 화두(話頭)로서 ‘이 뭣고?’라고 허는 경상도 말을 많이 사용해 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경상도분이 아니라도 이 화두를 들으실 때는 ‘이 무엇고?’ 이렇게 허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이것’이 무엇이냐? 그 ‘이것’이라고 허는 것을 무엇을 가리켜서 ‘이것’이라고 허냐?” 헌데, 사실은 그것이 알 수가 없는 거에요.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알 수 없는 그놈’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항상 참구(參究)를 허는 것인데, 이 참구허는 데 있어서 이론적으로 지식과 그 따져서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니여. 그동안에 보고 듣고 알고 있는 모든 세속적(世俗的)인 지식, 또 불교(佛敎)에 교리(敎理), 뭐 일체 철학적(哲學的)인 이론(理論), 그런 것들을 가지고, 그런 것들을 동원을 해가지고 이것을 참구허는 것이 아니라 그건 다 놓아버려야 합니다. 완전히 그건 놓아버리고 밑도 끝도 없이 ‘이 뭣고?’ 이렇게만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 재미가 없지만 재미가 있건 없건, 또 잘 되건 안 되건 그런 것도 따질 것 없이 그냥 ‘이 무엇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 몸띵이 끌고...’
-사람마다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거든. 아까 ‘잃어버린 소를 찾는데, 잃어버렸다고 허지마는 결국은 이 우리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 헌, 바로 그 코밑에 뱅뱅 도는 대... 그놈이 무엇인가를 찾는 거여. 그걸 뭐 고인(古人)들은 ‘마음’이라고도 하고, ‘성품(性品)’이라고도 하고, ‘식(識)’이라고도 하고, ‘혼(魂)’이라고도 하고, ‘영혼(靈魂)’이라고 하고, ‘불성(佛性)’이라고도 하고, 뭐 ‘진여(眞如)’라고도 하고, ‘법계(法界)’라고도 하고, 뭐 불교 그 경전 안에도 경(經)마다 그것에 대한 표현이 다르지만, 그러헌 이름이 문제가 아니여. 그 실체(實體). 모냥도 없고 빛깔도 없고, 그 볼라야 볼 수 없고 만질라야 만질 수도 없는, 또 아무리 생각으로 알랴고 해도 알 수 없는, 그러면서도 항상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우리와 같이 살고 있거던! 그놈.-
이론(理論)도 그만두고 이름과 상(相)도 따질라 하지 말고 다맛 무조건(無條件)하고 ‘이 뭣고?’
앉아서도 ‘이 뭣고?’, 서서도 ‘이 뭣고?’, 걸어가면서도 ‘이 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 뭣고?’, 슬플 때도 ‘이 뭣고?’, 억울할 때도 ‘이 뭣고?’ 이렇게 해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간에 항상 이 ‘이놈이 뭐... 뭐냐?’한 그 알 수 없는 의심이 현전(現前)하도록. 그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더불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말이여.
처음에는 입으로는 ‘이 뭣고?’ 해도 속으로는 온갖 딴 생각이 들끓고, ‘이 뭣고?’헐 그 잠꽌 동안은 ‘이 뭣고?’생각이 있지마는 일 분도 못가서 잃어버리고 딴 생각을 허게 되고, 그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이 아니며는 먹먹허고 그렇지 아니허며는 혼침(昏沈)이 오고, 혼침이 좀 없어질 만 허면 또 호사난상(胡思亂想)이 일어나고. 참 참선(參禪)을 헐랴고 노력을 해봐야 자기의 마음이 얼마만큼 일정(一定)하지 못하고 번뇌와 망상 속에 이렇게 놀아나고 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일생동안을 번뇌(煩惱) 아니면 망상(妄想), 잡념(雜念) 속에 시달리고 살면서도 무엇이 잡념인줄을 모르고 삽니다. 다행히 참선을 해봐야 ‘아, 우리의 마음이 잠시도 가만히 있을 시간이 없고 마치 저 바다에 파도가 일렁거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렇구나.’ 한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밤낮 번뇌망상(煩惱妄想)과 희로애락(喜怒哀樂)과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에 풍파(風波) 속에 놀아나고 있는 한은 우리의 죄업(罪業)은 끊임없이 지어지게 되고, 끊임없이 짓는 업(業)으로 말미암아 무량겁을 두고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허게 되는 것입니다.
