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농(心農)、마음의 농사】
【심농(心農)】
.......
불법(佛法), 불교(佛敎)를 한마디로 말해서 삼학(三學)이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 중생(衆生)은 탐진치(貪瞋癡), 탐내는 마음, 또 썽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이 탐진치 세 가지의 옳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평생을 살고 세세생생(世世生生)을 또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을 돌이켜서 삼학(三學)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삼학은 계 ‧ 정 ‧ 혜(戒定慧) 이것을 삼학이라, 석 삼(三)자 배울 학(學)자 삼학(三學)이라 그러고 탐진치(貪瞋癡)를 삼독(三毒)이라 그러는데, 삼독을 돌이켜서 바꾸아가지고 삼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삼학에 첫째는 곕니다, 계(戒).
계율(戒律), 오계(五戒)와 십계(十戒), 또는 비구(比丘) 이백오십계(二百五十戒), 또는 보살(菩薩) 십중대계(十重大戒)와 팔...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 이런 계가 있는데, 이 계(戒)는 ‘몸으로 지키는 계’와 ‘마음으로 지키는 계’가 있습니다. 근데 이 계를 몸과 말과 마음을 올바르게 가져나감으로 해서 계를 지키고, 그 다음에 정(定)은, 우리의 마음이 항상 그 탐진치 삼독으로 훨훨 불이 타가지고 안정(安定)을 얻지 못하고 노상 둥둥 떠다니고 노상 치닫고 잠시도 딱 고요히 안정되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參禪)을 해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한 곳에 안정을 시킴으로 해서 그, 자기의 그 본성(本性)을 찾는 것입니다.
참선을 해서 정(定)을 닦음으로 해서 그래서 자기의 본성을 깨닫는데, 비유를 들어서 말하자면, 계(戒)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定), 선정(禪定)은 그 ‘물’, 그 그릇에 물을 담는 거와 같고, 그래서 계기(戒器)요, ‘계의 그릇’이요, 정(定)에 수(水)요, ‘선정에 물이다’ 그 말이죠? 물에... 그리고 혜(慧) 월(月)이여, 지혜는 ‘달’과 같은 것입니다. 계의 그릇이, 계를 잘 닦음으로서 그 그릇이 깨끗하고 딱 바로 놓여 져야 거기에 맑은 참선의 물을 담을 수가 있습니다. 맑은 물을 담음으로 해서 하늘에 떠있는 달이 그 그릇 안에 물속에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달을, 그 달이 물속에 잘 나타나기를 바래거든 그 물이 맑고 고요해야 하고, 물이 맑고 고요하게 잘 담기게 할랴며는 그릇이 깨끗하고 그릇이 바로 놓여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戒)와 정(定)과 혜(慧)는 항상 셋이 같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계만 있고 정이 없고... 없어서는 혜가 이룰 수가 없고, 혜(慧)만을 바래면서 정(定), 선정을 닦지 않고 계율(戒律)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계와 정과 혜 삼학(三學)은 삼위일체(三位一體)인 것입니다. 세 가지가 한 체(體)인 것입니다. 셋이, 계(戒) 있는 곳에는 정과 혜가 있고, 정(定)이 있는 곳에는 계와 혜가 있고, 혜(慧) 있는 곳에는 정과 계가 있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는 항상 동시(同時)요 한, 한 뭉텡이인 것입니다.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하면 참선(參禪)을 해야 하고, 바른 참선을 허고자 하면 계율(戒律)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앞으로 올바른 부처님 제자로서 바르게 살아가고 바른 지혜를 얻어서 영원한 깨달음과 행복을 얻고자 하거든, 맨 먼저 부처님의 계율(戒律)을 잘 지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지 아니하고 바른 깨달음을 얻고자하는 것은, 저 산에 나무에 올라가가지고 물속에서 사는 고기를 구하는 거와 마찬가진 것입니다. 또 모래를 쪄가지고 밥을 맨들랴고 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모래를 솥에다 넣고 불을 지핀다 하더라도 그 모래는 밥이 되지 아니한 거와 마찬가집니다. 또 좋은 집을 지을랴면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래 우에나 질컥벌컥 헌 그 굳지 않는 땅에다가 아무리 설계를 잘해서 훌륭헌 집을 지은다 해도 그 집은 얼마가지 못해서 기둥이 가라앉고 벽이 갈라지고 집이 쓰러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오늘 타시는 계율이 얼마만큼 소중하고 필요한 것인가를 여러분은 잘 아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불살생(不殺生).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둘째 불투도(不偸盜), 도둑질을 허지 말아라.
자기 물견 아닌 것을 취(取)허지 말아라.
