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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화상蒙山和尙이 대중大衆에게 보이시기를】

이 뭣고? 2021. 4. 23. 17:37

몽산화상(蒙山和尙)이 대중(大衆)에게 보이시기를




고고산정보보진(高高山頂步步進)헌디

호랑백수수감근(虎狼百獸誰敢近)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심심해저서서행(深深海底徐徐行)한디

파도불고교룡녕(波濤不顧蛟龍獰)이로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고고산정보보진(高高山頂步步進)데

높고 높은 산꼭대기를 향해서 한 걸음 한걸음을 나아가는데,

 

 

호랑백수수감근(虎狼百獸誰敢近)고

호랑이와 여러 가지 짐승들이 앞을 가로막고 뒤에서 협박하고 여기서 저기서 모다 나오는데 감히 누가 가까이 헐 수가 있겠느냐?

 

 

심심해저서서행(深深海底徐徐行)한디

깊고 깊은 바다 속을 보물을 건지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걸음 서서히 가는데,

 

 

파도불고교룡녕(波濤不顧蛟龍獰)이다.

파도가, 집 덩어리 같은 파도, 산 덩어리 같은 파도가 치면서 바닷물도 함께 이리 뒤집어졌다 저리 뒤집었다 한데, 그 바다 속에는 교룡(蛟龍)과 같은 그 억세고 사나운 그런 바다 밑에 독룡 독사들이 그렇게 우글대는데, 그것까지도 불고(不顧)하고 목적을 향해서 바다 밑을 나아간다. 

 

이 게송(偈頌)은 발심(發心)해가지고 화두(話頭)를 타가지고 정진(精進)해나가는 그 상황을 이러헌 게송으로 표현헌 것입니다.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마치 그 높고 험악헌 산꼭대기를 향해서 네 발로 기어서 올라가고 나무뿌리 풀뿌리와 바위 모다 그런 것을 열 손가락으로 버티면서 올라가는데 가시덤불이 우거지고, 그런 까딱하면 미끄러져서 한 걸음 올라갈라다가 두 서너 걸음 미끄러져 내리고 또 간신히 포기허지 아니하고 또 조심스럽게 올라가고 헌 그런 디다가 비... 그런데 그 산만 험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호랑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종류에 짐승들이 가로막고 해꼬자 할랴고 달라드는데 그런 것 까지도 두려움 없이 목적을 향해서 올라간 거와 같다. 바다 밑에 그 보물, 보, 보배구슬을 건지기 위해서 파도와 독룡 독사와 교룡 그런 것, 그러헌 위협도 불고하고 보배구슬을 건지기 위해서 그 수십 길 바다 밑, 밑바닥을 향해서 걸어가는 거와 같다. 

 