생사윤회를 끊고자하면, 생사(生死)의 고해(苦海)로부터 해탈(解脫)을 해서 열반(涅槃)의 언덕에 오르고자하거든, 우리의 이 한 생각,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이 한 생각을 단속(團束)을 험으로서 참나를 깨닫는 길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기(根機)가 약... 수승(殊勝)하지 못한 우리는 참 힘이 들지만, 아무리 힘이 들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헐 일이 참 많고, 일생동안 수없이 많은 일을 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또는 집안을 위해서 또는 이웃을 위해서 사회국가를 위해서 크게는 인류를 위해서 많은 동서고금(東西古今)에 사람들이 일을 하다가 갑니다. 참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많은 공헌(供獻)을 세우기도 하고, 또 자기로 인해서 많은 사람에게 해독(害毒)을 끼치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 많은 사람들이 그 많은 일을 허고 갔지만 진정 어느 일이 정말 자기(自己)를 위하는 일이고 진정으로 이 인류(人類)를 위하는 일이냐?
이 세상에 어떠헌 일보다도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코밑에 뱅뱅 도는, 이 눈으로 볼 수 없는 소를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찾을랴고 노력을 헌 것이 참으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고, 이것을 찾도록 사람들에게 권고(勸告)하고 인도(引導)하는 것이 인류를 가장 위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다른 어떠헌 일도, 설사 그것이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세속에서는 인류에 크게 공헌했다고 야단들이지만 그것들은 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속에서 간주(看做)될 뿐이고, 정말 이 생사를 해탈(解脫)허는 일에는 아무 보탬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헌 과학자가 어떤 연구를 해서 박사가 되고 그 연구결과로 인해서 인류를 위해서 많은 공헌을 했다고 허지만, 그게 다 별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는데 조끔 편리(便利)하게 살도록 공헌을 헌 것 뿐이지, 근본적(根本的)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편리허게만 헐뿐 행복허지를 못했다. 행복하게 못허고 만 것쯤은 또 괜찮은데, 정말 그 많은 박사들이 연구한 그 과학이 인류를 멸망(滅亡)허게 허는 결과를 가져온 것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러헌 사람들이 그러헌 과학을 발전을 시키지 않고 옛날식으로 농사짓고 채소심어서 먹고 살았다면 인류는 이렇게 무서운 공포 속에 떨지 안 해도 되았을 것입니다.
이러헐 때 세계가 언제 어떻게 찰나간에 잿더미가 되고 인류가 다 멸망하느냐? 하루 지내면 하루 지낸 만큼 그 위험도는 점점 증가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런지 아무도 예측을 헐 수가 없습니다. 이러헌 위기 속에서 이 위기를 막고, 막을 수 있고, 또 설사 그런 위기(危機)가 도래(到來)헌다 하더라도 정말 우리가 공포심 없이 이 몸띵이를 바꿀 수 있는 길은 참선(參禪)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설사 수소탄(水素彈)이 떨어져서 찰나간(刹那間)에 이 몸띵이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 그 찰나에 ‘이 뭣고?’ 헌 그 알 수 없는 그 화두(話頭)를 들고서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 사람 앞에는 죽음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왜그러냐? 이미 설사 확철대오는 못했다 하더라도 알 수 없는 화두에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해있다면 거기에는 생사(生死)의 무상살귀(無常殺鬼)가 거기에 침범(侵犯)을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이 몸띵이는 가루가 되어서 없어져도 이 최상승법에 마음이 탁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해가지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 사람은 그 앞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사 염라대왕(閻羅大王) 앞에 간다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어. 염라대왕이 자리에 일어나서 합장배례(合掌拜禮)를 헌다고 그랬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염라대왕이 다 미륵보살(彌勒菩薩)에 화현신(化現身)이고, 다 불법을, 불보살의 화현신으로서 나타난 보살화현(菩薩化現)이기 때문에, 최상승법(最上乘法)에 입각(立脚)해서 참선(參禪)을 허는 사람이라면 머지안해서 다 견성성불(見性成佛)해서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할 불종자(佛種子)ㄴ데 염라대왕이 그 앞에 합장배례를 아니헐 리가 없거든.