셋째 음행을, 사음(邪淫)을 허지 말아라.
자기의 아내나 자기의 남편이 아닌 사람과 방사(房事)를 허지 말아라. 자기남편 자기아내 아니헌 사람과 사랑을 하게 되며는 그것은 괴로움을, 피차(彼此)에 이 괴로움과 불행(不幸)을 가져오고 가정을 파탄(破綻)시키고 사회를 혼란허게 맨들고, 그래서 마침내 자기도 불행하고 남도 불행하고 가정도 불행하고 사회도 시끄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음을 허지 말어라.
또 넷째는 거짓말을 허지 말어라.
거짓말 하며는 진실, 진실성(眞實性)을 잊어버려서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기 때문에 어떠헌 직업을 갖건 진실허지 못하면 자기는 설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허지 말어라.
다섯째는 술을 마시지 말어라.
술을 마시게 되며는 차츰 과음(過飮)을 허게 되고, 술취헌 마음상태에서 말을 허게 되면 실수를 허게 되고, 아무래도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믿어주질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술을 많이 먹게 되면 머리가 나빠지고 결국은 중독이 걸리게 되며는 폐인(廢人)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는 이상 말한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 또 ‘도둑질을 허지 말아라.’ ‘사음을 허지 말아라.’ 또 ‘망어를 허지 말아라.’ ‘술을 먹지 말아라.’ 이 다섯 가지 계율을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산목숨을 왜 죽이지 말어야 하냐?
산목숨을 죽이게 되면 자기 자비심(慈悲心)을 손상(損傷)하게 되아.
도를 성취하고, 아까 자각 ‧ 각타 ‧ 각만(自覺 ‧ 覺他 ‧ 覺滿), 스스로 자기가 깨닫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허고, 깨달은 사람으로 온 법계(法界)가 가득 차게 허려는 이런 세 가지의 큰 목적이 이 우리 불법(佛法)의 목적(目的)인데, 그 목적을 달성 헐라면 첫째 자비심(慈悲心)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살생을 허게 되며는 그 자비심이 없어져버려. 그러니 도(道)를 이룰 수도 없고, 도를 이룬다고 해도 무엇을 위한 도냐 이 말이여. 그래서 불자(佛子)는 마땅히 자비... 살생(殺生)을 하지 말고 자비심(慈悲心)을 길러야 한다.
또 불자는 마땅히 도둑질 허지 말아라.
불... 불자는 스스로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고 모... 각, 각만(覺滿)이 되도록 허는 것이 목적인데 남의 것을 훔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여. 남의 것을 훔치는 이 도둑질을 하며는 복덕(福德)을 손상(損傷)을 해. 복(福)이 있어야, 복... 복력(福力)이 있어야 내 덕(德)을, 복덕(福德)이 있어야 나의 모든 좋은 영향적... 영향력(影響力)을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서 배고픈 사람은 배불리 허고, 배부르게 해주고, 옷이 없는 사람은 옷을 주어서 따뜻하게 하고, 집이 없는 사람은 집을 주고, 병(病)든 사람에게는 약(藥)이 되아 주고, 이 보살행(菩薩行)이라고 허는 것은 참 중생(衆生)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목숨까지도 다 바추... 바치면서 베풀면서 그리해서 모든 중생을 제도(濟度)허는 것이 궁극(窮極)에 목적(目的)인데 어찌 남의 물건을 훔칠 것이냐? 남의 물견을 훔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내 것을 남에게 보시(布施)허는 그러헌 정신(精神)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에 사음(邪淫)을 허지 말아라.
사음을 허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내 몸과 마음을 청정(淸淨)하게 가져서, 청정하게 가져야 자기도 도를 이룰 수가 있고 또 다른 사람도 제도를 헐 수가 있지, 내 몸과 마음이 청정허지 못허고 더러운 상태에서 어떻게 남을 청정허게 할 수가 있습니까? 결국은 도(道)는 ‘자비(慈悲)’와 ‘복덕(福德)’과 이 ‘청정(淸淨)한 이 마음’이 모두가 도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고 그것이 도를 이루는 바탕이 되는데, 어찌 몸과 마음을 부정(不淨)허게 가질 수가 있느냐? 그래서 그 셋째에 가서는 사음을 허지 말어라 그런 거지요.
넷째에 가서 망어(妄語)를 왜 허지 말어야 허냐?
