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一念相應 一念佛, 일분 앉으면 일분 부처】

이 뭣고? 2023. 1. 22. 19:47

아까 조실스님 법문에, 신심, ‘신심(信心)이 철저(徹底)해야 한다’고 허는 말씀을 허셨는데, -이 활구참선은, 무슨 종교나 다 신심을 다 말허지만- 특히 이 활구참선은 철저한 신심이 없고서는 이건 불가능한 것입니다. 무슨 신심이냐? 「내가 원래 부처다」고 허는 그 신심이 철저해야해. 잠시 매(昧)해서 그렇지 바로 나를 깨달르며는 ‘내가 바로 부처라고 허는 철저한 신심’이 선행(先行)되아야 한다 그 말이여.



부르면 대답헐 줄 알고 욕하면 썽낼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만 알면, ‘썽낼 줄 아는 그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아는 바로 이놈이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찾기가 좋아. 막연허게 어디 잡초 밭을 헤지고 돌아댕이는 것도 아니고, 저 깊은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바다로 들어가서 바다, 잠수복을 입고 들어가서 찾는 것이 아니거든. 앉었을 때는 앉은 대로 찾고, 누웠을 때는 누운 대로 찾고, 밥을 먹을 때는 밥 먹으면서 찾고, 뭘 볼 때는 보면서 찾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가 바로 참 나를 찾는 바로 선불장(選佛場)이거든.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일 분 동안 앉으면 일 분 동안 부처요, 십 분 동안 앉으면 십 분 동안 부처요, 한 시간 앉으면 한 시간에 부처요, 하루를 앉으면 하루에 부처요, 일 년을 앉으면 일 년에 부처요, 일생동안을 앉으며는 일생동안 부처다.」 물론 좌(坐)에만 국집(局執)해서 앉었기만 헌다고 부처, ‘아 그러면 주로 많이 앉어야겄다. 앉으면 부처라니까 앉었기만, 우두거니 앉었기만 허면 되겠다.’ 이렇게 생각허실 분은 안 계시겠습니다마는,

‘앉는다’고 허는 말 가운데에는,



자세(姿勢)를 바르게 하고, -척추를 주욱 바로 세우고, 어깨의 힘을 다 빼고, 목에 힘도 빼고, 눈을 평상으로 뜨되 너무 뚝 부릅뜨거나 감지 말고 평상으로 따악 뜨되 의식적으로 어느 한 점을 응시(凝視)허거나 주시(注視)허는 것이 아니여. 눈을 뜨되 의식적(意識的)으로 아무것도 본 바는 없어야 돼.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허는 거고-

자세를 바르게 했으면 호흡(呼吸), -바른 호흡을 해야 하는데 단전호흡(丹田呼吸)이거든. 숨을 들어마실 때에는 단전(丹田) 하복부(下腹部)가 볼록해지도록 하면서 숨을 천천히 들어마시고, 다 들어마셨으며는 잠깐 멈추었다가 서서히 코로 숨을 내쉬되, 내 쉼에 따라서 볼록해진 배를 차츰차츰 홀쪽허게 맨들어. 다 나갔으면 또 수르르르허니 들어마셔. 들어마시는 것도 항상 그 들어마신 호흡에 따라서 배가 볼록해지고 내 쉴 때는 배가 차츰차츰 홀쪽해 진 것을 「의식허면서」 호흡을 허는 거여. 배가 나왔다 들어갔다 헌 것을 「의식허면서」 호흡을 허게 되면 우리의 생각이 머리에, 머리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복부로 생각이 내려가기 때문에 머릿속은 상기(上氣)도 가라앉고 머리가 복잡한 것도 없어지고 머리가 시원해지거든. 그래서 머리로 무엇을 많이 생각허고 연구를 허면 기(氣)가 위로 올라가서 상기증세(上氣症勢)가 있고 골치가 아프고 피로(疲勞)허는데, 단전호흡(丹田呼吸)을 함으로 해서... 허면 우리의 생각이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에 기(氣)가 내려가서 피로도 회복이 되고 머리도 시원해지고 편안해진 것이다 그 말이여.- 이것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두 번째 호흡을 바르게 하고,

세 번째 가서 마음을 골라. -생각을 바르게 갖는 것인데, 생각을 바르게 허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우리의 생각을 바로 가질 수가 있느냐 하며는, 숨을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화두(話頭)를 들거든. ‘이 뭣고?’ 하고 생, 속으로 ‘생각 없는 생각으로 생각을 하라.’ 사량분별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다못 ‘이 뭣고?’하고 그 「의심(疑心)만을 거각(擧却)허는 것」이여. 숨이 다 나가면 또 수르르르 허니 들어마셨다가 잠깐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뭣고?’ 알... ‘이 뭣고?’한 글자 석 자(字)가 문제가 아니라 ‘이 뭣고?’ 했을 때 그 알 수 없는 의심! 그것을 관해야 하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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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華經云 種種性相義 我及十方佛 乃能知是事 聲聞及緣覺 不退諸菩薩 皆悉不能知 卽是門前三乘也

『법화경』에 이르시되,  “갖가지 성性과 상相의 의義는 나와 시방의 부처님이라야 이 일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성문이나 연각, 불퇴전 보살 등은 모두 알 수가 없는 것이다”라 하심이 곧 이 문 앞의 삼승三乘이라.


爲未明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爲三乘同有厭苦集 樂修滅道之心 未明苦集本唯智起 不了滅道本自無修無造無作

’이 법이 법위法位에 주住해서 세간상世間相이 상주常住한다‘ 함을 밝히지 못함으로 해서 삼승三乘은 모두 고苦와 집集을 싫어하고 멸滅과 도道 닦기를 즐기는 마음이 있는 것이니, 이는 고苦와 집集이 본래로 다만 지智의 일어남인 줄을 밝히지 못함이요 멸滅과 도道가 본래로 스스로 닦음이 없고 지음이 없는 줄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化諸群品 如幻住世 性絕無明 則是佛故 一念相應一念佛 一日相應一日佛 何須苦死要三僧祇 但自了三界業能空業處 任運接生 卽是佛也

변화하는 모든 중생[群品]은 환幻이 세상에 머무름과 같으니, 성性이 무명(無明)을 끊으면 이 부처인 까닭이라. 《일념一念이 상응相應하면 일념의 부처[一念佛]요, 하루가 상응하면 하루의 부처[一日佛]이니, 어찌 모름지기 한사코 삼아승기[三僧祇]를 요要하겠는가?》 다만 스스로 삼계의 업業을 요달了達하여, 능히 업業의 처소가 공空하여 인연에 맡겨[任運] 중생을 제접(提接)할 수 있다면, 곧 이 부처인 것이라.


- [신화엄경론] 제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