그래서 이 공부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야 하고, 아무리 해갈수록 어렵고, 아까 조실스님께서 ‘수활산요노전심(水闊山遙路轉深)...심이라’ 이 [심우송(尋牛頌)]에 말씀을 허셨습니다마는, 끝없는 물, 멀고먼, 그러고 험악한 산길, 가도 가도 끝이 없고 가도 가도 한이 없을지언정, 갈수록 길이 더 험하고 어려웁다 하더라도, 기어코 우리가 한 걸음 한걸음 한 생각 한생각 단속해 나감으로써 마침내 통 밑구녘 빠지듯이 확철대오 허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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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는 방법은 첫째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고, 가부좌(跏趺坐) 또는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고, 그 다음에 호흡(呼吸), 단전호흡(丹田呼吸). 보통 가슴으로 다 호흡을 허는데, 숨을 들어마실 때에 배꼽 밑에 아랫배 단전(丹田)이, 하복부(下腹部)가 약간 볼록하게 나오도록 내 밀고, 또 숨을 내쉴 때는 그 볼록했던 그 단전이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또 숨이 다 나가면 또 수르르르 허니 들어마시는데, 들어마시면 배가 차츰차츰차츰 볼록해지고 내쉬면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고, 그저 호흡에 따라서 배가 볼록해졌다 또 홀쪽해졌다 한 것을 항상 그렇게 관(觀)하면서 호흡(呼吸)을 허는데, 들어마실 때 조용히 코로 들어마시고 내쉴 때도 역시 코로 내쉬는데, 들어마시는 시간이 약 삼초(3초), 들어마셨다가 약 삼초(3초)동안 또 머물렀다가 또 한 삼 사 초(3-4초)에 걸쳐서 조용허게 내쉬는데, 내쉴 때 ‘이 뭣고-?’ 이렇게 생각을 허는거여. ‘이 뭣고?’ 또 다 내쉬었으면 또 스르르르르 허니 들어마셔가지고 약 삼초동안 머물렀다가 내 쉬면서 ‘이 뭣고-?’
처음에 시작한 사람은 숨을 내쉴 때마다 ‘이 뭣고?’ 이렇게 화두(話頭)를 거각(擧却)을 하지만,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렇게 차츰차츰 익숙해지면 꼭 숨을 내쉴 때마다 화두를 들지 안 해도 돼. 알 수 없는 ‘이 뭣고?’ 헌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없어지지 아니했으면,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고대로 거각한 대... 한 채로 호흡만을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그러다가 몇 번이고 숨을 내쉬었다 들어마셨다 헌데, 세 번이고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그렇게 허다가 그 화두가 없어지고 딴 생각이 들어왔다 허면, 그때 다시 또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한번 또 그렇게 챙기는 거여. 나중에는 한 번 아침에 들은 화두가 없어지지 않고 딴 생각이 들어오지 아니하고 알 수 없는 ‘이 뭣고-?’ 그 ‘대관절 이것이 무엇이냐?’ 헌 그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고대로 탁 있으면, 뭐 점심 먹을 때까지도 새로 화두를 들지 안 해도 상관이 없어.
그렇게 까지 될라면 상당히 노력을 해야 그렇게 되고,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이 몰록 발(發)해서 산을 봐도 산이 보이지 않고, 물을 봐도 물인 줄을 모르고, 시장 바닥에 수천 명이 득실거리는 속에 있어도 한 사람도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고, 밥을 먹어도 밥이 된지 진지를 모르고, 반찬을 먹어도 짜고 싱거운 줄을 모를 정도로 그렇게 순일무잡(純一無雜)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된다면, 그때는 화두를 뭐 자꾸 들어쌀 필요가 없어. 한번 들어가지고 하루 종일 있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고대로 알 수 없는 의단이 그렇게 독로가 된다면, 뭐 그렇게 자주자주 화두를 들을 필요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렇게 된다면 일주일을 못가서 툭 터지고 마는 법이여. 이것은 열심히 허면 반드시 그러헌 경계(境界)가 오고 마는 것입니다.
