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따름과 구함 없음》
《二入四行:두 가지 들어감과 네 가지 행.》
夫入道多途,要而言之,不出二種。
一是理入,二是行入。
대저 도에 들어감은 많은 길이 있으나 그것을 요약해서 말하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이입理入이요, 둘째는 행입行入이다.
理入者,謂藉教悟宗,深信含生凡聖同一真性,但為客塵妄覆,不能顯了。若也捨妄歸真,凝住壁觀,自他凡聖等一,堅住不移,更不隨於文教,此即與理冥符,無有分別,寂然無為,名之理入。
이입理入이란, 교教에 의지하여 종지宗旨를 깨달음을 이르는 것이며, 생명있는 모든 범부와 성현이 동일同一한 진성真性을 지니고 있으나 다만 객진客塵의 망妄에 뒤덮혀 있으므로 능히 드러내지 못할 뿐임을 깊이 믿는 것이다.
行入者,所謂四行。其餘諸行悉入此行中。
何等為四,一報冤行,二隨緣行,三無所求行,四稱法行。
행입行入이란, 네 가지 행을 이르는 것이다.
그 나머지 모든 행은 다 이 행 가운데 들어간다.
어떤것을 네 가지라 하는가.
첫째는 보원행이요, 둘째는 수연행이요, 셋째는 무소구행이며, 넷째는 칭법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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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행》
云何報冤行:修道行人,若受苦時,當自念言我從往昔,無數劫中,棄本從末,流浪諸有,多起怨憎,違害無限,今雖無犯,是我宿殃惡業果熟,非天非人所能見與,甘心忍受,都無冤訴。
무엇을 일러 보원행報冤行이라 하는가.
도를 닦아 행하는 사람이 만약 괴로움을 받을 때에 마땅히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나는 아주 오래된 때로부터 셀 수 없이 한량없는 세월 가운데에 근본根本을 버리고 지엽枝葉적인 일만을 좇아서 모든 존재를 유랑流浪하였으며, 많은 원망과 증오심을 일으켜 남에게 어긋진 해害를 끼친것이 한限이 없다.
지금은 비록 범하지 않았으나 숙세宿世의 재앙인 악업의 과보가 익었기 때문이지, 하늘이 준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준 것도 아니며 짓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함께 드러난 것이니(내가짓고 내가 받는것이다)달게 여기는 마음으로 인내하여 받아들이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결코 없다.” 라고 한다.
經云:逢苦不憂,何以故,識達本故。此心生時,與理相應,體冤進道,是故說言報冤行。
경에 이르기를, “괴로움을 만나도 근심하지 말지니 왜그런가하면, 식識으로서 근본根本을 통달通達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생生할 때에 이치와 더불어 상응相應하면
원망의 체體로서 도道에 나아가게되니 이런 까닭에 설하여 말하길 보원행報冤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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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행》
第二隨緣行者:眾生無我,並緣業所轉,苦樂齊受,皆從緣生。若得勝報榮譽等事,是我過去宿因所感,今方得之,緣盡還無,何喜之有。得失從緣,心無增減,喜風不動,冥順於道。是故說言隨緣行。
두 번째 수연행隨緣行이라는것은, 중생은 나라는것이 없어서(無我) 모두가 업業의 구르는 바를 연緣하여 고통과 즐거움을 받나니 이는 모두가 연緣을 좇아서 생生하는 것이다.
만약 영예로움 같은 수승한 일의 과보를 얻었다하여도 이것은 내가 과거 전생에 맺은 인因이 감응된 것일 뿐이니, 지금 비로소 그것을 얻은 연緣(조건)이 다하면 무無로 돌아가거늘 어찌 그것에 기뻐함이 있으리요.
연緣을 좇아서 얻기도 잃기도하나 마음은 늘어나고 줄어듦이 없으며, 기쁨의 바람이 불어도 동요됨이 없이 도道에 명합冥合하여 따른다.
이러한 까닭에 설하여 말하길 수연행隨緣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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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구행》
第三無所求行者:世人常迷,處處貪著,名之為求。智者悟真,理將俗反,安心無為,形隨運轉,萬有斯空,無所願樂。功德黑暗,常相隨逐。三界久居,猶如火宅,有身皆苦,誰得而安。了達此處,故於諸有,息想無求。經云:有求皆苦,無求則樂。判知無求,真為道行。
세 번째 무소구행無所求行이란것은, 세상 사람은 도리를 미혹하여 곳곳마다 탐착하니 그것을 일러 ‘구함’이라 한다.
진리를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은 그 이치가 오히려 세속과 반대이니, 무위無為에 안심安心하며 형形은 흘러감을 따르나니 만유萬有는 이 공空이라 즐거움을 원할 바가 없다.
공덕녀와 흑암녀는 항상 서로를 쫓아 따른다.
삼계에 오래도록 살아가는것이 오히려 불타는 집과 같으니 몸이 있음에 모두가 고통인데 누구라서 편안하겠는가.
이곳(此處)을 요달了達한 까닭에 모든 소유所有에 대하여 생각을 쉬어버려 구함이 없다.
경에 이르기를, ‘구함이 있음은 모두가 고통이요 구함이 없으면 즐거움이다’하였다. ‘구함 없음(無求)’을 분명하게 아는것이 진실로 도행道行에 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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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법행》
第四稱法行者:性淨理體,目之為法,此理眾相斯空,無染無著,無此無彼。經云:法無眾生,離眾生垢故,法無有我,離我垢故。智者若能信解此理,應當稱法而行。
法體無慳,於身命財,行檀施捨,心無悋惜,達解三空,不倚不著,但為去垢,攝化眾生,而不取相,此為自立,復能利他,亦能莊嚴菩提之道。檀施既爾,餘五亦然。為除妄想,修行六度,而無所行,是為稱法行。
네 번째 칭법행稱法行이라는것은, 성품은 깨끗한 이치의 체体라고하는 그러한 안목으로 법을 삼나니, 이 이치는 중생衆生의 상相이 모두가 공空하여 더러움도 없고 집착함도 없으며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다.
경에 이르기를, ‘법에는 중생이 없으니 중생의 때를 여의었기 때문이며, 법에는 나 있음이 없으니 나라는 때를 여의었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지혜있는 자가 만약 이 도리를 믿어 이해할 수 있다면 응당應當 법에 계합契合하여 행한다.
법의 본체에는 아까워함(慳)이 없는 것으니,
신체나 목숨, 재물까지라도 보시하는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세 가지가 원래 공함(三空: 보시하는 사람과 보시를 받는 사람, 그리고 보시하는 물건)을 요달하여 기대지도 않으며 집착하지도 않나니, 다만 번뇌의 때를 벗어버리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함이니 거기에 상相을 낼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을 뜻을 세우고, 다시 능히 타인을 이롭게하며, 또한 능히 보리의 도를 장엄한다.
보시의 공덕이 이와 같으므로 다른 다섯 가지(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계) 바라밀 또한 그러하다.
망상번뇌를 제거하기 위하여 육바라밀다의 행을 수행해 나가지만 실로 행한다는 생각까지도 없음, 이것을 일러 칭법행(법에 계합하는 행)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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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求扇無益
愧我痴無智
令人徃返忙
虛堂曲木上
久坐生微凉
- 함허 涵虛
【부채를 구해도 이익이 없다.
나의 어리석고 지혜없음 괴로워
사람으로 하여금 갔다 왔다 분주하게 하다가
빈 집 굽은 나무에 올라
오래도록 앉았으니 조금은 서늘해지네.
無所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