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但於事上通無事、다만 일 위에서 일 없음을 통달할 뿐]
[묘증거사에게 보인다. 示妙證居士]
示妙證居士 (聶寺丞)
無常迅速, 生死事大. 衆生界中, 順生死底事, 如麻似粟, 撥整了一番, 又一番到來. 若不把生死兩字貼在鼻尖兒上作對治, 則直待臘月三十日 手忙脚亂, 如落湯螃蟹時, 方始知悔則遲也. 若要直截, 請從而今便截斷.
묘증거사 ( 妙證居士 )에게 보임.
무상無常은 신속迅速하고 생사生死의 일은 큽니다. 중생계衆生界 가운데에 생사를 따르는 일은 삼대나 좁쌀처럼 많아서, 한 차례 정리하고나면 또 한 차례 다가옵니다. 만약 ‘생사生死’ 두 글자를 잡아 콧끝에 두어 대치對治하지(번뇌를 돌이키지) 않는다면, 납월삼십일臘月三十日(죽음을 당해서)에는 수망각난(手忙脚亂, 손발을 허둥 지둥함)하는 것이 마치 끓는 물에 방게를 집어넣은 때와 같을 것이니, 이때 비로소 후회한다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만약 곧장 끊고자 한다면, 청컨대 한걸음 더 나아가 ‘바로 지금 끊어 버리십시오.’
學世間法, 須要理會得分曉; 學出世間法, 卻全要理會不得, 方有趣向 分. 旣理會不得, 卻如何趣向? 但恁麽究取.
세간법世間法을 배우는 데에는 모름지기 분명하게 그 도리를 알아야 하지만, 출세간법出世間法을 배우는 데에는 도리어 전혀 그 이치를 알 수 없어야 비로소 나아갈 분(자격)이 있습니다. 이미 이치를 알 수 없는데 도리어 어떻게 나아가겠습니까? 다만 이렇게 참구하여 밝히십시오.
佛是衆生界中了事漢, 衆生是佛界中不了事漢. 欲得一如, 但佛與衆生 一時放下. 則無了無不了. 故古德云 : “但於事上通無事, 見色聞聲不用聾.
부처는 중생계衆生界 가운데에서 일 마친 사람이요, 중생은 불계佛界 가운데에서 일 마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일여一如하고자 하면, 다만 부처와 중생을 일시一時에 놓아 버리십시오. 그리하면 일 마침도 없고 마치지 못함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덕古德이 말씀하시길, “다만 일 위에서 일 없음에 통달할 뿐이요, 색을 보고 소리 들음에 봉사나 귀머거리가 될 필요는 없다(귀를 막을 필요는 없다)” 하였습니다.
僧問趙州 : “柏樹子還有佛性也無?” 州云 : “有.” 僧云 : “幾時成佛?” 州云 : “待虛空落地.” 僧云 : “虛空幾時落地?” 州云 : “待柏樹子成佛.” 看此話, 不得作柏樹子不成佛想, 虛空不落地想. 畢竟如何? 虛空落地時, 柏樹子成佛; 柏樹子成佛時, 虛空落地. 定也思之!
” 한 중이 조주趙州에게 물었습니다. “잣나무(柏樹子)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조주가 이르길, “있다.”
스님 : “언제 성불成佛합니까?”
조주 : “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를 기다려서.”
스님 : “허공은 언제 땅에 떨어집니까?”
조주 : “잣나무가 성불할 때를 기다려서.”
이 화두를 간看하되, 잣나무가 성불하지 못했다거나, 허공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짓지 않는다면 필경에 어떠합니까? 허공이 땅에 떨어질 때에 잣나무는 성불하고, 잣나무가 성불하는 때에 허공은 땅에 떨어집니다. 고요히 생각해 보십시오.
佛是無事底人, 住世四十九年, 隨衆生根性, 應病與藥, 權實頓漸, 半滿偏圓, 說一大藏敎, 皆無事法也. 衆生無始時來爲心意識之所流轉, 流轉時渾不覺知, 故佛在般若會上 說諸法空相, 謂眼耳鼻舌身意, 色聲香味觸法皆空, 徒有名字而已. 到究 竟處, 名字亦空, 空亦不可得. 若人夙有善根種性, 只向不可得處死卻心意識, 方知釋迦老子道 : “始從鹿野苑, 終至跋提河, 於是二中間, 未嘗說一字.” 是眞實語.
부처는 일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49년을 머무시면서 중생의 근성根性을 따라 병病에 맞는 약藥을 주셨으니, 권 權과 실實, 돈頓과 점漸, 반자교半字敎와 만자교滿字敎, 편교偏敎와 원교圓敎 등의 일대장교一大藏敎가 다 이 ‘일 없는 법’입니다. 중생은 시작없는 때로부터 심의식心意識의 부림을 당해왔건만, 부림을 당하면서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반야회상般若會上에서 ‘제법諸法은 공상空相이다’ 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눈․ 귀․ 코․ 혀․ 몸․ 의식과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법 등이 모두 공空으로서, 헛되이 이름만 있을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궁극에 가서는 이름도 또한 공空이요, 공空도 또한 얻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예전부터의 선근善根 종성種性이 있다면, 다못 얻을 수없는 곳을 향해서 죽어 심의식心意識이 쉬어지면, 바야흐로 석가 노인이 말한 “처음 녹야원 (鹿野苑)에서 마지막 발제하 (拔提河)에 이르기까지 단 한 글자도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이 이 진실한 말임을 알 것입니다.
禪不在靜處, 不在鬧處, 不在思量分別處, 不在日用應緣處. 然雖如是, 第一不得捨卻靜處․鬧處․日用應緣處․思量分別處參. 忽然眼開, 都 是自家屋裏事.
선 (禪) 은 고요한 곳에 있지도 않고, 시끄러운 곳에 있지도 않으며,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 있지도 않고, 일상생활의 연緣(조건)에 응應하는 곳에 있지도 않습니다. 비록 그렇기는하나, 제일의제第一義諦는 고요한 곳․ 시끄러운 곳․ 생각하여 분별하는 곳․ 일상생활에서 연에 응하는 곳을 버리고서는 참구參究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홀연히 눈이 열리면, 전부가 이 자기집 속의 일입니다.
今時士大夫學道, 多是半進半退. 於世事上不如意, 則火急要參禪, 忽 然世事遂意, 則便罷參. 爲無決定信故也. 禪乃般若之異名. 梵語般若, 此云智慧. 當人若無決定信, 又無智慧, 欲出生死, 無有是處.
오늘날 사대부士大夫들이 도道를 배움에, 대개가 반 걸음쯤 나아가다 다시 반 걸음 물러납니다. 세상의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급하게 참선禪을 필요로 하다가, 홀연히 세상 일이 뜻대로 되면 곧 참구하기를 그만둡니다. 이것은 결정적인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禪은곧 반야般若의 다른 이름입니다. 범어인 반야般若는 번역하면 지혜智慧입니다. 당인當人이 만약 결정적인 믿음이 없다면, 또 지혜도 없는 것이어서, 생사를 벗어나고자 함에 옳은 곳이 없습니다.(그리 될 수 없습니다.)
- 대혜보각선사법어 (大慧普覺禪師法語) 제19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