뭐 망상(妄想) 때문에 못하느니, 무슨 혼침(昏沈)이, 잠이 와서 못하느니 헌 것은, 다 신심과 분심과 의심이 충분허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정말 신심(信心)과 분심(憤心)과 의심(疑心) 이 세 가지 이 삼요(三要)가 일시(一時)에 돈발(頓發)해서 그것이 충실(充實)허다면 머지안해서 결국은 타성일편(打成一片)의 시기(時機)가 도래(到來)허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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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진인몰형단(無位眞人沒形段)호되
심상출입면문중(尋常出入面門中)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당능일념회기료(倘能一念回機了)하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하리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무위진인몰형단(無位眞人沒形段)이여.
위(位)없는 참사람. 계급(階級)이 없는, 빈부귀천(貧富貴賤)과 남녀노소(男女老少) 이런 위(位), 계급이 없는 참사람은 형단(形段)이 없어.
다 사람이면 사람 사람마다 그 얼굴이 있고 모냥이 있는데, 이 계급이 없는 이 참사람은 형단이 없다 그 말이여. 그래서 형단이 없기 때문에 볼라야 볼 수가 없고 잡을라야 잡을 수가 없고 알라야 알 수가 없어.
심상출입면문전(尋常出入面門前)이여.
평상시(平常時)에 항상 우리의 면문(面門)을 통해서, 얼굴을 통, 얼굴을 통해서 출입(出入)을 허더라.
당능일념회기료(倘能一念回機了)하면
만약 능(能)히 한 생각에 그 기틀을 돌이켜버리면, 그 형단(形段)이 없는, 면문으로 출입허는 그 형단이 없는 그놈을 깨쳐버리면,
답단전광유수성(踏斷電光流水聲)하리라.
그 번쩍허는 그 번갯불과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 끊을 것이다.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번갯불을 밟을 수가 있겠습니까? 흐르는 물소리를 밟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밟을 수 없는 그 번갯불과 그 흐르는 물소리를 밟아버릴 것이다. 밟을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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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계(五戒)를 받고 불명(佛名)을 받으신 분, 또 진즉 오계를 받았으되 본의 아니게 오계를 파(破)하신 분은 오늘 다시 새로 받았으니 새로 태어난, 새로... 연세야 몇 살이 되셨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오늘 새로 부처님 제자로, 부처님의 아들로 새로 태어났다고 생각을 하시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몸으로 이 순간부터 화두를 들고 열심히 정진(精進)을 해서 금생(今生)에 결정코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요달(了達)허시기를 바랍니다.
불명은 이 법요식(法要式)이 끝난 다음에 차례차례로 모다 받아 가시고, 지난번, 저지난번, 모다 작년, 진즉 불명을 모다 신청을 하고 또 화두도 신청을 하고 그래놓고도 아직까지도 그 찾아가지 아니하신 분은 오늘 다 찾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시절이 이렇게 어느덧 가을이 무르익게 되았습니다. 더웁지도 춥지도 않는 아주 좋은 계절이 되았습니다. 그러나 시국(時局)은 매우, 모다 국내외(國內外)를 막론(莫論)하고 매우 복잡하고 다단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불자(佛子)는 오계(五戒)를 잘 받아서 실천(實踐)을 하시고, 어쨌든지 어떠헌 상황에서도, 어떠헌 어려운 처지를 당하더라도 항상 불자(佛子)라고 허는 긍지(矜持)를 가지고, 화두(話頭)를 벗 삼고 화두를 스승 삼고 화두를 나침판을 삼고 화두를 등불을 삼아서 하루하루를, 또 일초 일초를, 한생각한생각을 야무지게 단속(團束)을 해서 풍파(風波)가 심헐 수록에 그 배를 탄 사람은 정신(精神)을 채리듯이, 그리고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서로 화합(和合)을 해서 일치단결(一致團結)해가지고 각자 자기의 부서에서 자기의 책임을 완수허면서 그 풍랑(風浪)을 이겨내듯이,
이렇게 세상이 복잡하고 어려운 때일수록 모두가 다 단합(團合)허고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애끼고 서로 도우며 서로 용서(容恕)허며, 이러헌 난국(亂局)을 기(期)해서 이 어려운 때를 잘 이용을 해서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얻고, 나아가서는 모두가 다 그렇게 화합하고 서로 용서함으로써 전 국민이 단합이 되고, 전 국민이 단합이 됨으로써 우리나라가 세계에 으뜸가는 나라가 되아가지고 인류를 갖다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러헌 역군(役軍)이 될 수가 있고,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그 제자(弟子)로서, 불교(佛敎)의 진리(眞理)의 사또(使道)로서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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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촌리형형례(三街村裏兄兄禮)하고
요시점두부부지(鬧市店頭父父知)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即在玆)로되
호리유차요천리(毫釐有差謬千里)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삼가촌리형형례(三街村裏兄兄禮)요.