망어를 허면 진실(眞實)한 마음을 손상(損傷)하게 되아. 도를 이룰랴면 앞에 말한 세 가지에다가 또 이 ‘진실한 마음’이 바탕이 되아서 도를 이루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제도(濟度)허게 되는데, 거짓말을 풀풀해가지고 스스로 진실성(眞實性)을 잃어버리게 되면, 자기도 도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진실치 못한 사람의 말을 누가 믿어주며 어디 가서 중생을 제도를 헐 수가 있겠느냐 그 말이여. 그래서 거짓말을 허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항상 진실한 행동과 진실한 말과 진실한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에 가서 술을 먹지 말아라.
세속에서 살랴며는 남녀 간에 다 이 술을 마시게 되고 술을 권(勸)하게 되고 이러는데, ‘하 이 오계를 받어서 술을 먹지 말아라 한 계를 받게 되면 이제 술은 입에다도 못대겠다. 이것 참 오계 중에 고놈 하나는 뺐으믄 좋겠다.’ 그러헌 말을 허는 분도 있는데, 그래도 부처님께서는 ‘술을 먹지 말아라’ 헌 계율을 다섯 가지의 계(戒) 속에 그 ‘술을 먹지 말라’고 허는 조목(條目)을 넣으신 데에는 큰 뜻이 있는 것입니다. 술을 마시게 되면 지혜를 손상을 해. 술을 계속,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다가, 또 나중에는 술이 술을 먹다가, 마지...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까꾸로 먹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다, 다 자기 제정신으로 술을 먹고 권허고 그러지만, 차츰 주기(酒氣)가 돌게 되면 자기도 막 먹고 남도 무리허게 권허고 해가지고 술이 술을 먹게 되고, 나중에는 제정신을 완전히 잃게 되면 그 술이 사람을 먹어버리게 되아서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헌 나날이 계속이 되면 나중에는 중독(中毒)이 걸리고 술을 안 먹고는 배기지를 못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부터서 마시고, 그 술이 꺼지기, 주기가 가시기 전에 또 마시고, 가실랔 허면 목이 쪼끔 마를라하면 또 홀짝 마시고 홀짝 마시고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하루 종일 아주 술이 취해가지고 그렇게 되아 가지고 혀는 꼬부라지고 두 다리는 헛발질을 하고 허는 말은 이치(理致)에 합당(合當)하지 않는 말을 하게 되고, 그러헌 사람이 장사를 하면 옳게 하겠습니까, 사업을 허면 옳게 허겄습니까, 무슨 정치를 허면 옳게 허겠습니까? 결국은 이 술이라 하는 것은 세속(世俗)에서 참 아주 끊기 어려우면서도 이 술 때문에 눈이 나빠지고 술 때문에 심장이 나빠지고 제일 두려운 것이 술 때문에 간이 나빠지고 술 때문에 사람이 자기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우리 하근기(下根機) 중생들에게는 ‘술을 먹지 말어라’ 한 계율은 대단히 중요한 계율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지금 사람을 죽이며 도둑질을 허며 사음을 허며 누가 거짓말 쓸데없이 풀풀 헐 사람이 있겠습니까? 다 그러헌 앞에 말한 네 가지는 어지간한 사람이면, 설사 계를 받지 안 해도 산목숨을 죽이기를 다 싫어하고, 또 도둑질을 허라고 해도 헐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 사음도 역시 마찬가지고, 거짓말도 누가 쓸데없이 거짓말 풀풀하고 댕기겠습니까? 그러나 이 술은 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그걸 먹은 것이 별로 죄가 안 되리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도를 닦고자하는 사람은 이 술을 참 삼가헐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율은 형식적으로 지키는, 몸띵이 형식적으로 지키는 계가 있고 마음으로 지키는 계 두 가지로 말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몸띵이로 지키는 계는 소승계(小乘戒)고 대승계(大乘戒)는 마음으로 지키는 계인 것입니다. 실지로 ‘저 놈을 내가 죽이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었어도, 실지로 죽이지만 아니 허면 그 소승계는 범한 것이 안 됩니다. 그러나 대승계는 이미 마음속에 ‘그를 죽이리라’고 마음 먹었다하면 이미 대승계는 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도둑질이나 사음이나 그런 것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실지로 도둑질을 안 하고 속으로 마음으로 ‘저걸 내가 기어코 훔치고야만 말리라.’ 하고 마음을 먹었어도 기회가 안 닿던지 어찌 중간에 마음이 ‘에이 내가 그래서는 안 되겠다.’ 허고 안... 안했다면 그건 소승계는 범(犯)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마는, 대승계는 이미 한 생각 도둑질 할 마음을 냈을 때 대승계는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승계는 차라리 지키기가 쉬웁습니다. 대승계는 한 생각 탁 일어나면 이미 범한 것이 되기 때문에 대단히 지키기가 어렵고 또 이 차원(次元)이 높은 계인 것입니다. 우리 하근기(下根機) 중근기(中根機), 우리의 말... 말법(末法)에 우리 이 초학자(初學者)들에 있어서는 첫째 이 소승계, 몸띵이로 지키는 계부터서 철저히 지키고 나아가서는 마음으로 지키는 대승계 까지도 잘 지킬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승계와 소승계를 우리는 아울러서 잘 지키는 그러헌 최상승(最上乘) 정법학자(正法學者)가 되아야 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
_______
지금부터서 그 오계를 지키면서 부처님 제자로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허기 위해서 닦아가는 화두법문(話頭法門)을 설하겠습니다. 불명(佛名)을 이제 타신 분이나 또 화두(話頭)를 타신 분이나 오계(五戒)를 받고자 하신 분도 다 같이 들으시면 좋습니다.