참선수행(參禪修行)이 안 해본 사람은 조용하고 그, 그런 선방(禪房)에서 자세를 바르게 하고 심호흡(深呼吸)을 하면서 ‘이 뭣고?’ 화두를 들고 하며는 그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무슨 뭐 신선(神仙)이나 마찬가지지, 공기도 좋고 모다 그 해준 공양(供養)에 그 시간 맞춰서 수도생활(修道生活) 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고 편안하고 인간 신선처럼 그렇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실지(實地)로 선방에 들어가서 정진(精進)을 허는데 지끔 게송으로 읊은 그러헌 상황이 얼마든지 우리는 부딪힐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 장애도 없이 그저 편안허고 고대로 해나가다 툭 깨친 그러헌 것은 이론상에나 있지 실지로 해보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되는 듯, 때로는 확 변해가지고 또 영 화두가 안 들리고, 몸이 뒤틀리고 아프고 십 분 이십 분이 한 시간 두 시간보다도 더 지루하고 골이 아프고, 또 조끔 조용해질 만 하며는 눈 뚜껑이 천근(千斤)이나 되게 누르고, 그 눈을 억지로 뜨고 잠을 참을라고 허며는 뭐라고 표현헐 수 없는 그런 것은 약과고, 실지로 한 철 두 철 차츰차츰 해가다 보며는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차라리 머리를 기둥이나 돌 벼람빡에다가 짓쳐서 죽어버리고 싶은 그러헌 충동이라고 허까, 그러헌 상황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출가(出家)해가지고 독신생활(獨身生活)을 허는 거, 그런 피상적인 그러헌 어려운 것은 저 뒤끝 문제고, 실지로 공부를 실(實)다웁게 해나가는데 있어서 열심히 허고 깊이 들어갈 수록에 한량없는 의아심(疑訝心)도 나올 수가 있고, 공포심(恐怖心)도 일어날 수도 있고, 짜증도 일어날 수도 있고, 퇴태심(退怠心)도 일어날 수도 있고, 그러헌 고비 고비를 어렵게 어렵게 해나가는데 갖인 유혹이 또, 한 철 두 철 지내다보면 말로써 헐 수 없는 유혹(誘惑)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헌 고통과 공포와 의아심과 유혹을 물리치고 한결같이 십 년, 이십 년 내지 일생동안을 수행을 해나가는 수행자들은 알고 보면 정말 머리 숙여서 존경헐 만한 그러헌, 설사 확철대오(廓徹大悟)해서 대도인(大道人)이 안 되았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 분이 대도(大道)를 성취했단 것을 모른다 하더라도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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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실스님 열반하신 뒤에 벌써 이십오 년(25년)이란 세월이 지냈습니다. 처음에 이 법보전(法寶殿)을 짓고 또 저 선방(禪房)을 짓고 헐 때에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선방에, 선방을 짓기 위해서 주춧돌만 갖다놨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들으니까 주춧돌만 갖다놓고 아직 공사가 채 시작되기도 전인데 거기서 뭔 이야기소리가 도런 도런 도런 들린다 그 말이여. 그래서 ‘이상하다’ 하고 가만히 살살 가봤더니, 나한(羅漢)님들이 그 모여서 이야기를 허시, 허신데, 내용을 들어본 즉슨은, 저 다른 절에 나한전(羅漢殿)이 다 헐고 비가 새고 해서 그것을, 그 절 헐, 허물어지게 되아서 그래서 그 나한님들이 여기 오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인자 여기서 우리가 잘 지내자.” 그래서, 그러고 인자 눈을 떴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게 꿈인데, ‘틀림없이 용화사(龍華寺)가 앞으로 선방을 허며는 십육나한(十六羅漢)이나 오백나한(五百羅漢)과 같은 그러헌 나한님네들이 여기 와서 정진을 허시게 되겄구나!’ 

 