저 삼거리 마을 속에 서로 ‘형님, 형님’ 하고 서로 인사를 하고,
요시점두부부지(鬧市店頭父父知)다.
저 시끄러운 장바닥에 그 가게 앞에서 그 ‘아자씨, 아자씨’, ‘아부지, 아부지’ 하고 서로, 서로 알고 인사허는 것이... 허는데,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即在玆)다.
한 생각 기틀을 돌이키면 곧 여기에 있더라.
아무... 불법(佛法)이 뭣인지, 참선(參禪)이 뭣인지, 뭐 깨달음이 뭣인지 그런 것도 모르는 저 거리에 사람들. ‘형님, 형님’ ‘아우, 아우’ 허고 허는 아주 평범(平凡)한, 그 무식한 그런 사람들 서로 인사할 줄 아는, 또 시끄러운 장바닥에 모다 가게 앞에서 모다 서로 주고받고 서로 알... 그러헌 사람들도 서로 다 안다 그 말이여. 근데 그놈이 무엇인가는 모르지마는 다 그... 그 사람들이 낱낱이 다 가지고 있고 날로 그놈을 쓰고 있고 그놈과 더불어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런데 그놈이 무엇인가는 꿈에도 아지를(알지를) 못하고 알랴고 허지도 않고 그것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있다.
일념회기즉재자(一念回機即在玆)야.
한 생각 탁 돌이키면 곧바로 여기에 있어. 그러나,
호리유차(毫釐有差)에 요천리(謬千里)니라.
바로 이 코밑에서 뱅뱅 돌고 바로 이 여기에 있다고 하지만, 털끝만큼이라도 호리(毫釐)가 있어... 이 차(差)가 있으면 천리(千里)가 어긋나버린다. ‘아 이놈이로구나. 바로 이렇게 말허는 이놈이다.’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이 말헐 때 말 허는 이놈, 또 그 말을 듣고 아는 놈, 또 코로 이렇게 냄... 숨 쉬는 놈, 바로 이놈을 내놓고 바로 이 참나가 어디가 있느냐? 바로 이놈이다.’ 이렇게 만약에 이해(理解)를 했다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그 말이여. 천리나 비뜰어져버린다. 이것은 도독놈이 들어왔는데 자기 자식인줄 착각(錯覺)을 허는 거와 같고, 된장을 보고서 ‘아 이거...’, 아 똥을 보고서 이것이 된장인줄 알고 상추쌈 싸먹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그 바로 이놈을 여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이놈이라고 허면 벌써 천리(千里)나 틀어져버린다 그 말이여.
- 송담선사 법문 340번.
* ‘그 잃어버린 소가 코, 콧속에, 코밑에 뱅뱅 돈다’고 허는 그 표현을 통해서, 나의 존재하는 곳을 확인을 허고 그곳에 즉(即)해서 항상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해나간다면 도처(到處)가 바로 참나 찾는 선불장(選佛場)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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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約祖宗門下앳 一卷經하야 言之컨댄 則入息出息에 常轉經커니 豈待形於紙墨然後에사 以爲經哉리오.
