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焦點)】
【돋보기의 초점(焦點)】
불하거해저(不下巨海底)하면
무득무가보(無得無價寶)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불입번뇌해(不入煩惱海)하면
부득일체지(不得一切智)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불하거해저(不下巨海) 허면
무득무가보(無得無價寶)니라.
저 큰 바다 밑에까지 내려가지 아니하면 값없는 보배를, 값없는 보배 구슬을 얻을 수가 없고,
불입번뇌해(不入煩惱海)면
부득일체지(不得一切智)니라.
번뇌(煩惱)의, 그 번뇌의 바다 속에 들어가지 안 허고서는 일체지(一切智)를, 일체지를 얻을 수가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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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묘년(丁卯年) 구 월(9월) 첫째 일요법회를 맞이해서 조실스님의 법문을 들었는데, 「제욕무욕(在欲無欲)이다」 욕심 속에 있으면서 욕심이 없어. ‘참 도(眞道)라 허는 것은 욕심을 끊고서 청청해지는 것이 아니라, 욕심 속에 있으면서 욕심이 없어야 한다.’
소승법(小乘法)은 모든 번뇌를 다 끊고 또 끊고 해가지고 결국은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서 그래가지고 태(胎)속에 들어가지 아니헌 거, 태속에 들어가지 아니험으로서 태어나지 않고 태어나지 아니해야 죽지를 않기 때문에, 그래서 생사를 제일 두려워해서, ‘생사가 없고자 허면 태속, 태중(胎中)에 들어가지 아니헌다’ 해가지고 그래서 그 일체번뇌망상(一切煩惱妄想)을 끊고 또 끊고 해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 말이여. 그런데 대승불법(大乘佛法)은, 특히 이 최상승법(最上乘法)은 욕심(欲心)을 끊, 끊으므로써 욕심이 없고자 허는 것이 아니고 번뇌(煩惱)를 끊음으로써 번뇌가 없는 것이 아니라, ‘번뇌의 속에서, 번뇌에 즉(即)해서 번뇌가 없어야한다’ 그거거든.
흔히 ‘도(道)를 닦을랴면 세속(世俗)을 끊고 산에 들어가야 도를 닦을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허지만, 참다운 도는 세속을 끊고 여의고 또 산중(山中)에 들어가야만 도를 닦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 있으면서 거기에 물들지 아니해. 마치 저 연꽃이 더러운 흙탕물속에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도 그 연잎이나 연꽃에 쪼금도 그 더러운 것이 묻지 아니헌 것처럼, 바로 세속에 있으면서, 세속에 살면서 물들지 아니해야 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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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허면 세속에 있으면서 세속에 물들지 아니헐까?
밥 먹고 옷 입고 일하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그놈을 여의고 따로 고요하고 깨끗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서, 거기에 즉(即)해서 화두(話頭)를 들면 ‘이 뭣고?’ 기쁠 때도 ‘이 뭣고?’ 슬플 때도 ‘이 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 뭣고?’ 몸과 마음이 아프고 괴로울 때도 ‘이 뭣고?’ 이렇게 공부를 지어 들어가야, 그래야 바로 최상승법을 행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닷 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 무가보주(無價寶珠)를 어떻게 얻을 수가 있어. 저 바다는 깊고 깊어서 풍랑(風浪)도 높고 그래서 까딱허면 생명(生命)도 위험하고 그러지만, 무가보주를 얻을랴면 그 생사, 생명에 위험함을 무릅쓰고 배를 타고 저 깊은 바다로 들어가야, 그래가지고 바다 밑으로 잠수를 해 들어가야만 그 보배구슬을 얻을 수 가 있듯이, 생사(生死) 없는 진리(眞理) 그 지혜(智慧)를 얻을랴면 번뇌(煩惱)의 바다 속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생사 없는 최상(最上)에 지혜(智慧)를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무가보주(無價寶珠)는 바다 밑에 있기 때문에 그렇고, 우리의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그 일체지(一切智)는 중생(衆生)의 번뇌(煩惱)바다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지혜가 저 높은 허공에 공중(空中)에 있는 것도 아니요, 높은 산봉우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벼슬이나 명예나 권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중생(衆生)의 번뇌(煩惱)속에, 번뇌 있는 곳에 그것을 여의지 아니하고 지혜(智慧)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중생의 중생심(衆生心),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모든 중생의 마음이 바로 이 깨달음을 얻는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의 체(體)다 그 말이여. 번뇌를 여의고, 중생의 모든 식(識)을 여의고 지혜(智慧)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오식(前五識) 육식(六識) 칠식(七識) 팔식(八識) 그 식(識)을 탁 굴리면, 그놈을 탁 돌이키면 거기에서 네 가지 지혜(四智)가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識)을 여의고 지(智)를 찾아서는 세상없이도 참다운 지혜는 얻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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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부를 해나가는데 있어서 번뇌와 망상 또는 혼침, 이 혼침 산란과 또 화두를 거각해서 정진을 지어가려는 그러헌 문제가 공부를 해나갈랴며는 번뇌망상이 일어나고, 번뇌망상이 조끔 가라앉을만 하며는 혼침이 오고 이래가지고 이 화두가 성성(惺惺)허게 들리지를 못하고 적적(寂寂)허게 나아가지를 못해서, 그래서 이렇게 우리의 공부가 지지부진헌...을 면치를 못한다고 우리는 생각을 헙니다마는, 번뇌와 망상이 그것 때문에 공부를 못헌다고는 생각해서는 아니된 것입니다.