그래서 선방에 오신 스님네들이 아무리 그분이 잘났거나 못났거나 유식허거나 무식허거나, 때로는 대중의 법도를 좀 어기고 그런 일이 있거나 문제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보통 평범한 뭐 보잘 것 없는 스님네가 왔, 왔다고 생각허지 않고 ‘정말 부처님당시의 십육나한(十六羅漢)이나 오백나한(五百羅漢), 천이백(千二百) 모다 대중(大衆), 그런 디에 준(準)헐만한 바로 그때 그 스님네들이 우리 절에 와서 공부를 허시러 오시거니’ 이렇게 내가 마음을 먹고 ‘성의(誠意)를 다해서 잘 모셔야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비단 이 용화사뿐만이 아니고, 위봉사가 되았건 세등선원이 되았건 또는 승련사나 팔정사나 회룡사나 어느 절 선방에 오신 수좌스님네들도 다 여기서 지내던 스님네가 또 저쪽 선방으로 가고 저쪽 선방에서 지내신 분이 또 이쪽에 오기도 헌 것이어서, 일단 걸망을 짊어지고 선방에 댕인 스님네들은 다 나한(羅漢)님이여. 나한님이고, 현재 나한이고, 앞으로 성불헐 그러헌 소중한 분들로, 주지(住持)스님이나 원주(院主)스님이나 공양주(供養主) 채공(菜供) 별좌(別座) 도감(都監) 그런 스님네들도 그런 마음으로 스님네들을 잘 외호(外護)를 해드려야 허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험으로서 그런 소임(所任)을 가진 분들이 소임을 다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정성(精誠)으로 외호를 잘 험으로서 스님네들도 참 여러 가지로 마음에 혹 안든 점이 있다 하더라도 참 철저하게 정진(精進)을 잘 허시게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속담에는 대중, 방부를 들이고 참선하는 수좌스님네의 입장에서 보면 ‘원주나 주지 같은 거 제대로 된 주지 원주가 없다.’ 그렇게 생각 한다는 거고, 주지나 원장이나 원주 공양주 그런 입장에서 보면 ‘수좌 같은 수좌가 요새는 없다’고, 또 이렇게도 말 헌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산승이 보기에는 두 생각이 다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수좌의 입장에서는, 대중스님네의 입장에서는 혹 밥이 제대로 안되고 찬이 제대로 안 된다 하더라도 그것도 소중허게 생각하고, ‘부처님 당시에는 걸식(乞食)을 칠가식(七家食)을 해서 그놈을 얻어가지고 와서 한 끼, 사시공양(巳時供養) 한 끼씩만 허신 그것을 생각헌다면 이것도 너무너무 우리가 너무 잘먹는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하고, 또 소임을 보는 주지나 원주 도감 별좌의 입장에서는 그 절 형편 닿는 한 최선을 다해서 잘, 공양을 잘해서 올리되, ‘이것 가지고는 너무너무 우리가 부족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스님네가 이것을 공양을 하시고 열심히 공양을 해주시니 참 감사’허게 생각하고, ‘어떻게 허면 더 잘해드릴까? 스님네가 무엇을 원하신가?’ 이렇게 생각하고 피차 그렇게 생각을 해나가야 그 선방에 장애가 없고 좋은 진짜 명실공(名實共)히 훌륭한 선객(禪客)스님네들이 그 절에 오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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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산화상(蒙山和尙)이 대중(大衆)에게 보이시기를, 

 

약유내차(若有來此)하야 동감적요자(同甘寂寥者)ㄴ댄, 

못(다못) 대중이 한 회상(會上)에 모여가지고 같이 참선수행(參禪修行)을 할, 함에, 

 

사차세연(捨此世緣)하고, 

세속에 모든 인연(因緣)을 다 버려버리고, 

 

제거집착전도(除去執着顚倒)하고, 

집착전도, 잘못된 생각, 입중오법(入衆五法)을 제외한 쓸데없는 생각을 다 버려버리고, 

 

진실위생사대사(眞實爲生死大事)하야, 

진실로 생사대사(生死大事), 오직 생사대사만을 위해서, 

 

긍순암중규구(肯順菴中規矩)하고, 

그 선원에 청규(淸規)를 자발적으로 잘 지키며, 

 

절단인사(截斷人事)하고, 

인사를 다 끊어버려. 일단 방부를 들이고 결제(結制)를 허면 모든 인사(人事)가 다 끊어지는 거여. 옛날은 은사스님이 돌아가시거나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일절 그런 부고(訃告)가 와도 사무소에서 딱 간직허고 있다가 해제(解制)허거든 그때사 부고장을 보였습니다. 요새도 혹 그런 데가 있는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만큼 한번 방부를 들이면 모든 인사를 다 끊어야 하고 모든 시비(是非)와 집착전도(執着顚倒)와 모든 인연(因緣)을 다 끊어버리고 한철을 하루와 같이 그렇게 지내야 하는 것입니다. 

