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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於此、여기에】

이 뭣고? 2020. 4. 9. 06:00

이 보일 시示 자字, 보일 시示잡니다.

밑에 여러분의 불명佛名이 여기에 쓰여져 있을 것입니다.

시示 김 법륜궁 이라든지, 이 법계성 헌다든지 이렇게 불명佛名이 써져있을 것입니다.

‘아무개에게 다음과 같은 법문法門을 보여디린다’ 해서 이 보일 시示자예요.

무엇일 보이느냐.
첫째 이 원상圓相을 보여 디리는 거야 이렇게.

둥그라미예요. 둥그라민데 이게 원상인데, 이 원상圓相은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부터서 있었고 우주宇宙가 몇 억 광년億曠年이 지낸 뒤에는 우주도 가루가 되아서 없어진 때가 있습니다.

설사 이 우주법계宇宙法界에 일월성진日月星辰과 이 모든 지구地球까지도 다 없어진다 하드라도 이 한 물견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한 물견物件이 어디있느냐’ 하며는, 여러분의 몸띵이 속에 들어있습니다.

또 이 허공계虛空界, 이 허공계에도 가뜩 차있습니다. 어느 조그만한 구석에도 그 한 물견이 꽉 차있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눈을 감으나 눈을 뜨나, 해가 지나 해가 해가 뜨나 언제 어디서라도 그 한 물견은 소소영영昭昭靈靈허게 작용作用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혜智慧의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눈앞에도 있고 우리 의 뒤에도 있고 발밑에도 있고 머리 위에도 있고 우리의 몸 안·밖에 헐 것 없이 꽉 차 있건만 우리는 그것을 보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참선을 이렇게 험으로 해서 그 한 물견이 첫째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되고, 모든 사람의 안에도 그것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 삼라만상森羅萬象 산천초목山川草木 두두물물頭頭物物에도 그 한 물견이라고 허는 것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 깨닫는 방법方法을 지금 부터서 일러드리게 되겠습니다.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한 물견이 여기에 있으니, 

 

여기서 한 물견이라 헌 것은, 그 한 물견을 고인古人네들이 이런 원상圓相으로 표시를 했습니다마는, 사실은 이 원상圓相이라고 하는 상相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득이 해서 이런 원상으로 표현을 헌 것 뿐인 것입니다.

근디 지끔 제가 설명을 드린 바와 같은 그러헌, ‘이름을 뭐라고 붙일 수도 없고 모냥도 그릴 수도 없는 그러한 소소영영昭昭靈靈한 한 물견이 여기에 있다.’

이 ‘여기’라고 허는 것이 무엇이냐?

동용중動用中이여. 

‘움직이고 쓰는 그 가운데에 항상 그 한 물견이 있더라’ 이거여.

육체肉體를 움직이고 정신精神을 쓰고 허는, 모든 육체적인 동작動作과 모든 정신 작용作用 가운데에 항상 그 ‘한 물견’이 있더라 그말이여.

그러면 육체肉體적인 동작動作은 무엇이냐 하며는,
눈으로 보고 · 귀로 듣고 · 코로 냄새 맡고 · 혀로 맛보고 · 몸띵이로 느끼고 · 생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우리의 뜻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허는, 이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허는 모든 동작과 그 정신작용 그 가운데에眼耳鼻舌身意 이 한 물견이 항상 소소영영昭昭靈靈허게 작용作用을 허고 있더라.

 

썽을 낼 때나 · 슬퍼헐 때나 · 기쁠 때에도 바로 그 한 물견의 작용이고, 앉고 · 서고 · 눕고 · 걸어가고 · 일하고 · 밥 먹고 · 옷 입고 · 똥 누고 헌 것도 바로 그 한 물견의 나타나는 동작動作이여.

그런데 그 육체肉体적인 동작動作 · 정신精神적인 작용作用 그 가운데에 거두어 얻지 못해여.

그놈을, 그 한 물견을 찾어 보면 자최가 없다 그 말이여.

분명히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예” 하고 대답했는데,
‘그 대답한 그놈이 무엇인가, 어떻게 생겼는가?’
하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알 수가 없다 그 말이여.