이 자(字)는 보일 시(示)잡니다.
보일 시(示), ‘보인다’ 그 말이여. 이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쓰여져 있습니다. ‘김 아무개에게 보인다, 아래와 같은 공부하는 법을 보여드린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한 물견이 여기에 있으니, 한 물견이 여기에 있으니
상재동용중(常在動用中)호되,
항상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되, 몸을 움즉거리고 정신(精神)을 쓰고 허는 그 가운데 이 한 물견이 항상 있다 그 말이여.
(동용중수부득(動用中收不得))
그런데 그 몸을 움즉거리고 정신을 쓰고 허는 그 가운데에 그놈을 찾으면 얻을 수가 없어. 분명히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있는데 그놈을 거두어 찾을랴고 허면 얻을 수가 없다. 눈으로 볼랴고 해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 잡을랴고 해도 잡히지도 않고 생각으로 아무리 그놈을 알려고 해도 알 수가 없더라.
(시심마是甚麽?)
그러니 이놈이, 이것이 무엇인고? ‘이 무엇고?’
‘이 무엇고?’ 한문(漢文)으로는 ‘시삼마(是甚麽)?’인데, 우리말로는 ‘이것이 무엇인고?’인데, 줄여서 ‘이 무엇고?’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예”하고 대답을 허는 그 대답헐 줄 아는 놈. 욕 허면은 퍼르르 썽을 내는데 그 썽낼 줄 아는 놈. 칭찬허면 기뻐허는데 그 기뻐헐 줄 아는, 다치면 아픈데 그 아플 줄 아는 놈, 배가 고프면 아- 배고픈, 밥 먹을 줄 아는 놈, 한 생각 악하게, 악(惡)한 생각이 일어나면 독사(毒蛇)와 같은 마음이 나는데, 나찰귀(羅刹鬼)와 같고 독사와 같은... 같이 되는데 또 한 생각 탁 돌이켜서 착하게 먹으면 또 천사와 같... 천사(天使)가 되기도 헌다 그 말이여. 찰나(刹那) 간에 독사도 되기도 하고 찰나 간에 천사도 되기도 하는 그러헌 신기(神奇)하고도 묘(妙)하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놈이 우리 모두 가슴 속에 있어. 그놈을 썽이 날 때도 냉큼 돌이켜서 ‘이 뭣고?’ 슬픈 생... 슬픈 일을 당해도 냉큼 돌이켜서 ‘이 뭣고?’
중생들은 뭐 하나 기분이 나쁘면 이 생각 저 생각 점점 더 생각에 생각을 더 펴가지고 점점 속... 속이 상해나가고, 또 누가 미우면 쪼끔 잘못헌 점이 있으면 과거에 몇 해 전에 있었던 일까지 이 생각 저 생각 기억을 더듬어가지고 점점 그 사람을 미워허고, 그래서 그러는 법이고, 도(道)를 닦는 사람은, 지혜(智慧) 있는 사람은 언짢은 일을 당하더라도 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다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냉큼 ‘이 뭣고?’ 이래버리거든. 누가 미운 짓을 해도 냉큼 생각을 돌이켜서 ‘이 뭣고?’ 해버리면 구태여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욕을 하고 때리고 속상하는 소리를 해가지고 그 사람과 다툴 필요도 없는 것이여.