번뇌망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한 것 그 자체(自體)가 바로 그 속에 우리의 깨달을 수 있는 우리의 그 자성(自性)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 자성(自性)의 활동상(活動狀)이 바로 번뇌(煩惱)요 망상(妄想)이기 때문에 그 번뇌망상 그놈을 즉(即)해서 화두(話頭)를 들고 또 들고 나가면 결국에는 화두가 들지 안해도 저절로 들어지게 된 때가 오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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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불착물(參禪不着物)이요
입지요성불(立地要成佛)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긍장생사심(肯將生死心)하야
침매시비굴(沈埋是非窟)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참선(參禪)은 불착물(不着物)이요
입지요성불(立地要成佛)이다.
참선(參禪)은 외형(外形)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여. 말을 안 허고 벙어리노릇을 허는 디에 붙어있는 것도 아니요, 잠을 안자고 앉은뱅이 노릇을 잘 헌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요 밥을 안 먹고 밤낮 단식(斷食)만 헌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여. 밥 먹을 때 먹고, 잠 잘 때 자고, 예불(禮佛)헐 때 예불하고 운력(雲力)할 때 운력허되, 밥을 먹을 때나 똥을 눌 때나 운력을 헐 때나 예불(禮佛)을 헐 때나 어데서 무엇을 허거나 간에 입지요성불(立地要成佛)이여, 바로 서있는 곳에 성불을 해야 한다. 있는 그,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일에 즉(即)해서 전렴(前念) 후렴(後念)이 끊어져버려야 해. 오직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해야한다 그 말이여. 순수무잡(純粹無雜)한 의단만이 독로허도록 그렇게 잡두리 해야만 돼.
그 초점(焦點), 그 초점을 맞추지 아니허고서는 외형적(外形的)으로만 그럴싸 허니 다듬어나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확대경(擴大鏡, 돋보기)으로 불을 일으키는데 그 햇볕이 쨍쨍 날 때 그 확대경을 가지고 초점(焦點)을 잘 맞춰서 나무나 헝겊에다 갖다가 초점을 딱 대며는 금방 연기가 폴폴폴폴 나면서 불이 일어나는데, 그 초점을 맞추지 아니하면 하루 종일 확대경을 들고 햇볕에 돌아 댕겨봤자 불은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앉아서 끙끙 앓고, 밥을 굶고 탈탈 굶고 앉었고, 잠을 안자고 밤새 설쳐대도, 그 화두(話頭)를 드는 데에 있어서 그 묘(妙)한 의심관(疑心觀)의 그 초점(焦點)을, 그 너무 급허지도 않고 너무 느슨허지도 않게, 그것이 불급불완(不急不緩)이거든. 불급불완으로 그 의단의 그 초점을 갖다가 탁 이렇게 맞춰야 되거든. 그게 묘관(妙觀)이거든.
- 송담선사 법문 338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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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如植種於空、終不得生、糞壤文地、乃能滋茂。
또 마치 허공에 씨앗을 심으면 영원히 싹이 나지 못하고, 똥의 기름진 흙에서 비로소 무성하게 생장할 수 있는 것과 같다.
如是入無爲正位者、不生佛法、起於我見如須彌山、猶能發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生佛法矣。
이와 같이 무위의 정위에 들어간 사람은 불법을 생장시키지 않는다.
아견을 수미산만큼이나 높게 일으키면 오히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켜 불법을 생장시킬 수 있다.
是故當知,一切煩惱,為如來種。譬如不下巨海,不能得無價寶珠。如是不入煩惱大海,則不能得一切智寶。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일체번뇌는 여래의 씨앗이다. 비유하면 큰 바다밑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값없는 보배를 얻을수 없다. 이처럼 번뇌 대해를 들어가지 아니하면 곧 일체 지혜의 보배를 얻을수 없다.
- [유마경]
* 사지(四智): 성소작지(成所作智), 묘관찰지(妙觀察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