만약 조종문하祖宗門下에 일권경一卷經을 잡아 이르건댄, 들이쉬며 내쉼에 항상 경經을 전轉커니(굴리거니) 어찌 종이와 먹에 나타남을 기다린 후에야 경經이라 하리오.
- <금강경 삼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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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東印土國王。請二十七祖般若多羅齋。王問云。何不看經。祖曰。貧道入息不居陰界。出息不涉眾緣。常轉如是經。百千萬億卷。此即頻頻轉念之意也。
옛날 동 인도 땅에 국왕國王이 이십칠(27)조祖 반야다라般若多羅에게 재齋를 청請하였다.
왕이 물어 이르길, “어째서 경經을 보지 않으십니까?”
조사祖師가 말하길, 빈도貧道는(산승은) 숨 들이쉬되 (안으로)오음五陰 · 십팔계十八界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숨 내쉬되 (밖으로)온갖 연緣에 간섭되지 않으니, 늘 이와 같이 경전 백천만억 권을 읽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 자주 념念을 굴린다’하는 뜻입니다.
- 銷釋金剛經科儀會要註解-宋-宗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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諸塵旣然, 則不越此念, 不破此塵, 入息不居陰界, 出息不涉萬緣, 常轉如是經, 百千萬億卷又何勞?
모든 티끌이 이미 그러하다면, 이 념을 넘어서지 않고, 이 티끌을 부수지도 않고서, 숨을 들이쉴 때에 오온 십팔계에 머물지 않고, 숨을 내쉴 때에 온갖 인연에 간섭되지 않아, 언제나 이와 같이 이렇게 경(經)을 굴리니(읽으니), 백천만억(百千萬億)권이라 하더라도 또한 어찌 피로하랴?
-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 제15권 [보설(普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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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송尋牛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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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조실 스님께서 설하신 십우도(十牛圖), 심우송(尋牛頌) 법문도 역시,
첫째는 소를 찾는 거고[심우(尋牛)],
둘째는 소를 찾다가 소의 발자죽을 발견한 거고[견적(見跡)],
셋째는 발자죽 따라가다 보니까 소를 보았다 그말이여[견우(見牛)].
그리고 넷째는 소를 간신히 붙들었어[득우(得牛)].
다섯째는 소를 붙들어 가지고 그것을 잘 길을 들인다[목우(牧牛)] 그 말이거든.
여섯째는 길들인 소를 타고 자기집으로 돌아오는 거고[기우귀가(騎牛歸家)].
일곱째는 소는 잊어버리고 사람만 있는 거고[망우존인(忘牛存人)].
여덟째는 인우구망(人牛俱忘)이여, 소도 잊어버리고 사람도 잊어버려, 그러한 경계를 말한 거여.
아홉째는 반본환원(返本還源)이여, 근본으로 돌아가는 거고.
열째는 수수입전(垂手入廛)이여, 떠억 손을 드리워 가지고 모다 거리로 나가는 거다.
그러면 첫째 심우(尋牛)는 보리심(菩提心)을 발하는 거여, 발심(發心)을 하는 단계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수행(修行)하는 과정이고, 그리고 일곱째, 여덟째는 보리(菩提)를 성취하는 거여. 성보리(成菩提), 깨달음을 얻는 경계고. 아홉 번째 반본환원은 열반(涅槃)의 경계에 들어가는 거고, 열 번째는 좋은 방편을 써서 중생 교화하는 경지다 그 말이거든.
한 번 뛰어서 ‘여래(如來)의 땅’에 들어가는 거,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하는 것이 최상승법인 활구참선이지만, 그것을 우리 중생으로 하여금 그 과정을 알아듣게 설명을 하기 위해서 고인(古人)네들은 이런 심우송(尋牛頌)—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하고,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하는 차례차례 과정을 이렇게 시로써 표현해 논 것인데,
이 깨달음은 비약적인 것이지 차츰차츰 과정을 밟아 올라가서 무슨 학문 하듯이 알아 들어가는 공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모든 일이 지혜로운 방편이 없이는 구경(究竟)의 목적지에 가장 바르게, 가장 빨리 도달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508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