그래서 도를 안 낚... 안 닦는 사람은 사소한 일로 해서 점점 죄를 짓게 되고 왠수를 맨들고 시끄럽게 맨들고 남과 왠수를 맺게 되는 거고 집안을 결국은 수라장(修羅場)으로 맨드는 거고, 이 도를 닦는 사람은 여간해서 그런 환경에 휩쓸리지를 아니하고 냉큼 돌이켜서 ‘이 뭣고?’를 허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어. 남을 원망(怨望)헐 필요도 없고 언제나 마음속은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사는, 또 귀빈(貴賓)을 맞이해서 사는 그런 마음, 항상 천당(天堂)이나 극락(極樂)에서 사는 그러헌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노를 젓고 갈 때에 노 젓는 사람이 노 젓기에 따라서 동쪽으로도 가고 서쪽으로도 간 거와 마찬가지니, 도 닦는 사람은 자기가 한 생각을 잘 조정 험으로서 자꾸자꾸 승화(昇華) 되아가고 도가 깊어지는 것이고, 도를 안 닦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눈을 보면 보는, 봄으로 해서 죄(罪)를 짓고, 뭣을 들으믄 들음으로 해서 점점 이 번뇌(煩惱)의 불집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다.
최상승법. 이 한마디 ‘이 무엇고?’는 이 한마디 속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팔만대장경, 해인사(海印寺)에 그 팔만대장경 판(板)이 있는데 그 놈을 목판(木板)에다가 찍어 놓면 수천 권(卷)이 되는데 그놈을 읽을 수 있습니까? 읽어도 다 해석도 못하지요. 그러나 ‘이 뭣고?’ 한마디를 허면 팔만대장경을 한 번 다 읽은 거와 똑같해여.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부르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는 공덕(功德)이 다 말로써 표현헐 수가 없지만, ‘이 무엇고?’ 한번 허는 공덕이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600만번) 한 공덕보다도 더 낫다. 아미타불을 육백만 번 헐라며는 백일 동안을 계속 불러야 하는데, ‘이 뭣고?’ 한번 허는데 일초도 안 걸립니다. 그만큼 ‘이 뭣고?’는 공덕이 장한 것입니다.
왜그러냐? ‘이 뭣고?’는 ‘이 뭣고?’ 헐 때에 당장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진리(眞理)를 바로 실천(實踐)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여기서 어느 목적지에 갈라며는 기차를 타고, 어디 행 기차를 타고 가서 내려가지고 그 다음에 버스를 타고 얼마를 북쪽으로 가다가 뭐이 나오면 ~헌다’ 그래 적혀있는 노정기만 자꾸 읽고 있는 사람과, 즉접 그런 것을 다 알아가지고 당장 한 걸음 출발하는 사람과의 관계와 마찬가지고, 밤낮 농업(農業), 농사짓는 법을 책으로 연구하고 해봤자 그 배가 부른 것이 아닙니다. 당장 논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서 밥을 지어가지고 밥을 바로 입에다 떠 넣는 것입니다, ‘이 뭣고?’는. 당장 밥을 떠서 입에다 넣어서 깨물라 먹으며는 배가 부르지만, 밤낮 책만 펴가지고 농사(農事)짓는 법(法)만 연구해가지고 언제 그것이 배가 부르겠습니까?
우리 자신이 농사짓는 법을 잘 연구를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농사를 짓는 법도 있지만, 이미 농사 잘 짓는 법 아는 사람과 같이, 그 사람과 같이 농사를 짓기고, 이미 다른 사람이 농사 지어논 놈을 갖다가 밥을 해서 딱 놔주면 입에다 떠 넣어준 것입니다. ‘이 뭣고?’허라고 가리켜 준 것은 밥을 여러분의 입에다 떠 넣어준 거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씹어서 삼키기만 허면 되는건데 입에다 이렇게 떠 넣어주어도 패앗타(뱉어) 버리고 씹지도 않고 샘키지 안는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힘으로도 어찌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 뭣고?’ 한번 해보세요. ‘이 뭣고?’
(대중): ‘이 뭣고?’
‘이 뭣고?’ 한번 할 때마다 여러분은 씹어서 삼키는 거와 같애요. 그래서 ‘이 뭣고?’에 이것이 법(法)의 양식(糧食)입니다. 법(法)의 양(糧)이여. 도(道)에 양식이거든. 그래서 이 법에 양식을 부지런히 먹고 잘 씹어서 삼키면 여러분은 도를 성취를 하는 것입니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 심(心)자 농사 농(農)자 ‘심농(心農)’이라 그런 것입니다.
———
부처님께서 하루는 수행하실 때에 들녘을 지나는데, 어느 불법(佛法)을 믿지 않는 바라문(婆羅門)이 그 부처님이 탁발(托鉢)을 허시니까,
“밥을 못주겠다.”
“왜 못주느냐?”