 

눈으로 볼라야 그 모냥을 볼 수가 없고, 귀로 들을라야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고, 손으로 잡어볼라야 잡을 수가 없고, 생각으로 알아볼랴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어.

그러니 대관절 이것이 무엇이냐? 

‘이 무엇고?’

 

언제 어데서 무엇을 허던지 항상 ‘이 무엇고?’거던.
‘이 무엇고?’

속이 상할 때도 ‘이 무엇고?’

슬플 때에도 ‘이 무엇고?’

기쁠 때에도 ‘이 무엇고?’

근심 걱정이 있을 때에도 ‘이 무엇고?’

 

밥 먹을 때에도 ‘이 무엇고?’

걸어갈 때에도 ‘이 무엇고?’

깜짝 놀랬을 때에도 ‘이 무엇고?’

억울하고 분할 때에도 ‘이 무엇고?’

 

‘이 무엇고---?’

‘금방 지금 이뭣고 허고 있는 이놈이 무엇고?’

 

이렇게 찾는 놈을 다시 되돌려 찾고, 그 되돌려 찾은 그놈을 다시 되돌려 찾고, 이렇게 해서 잠시 동안도 그 ‘이 뭣고?’ 그 ‘알 수 없는 의심’을 망각忘却허지 않도록 항상 챙기고 또 챙기고 그렇게 공부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앉어서는 잘 ‘이뭣고?’ 허다가 일어서다가 잃어버리게 허고, 일 허면서도 잘 ‘이뭣고?’를 챙기고 허다가 누가 “아무개!” 하고 부르는 바람에 깜박 놓쳐버리고 그러지만, 놓친 줄 알면 또 챙기고 잃어버린 줄 알면 또 챙기고 해서 자꾸 챙기고 또 챙기고 이렇게 허다보면, 나중에 챙기지 안 해도 저절로 항상 ‘이 뭣고?’ 헌 알 수 없는 의심疑心이 독로獨露허게 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 공부가 익숙해진 증거죠?

들... 처음에는 들랴고 애쓰다가 나중에는 들랴고 안해도 저절로 들리게 되고, 그래도 ‘하! 인자 공부가 잘 되았다.’ 하고 그리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말고, 잘될 수록에 더 정신精神을 가다듬고 ‘이 뭣고?’를 잘 단속團束을 해 나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아침에 새벽에 한 번 든 것이 아침 먹을 때 고대로 있고, 또 점심 먹을 때 까지도 고대로 있고, 또 저녁 멀을 때 까지도 고대로 있고, 밥 먹고 잠 들 때 까지도 고대로 있게 되.

잠자도 꿈속에서도 ‘이뭣고?’가 고대로 있고, 그 이튿날 잠을 딱 깨도 새로 ‘이뭣고?’를 들지 안 해도 엊저녁에 들던 그 ‘이뭣고?’가 고대로 알 수 없는 의심이 따악 있게 되거던.

아무리 안하고 딴 생각 좀 해 볼라고 해도 소용이 없어.

그렇게 그렇게 해서 타성일편打成一片, 아주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간語默動靜에 잠시도 틈이 없이 온전히 ‘이 무엇고?’ 헌 그 의심疑心이 내 마음 속이나 내 몸 밖에... 밖이나 할 것 없이 우주宇宙에 콱 차서 더 이상 간절懇切 헐 수가 없고 더 이상 그 의심疑心이 클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르면 결국은,
그래도 알 수 없는 의심 ‘이 뭣고?’

 

그런 지경에 가면 고요허다고 말을 붙여도 안 맞는 말이고, 깨끗허다고 해도 맞지 않는 말이고, 고요하고 깨끗하고 맑고 청정하고 뭐 ‘내와 우주가 하나’니, ‘우주가 바로 나’니, 그런 소리가 다 소용이 없어.

아무리 옆에서 흔들고 떠들고 막 욕을 해도 조끔도 흔들림이 없게 되거던.

그러다가 그런 상태로 일주일을 가서... 못가서 툭! 터지게 되는거여.

나의 별로에...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공안公案을 갖다가 탁 대도 뭐 의심없이 탁 일르게 되거던!

 

이 공부는 바르게, 그리고 열심히만 허면 누구라도 되는 것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288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