“우리는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지어가지고 이렇게 먹지만, 당신네들은 농사도 안 짓고 장사도 안하고 밤낮 서늘한 그늘 속에 앉아서 있다가 때만 되면 거저 밥을 얻어먹으러 오니, 우리는 공밥 묵는 사람에게는 밥을 줄 수가 없다. 이 피땀 흘려서 농사지은 것을 어찌 당신들한테 줄 수가 있겠느냐?” 헌게 부처님 말씀이,
“당신만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 나도 농사를 짓소. 당신보다도 더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소.”
“어찌 도(道)를 닦는 사문(沙門)이 거짓말을 허요?”
“아 거짓말이 아니여. 당신네들은 몸띵이를 가지고 몸띵이를 맥여 살리는 양식을 가꾸는 농사를 짓지마는, 우리는 영혼(靈魂)을 해탈(解脫)케 하는, 도를 이루게 하는 마음에 농사를 짓는다. 당신이 짓는 농사를, 짓는 농사 양식으로는 먹어봤자 하루 밲에는 참을 수가 없지만, 우리 마음에 농사는 금생(今生) 뿐만이 아니라 영원(永遠)을 두고 배부리는 그런 농사를 짓는 것이고, 당신네 농사는 당신 밲에는 배가 부르지 않지마는 우리 마음에 농사는 우리 스스로도 영원히 배부리고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목마르고 배고픔을 면(免)케 하는,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하는 마음에 농사를 짓는 것이요.” 이렇게 말씀을 허셨습니다. 그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에 감동이 되아서 보리심(菩提心)을 발(發)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농사는 마음에 농사야. 농사는 짓는 때가 있고 그 때를 타서 열심히 해야지, 씨만 심어놓고 가꾸지를 안 허면 그 농사는 폐롱(廢農)을 하게 됩니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때맞춰서 땅을 갈고 모 자리를 해서 그놈을 때맞춰서 심고, 그래가지고 농약을 주고 비료를 주고 그래가지고 그 피땀을 흘려서 농사를 짓게 되는데 그걸 등한(等閑)히 해보십시오. 벌레가 다 묵어버리고 물을 맞춰서 주지 아니허면 말라죽거나 물에 너무 오랫동안 잠기며는 병(病)이 생기고, 그렇게 해서 수확(收穫)을 거두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심는 것도 중요허지만, 심는 것 보다 더 중요헌 것은 잘 가꾸는데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농사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여러분은 오늘 그 농사짓는 모 자리에 씨를 심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부지런히 가꾸아서 때맞춰서 잘 가꾸고 가꾸고 나가... 나가야지 일시(一時)라도 등한히 해버리면 벌레가 와서 침식(侵蝕)을 하게 되고 말라죽거나 떠죽거나 그렇게 해서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道)도 잠시도 등한히 허면 그렇게 안이비(眼耳鼻)... 육근(六根)을 통해서 팔만사천(八萬四千) 마군(魔軍)이가 이 도(道)를 이루지 못하도록 호시탐탐(虎視眈眈)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군이가 왜 우리 도 닦는 것을 방해를 치냐 하면, 도인(道人)이 생겨나면 자기네 설 땅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군(魔軍)이의 궁전(宮殿)이 흔들리게 되고 마군이가 소탕(掃蕩)이 되아서 마군이 살 곳이 없기 때문에, 마군이가 자기 설 땅을 지키고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도 닦는 사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방해(妨害)를 놓는 것입니다. 그 마군이를 항상 우리는 잘 대항(對抗)해서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 이 심왕국토(心王國土)를 잘 지켜나가고, 나가야만 우리는 도(道)를 성취(成就)를 헐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마군이는 눈을 통해서 들어오고, 귀를 통해서 들어오고,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몸띵이를 통해서 들어오고,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들어올랴고 허는 그 찰나(刹那)에, 이미 들어와버리면 쫓아내버리기가 어려운데 들어올랴고 헐 때 딱 그놈을 문을 닫아 걸어야 돼. 무슨 생각이던지 일어날 때 무엇이 눈을 통해서 들어올 때 어떠헌 사... 사물이 귀를 통해서 들릴 때, 코를 통해서 들어오고 입을 통해서 들어오고 몸띵이를 통해서 들어올 때에 바로 그 즉시(即時) ‘이 뭣고?’ 이렇게 헌다면 마군이가 우리의 국토(國土)에 발을 디디지 못하고 물러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입니다. 별로 재미가 없는 것 같지만 자꾸 해보면 말로써 표현헐 수 없는 법(法)에 낙(樂)이 있는 것입니다. 법에 기쁨이 있어. 해본사람만이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열심히 허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전날의 자기가 아닌 딴 사람으로 성장 또 향상(向上) 되아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해탈도를 향해서 우리는 정말 부지런히 닦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세속(世俗)에 다 직업이 있지만, 이 ‘이 뭣고?’ 내가 나를 닦는, 나의 영혼을 갖다가 해탈(解脫)케 하는 이 직업이 정말 우리의 본업(本業)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저 이 몸띵이를 살찌게 하고, 또 의식주(衣食住)를 위해서 다 필요헌 것이기는 허지만, 그까짓 것들이 우리의 영원(永遠)한 영혼을 위(爲)하는 직업(職業)에다 대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 최상승법을 믿는, 실천허는 학자(學者)는 이 참선법(參禪法)을, 참선을 갖다가 본업(本業)으로 알고 그밖에 모든 것을 부업(副業)으로 알고서, 본업과 부업을 열심히 또 충실히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가정이나 우리 개인이나 사회국가에 있어서 정말 충실(忠實)허고자 하면 이 ‘이 뭣고?’ 사업(事業)을 잘해야, 그래야 모든 것이 제대로 되아가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제대로 되아가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정말 훌륭허게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루어져봤자 별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정말 우리는 몸과 목숨을 다 바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몸 바칠 곳은 오직 이것뿐인 것입니다.
_______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고,
가부좌(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 한번 앉아보세요. 가부좌 또는 반가부좌. 가부좌를 할 때는 몸을 단정히 허되 너무 힘을 주어가지고 뒤로 자지바지 하거나 어깨에다 힘을 주거나 목에다 힘을 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단정(端正)허면서도 힘은 다 빼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아금니는 지긋이 물고,
또 혀는 위로 꼬부려서 저 입천장에다 꼬부려 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은 평상(平常)으로 떠... 뜨되 자기의 자리에서 약 삼매타(3m) 지점에다 눈을 떨쿠는 것입니다. ‘눈을 떨쿤다’ 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한 점을 응시(凝視)허거나 주시(注視)하는 것이 아니고, 본다면 그 점이 보이되 의식적으로는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평상으로 뜨되 뜨고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은 좌우나 저... 전후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두 어깨위에 두 귀가 딱 수직으로 놓이도록 하고, 이렇게 해서 몸을 단정히 헌 다음에,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단전, 배꼽 밑에 아랫배가 볼록해지도록 허고, 숨을 내 쉴 때는 그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들어마신 호흡이 그까지 가도록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고, 그냥 숨은 코로 들어가지만 우리의 생각은 배가 볼록허게만 맨들믄 되아요. 그냥 배를 요렇게 내밀면 되아요. 들어마실 때는 내밀고, 또 숨을 내쉴 때는 배를 홀쪽허게 잡아댕이면 되는 것입니다.
자, 들어마셔 보세요. 배를 볼록 허니 내밀면서 숨을 쑤욱 들어마셔. 들어마셨으며는 하나 ‧ 둘 ‧ 셋 삼초(3초)동안 머물렀다가 또 조용허니 숨을 내쉬는데, 내쉼에 따라서 배를 등어리 등 쪽으로 홀쪽허게 맨드는 것입니다. 또 다 내 쉬었으면 또 스르르르 허니 들어마셔. 그래서 들어마시는 시간은 약 삼초(3초) 동안에 걸쳐서 들어마시고, 들어마셨다가 또 딱 정지를 허는데 정지 허는 시간이 약 삼초(3초). 또 정지했다 또 내쉬는 시간이 약 삼 사초(3-4초), 사초... -쪼끔 긴 듯 헌 것이 좋은 것입니다.- 이렇게 허는데,
들어마실 때에 너무 배가 가뜩 이렇게 들어마시면 안 되아요. 팔부(80%)정도만 들어마시고, 또 딱 정지허는 것도 약 삼초정도만 해야지 너무 오랫동안 참고 있으면 그것도 안 되고, 또 내쉴 때에도 약 팔부정도만 내쉬어야지 배속에 하나도 없을 때까지 완전히 요 뱃가죽이 등어리 가 닿을 때까지 다 내쉴라고 허면 그것도 힘이 들고 무리가 가니까 그래도 안 되고, 그래서 들어마신 호흡도 팔부정도 들어마시고 내쉬는 호흡도 약 팔부정도 들어마셔서 호흡을 허는데 조끔도 무리가 안가도록, 힘이 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마셨다가 삼초(3초) 정지 했다가 내쉴 때 ‘이 뭣고?-’ 이렇게 허는 거여. ‘이 뭣고?-’ ‘이 뭣고?’ 헐 때 배가 차츰차츰차츰 홀쪽해지도록. 다 나쉬었으면 또 수르르 허니 숨을 또 들어마셔가지고 약 삼초동안 머물렀다가 또 내쉬면서 ‘이 무엇고?’ 이렇게 허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에 주욱 허셔 나가면 나중에는 한 달, 두 달, 석 달 이렇게 허다보면 ‘이 뭣고?’를 숨 내쉴 때마다 안 해도 괜찮게 되아요. 숨은 서너 번 헐 때에 ‘이 뭣고?’ 한 번 해놓고서 숨은 서너번 들어마셨다 내쉬었다 해도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참으로 익숙해지면 아침에 ‘이 뭣고?’ 한번 하고 점심때까지 ‘이 뭣고?’는 들지 안 해도 항상 ‘이 뭣고?’ 헌 알 수 없는 의심만 있으며는 그만 그것이 화두를 이미 들어... (녹음 끊김)
... 딱 챙기는 것입니다. 그래 챙겨가지고 또 금방 또 망상(妄想)이 들면 그때 또 ‘이 뭣고?’ 망상이 들어 않고... 들어오지 않고 ‘이 뭣고?’ 헌 알 수 없는 의심이 고대로 딱 있으면, 뭐 ‘이 뭣고?’ 구태여 ‘이 뭣고, 이 뭣고.’ 자꾸 되풀이해서 헐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하루에 십만 독(讀)(10만독) ‧ 이십만 독(20만독) 해서 횟수를 채우기 위해서 염주(念珠)를 부지런히 돌리면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헌데, ‘이 뭣고?’는 그게 아니에요. ‘이 뭣고, 이 뭣고, 이 뭣고, 이뭣고, 이 뭣고’ “‘이 뭣고?’ 한 번 부른 것이 육... ‘관세음보살’ 육백만 번(600만번) 공덕(功德)에 해당이 된다” 그러니까, ‘이놈을 하루에 오만 독을 하며는, 육백만에다 오만을 곱하면 얼마냐. 진짜 이렇게만 허며는 그 몇 일 안가서 툭 터질 거다.’
절대로 ‘이 뭣고?’는 횟수가 문제가 아니고, 그 간절한, 간절(懇切)한 그 의심(疑心). 의심이 나중에는 의단(疑團)이에요. 한 번 화두(話頭)를 들어서 그 알 수 없는 의심 뭉텡이가 고대로 있어가지고 무엇을 봐도 그 의단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무엇을 들어도 흔들림이 없이 알 수 없는 의던... 의단이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앉으나 서나 일을 허나 차를 타거나 누가 옆에서 나한테 욕을 허거나 뭐 억울한 소리를 해도 조끔도 동요(動搖)됨이 없이 화두(話頭)만이 떠억 드러나게 된다면 그 인자 공부가 자리가 잡혀가는 거여. 익숙해지는 거여.
그렇게 해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새벽까지, 잠을 자면 꿈에서도 그 의단(疑團)이 없어지지 않고, 새벽에 눈을 떠도 엊저녁에 들었던 그 화두가 고대로 있게 된다면 그것이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하는 건데, 그 공부가 익숙허게 되아서 그렇게 되아야 머지안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알뜰히 열심히 해야 그러헌 타성일편(打成一片) 지경(地境)이 오는 것인데, 열심히 허지 아니하고 허다 말다가 그저 그래놓고서, ‘아이고 참선 해봤자 되지도 않고, 우리는 근기(根機)가 얕아서 염불(念佛)이나 해야제, 참선(參禪)은 좋은 줄을 알지마는 우리는 죄 많은 중생(衆生)이라 못헌다’고 이러헌 자포자기(自暴自棄)를 허신 분이 있는데 절대로 그렇질 않습니다.
열심히 해서 발심(發心)하고 분심을 가지고, 의심을 내서 이 신심과,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憤心), ‘어째서 나는 과거에 모든 불보살(佛菩薩)과 선지식(善知識)은 이 문제를 해결해서 해탈도(解脫道)를 증득(證得)했는데, 나는 왜 같은 사람으로서 무량겁(無量劫)을 오늘날까지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했는가.’ 속에서 분한 생각이 나고, 그래가지고 도를 아니 닦을라야 아니 닦을 수 없는 그런 분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대의단(大疑團), 대의심(大疑心), ‘이 뭣고?’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고?’ 허는 그 간절한 의심(疑心). 이 세 가지 요소가 동시(同時)에 일어날 때에 우리는 도를, 화두(話頭)를 들랴고 안 해도 제절로 화두가 들어지는 것입니다. 계(戒)를 지킬랴고 안 해도 제절로 계가 지켜지는 것이고, 참선(參禪)을 안 헐라야 안 헐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道)는 그 가운데에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
- 송담선사 법문 306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