 

수연수용(隨緣受用)호되, 

먹고 입고 잠자고 허는 모든 수용(受用)은 인연(因緣) 따라서 해. 죽이면 죽, 밥이면 밥, 국수면 국수, 찰밥이면 찰밥, 밥이 좀 되면 된 대로, 질면 진  대로, 반찬이 좀 짜면 짠 대로,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싱거우면 간장을 조끔 더 치고, 짜면 물을 좀 더 쳐서, 아무 불평불만(不平不滿)이 없이 고대로 먹어. 짜면 짜다고 짜증내고, 싱거우면 ‘이따구로 반찬을 했다’고 짜증을 내고, 밥을 먹을라다가 밥을 확 덜어버리고 안 먹고, 이렇게 성질을 써가지고서는 참 도량신장(道場神將)에도 부끄러울 일이고 제석천왕(帝釋天王)한테도 부끄러운 일이고 불보살(佛菩薩)에게도 부끄러운 일이고 신도한테, 단월(檀越)에게도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한 생각을 돌이키지 못하며는 백 가지 장애가 일어나는 법이여. 

 

제삼경외(除三更外)에는 불허수면(不許睡眠)하고, 

아홉시(9시)에 자며는 세시(3시)에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 선원(禪院)의 규칙상 ‘우리가 한 시간씩 덜 자고 정진을 허자’, ‘한 시간씩 더 일찍 일어나자’, 그렇게 대중적으로 합의(合議)를 모아서 그렇게 허기로 허면 또 그대로 순응(順應)을 허는 거고, 삼경(三更)을 제외하고는 수면(睡眠)을 허지 말아라. 일체 잠을 자지 말아라.

 

그리고 불허출가(不許出街)

결제 중에 일주문(一柱門) 밖에 나가서, 나가지 말어라 이거거든. 일주문 밖에 나가게 되면은 자연히 안 볼 것을 보게 되고 안 들을 것을 듣게 되니까, 생각을 거기에 팔리게 되니까 화두가 순일허기가 어려운거고, 그래서 거리에 나가지 말아라. 

 

불허부청(不許赴請)호되, 

공양(供養)을 청장(請狀)해도 나가지 말아라. 스님네가 결제 중에 고생허신다고 신심 있는 신도가 공양을 청허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 디에도 가지 말어라 이것입니다. 그 신심으로 초청하는 그 신도한테는 미안허지마는 거기 가서 여러 가지로 잘 장만해서 공양을 올린 그 신도는 대단히 복(福)을 받을 것이나, 한철을 방부를 들이고 정진허는 스님네에는 맛맛으로 ‘어, 우리 가서 잘 먹고 오자’ 대중이 그렇게 얘기헐 수도 있습니다마는, 용화사는 그렇게 처음에는 했습니다. 허고 보니 여러 가지로 공부에 지장이 있고 문제점이 있어서 지금 안 허기로 했습니다. 안 허니까 아무 일이 없습니다. 

 

또 목욕날에는 또 시내에 나가서 목욕을 허도록 했었습니다. 그날은 자율정진(自律精進)이라 해가지고 나가서 목욕만 하고 고대로 오는 것이 아니라, 여기 병원에도 가고 뭐 어디도 가고 여여 허다보니 그러고 밤 저녁때에사 들어오게 되니, 그러고 그 이튿날 정진을 헐라고 허니 그 전날 이리저리 쏴댕이다가 오니 그것도 정진에 장애가 있고 문제가 일어나더라 그 말이여. 그래서 사중(寺中) 안에다가 대중목욕탕(大衆沐浴湯)과 같이 그저 이 목욕탕을 지었고, 될 수 있으면 나가지 않고서 이 석 달 동안을 일주문 밖에 안 나가고 정진헐 수 있도록, 그래서 썩 잘허지는 못했어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 별 일이 없습니다. 

 

또 반살림 때는 ‘석 달... 한 달 반 동안 정진하느라 애썼으니까 저 어디 도봉산(道峯山)이나 뭐 저... 좀 멀더라도 산을 한 번씩 타고 오면 좋다.’ 또 대중스님네가 그렇게 허자고 해서 그렇게도 해봤습니다. 그렇게 해보니 그것도 또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여칸 청규대로 ‘일주문 밖에는 특별한 중병(重病)이 들어서 병원에 가지 않고서는 안 될 만한 일이 없는 한은 일주문 밖에는 나가지 않도록 허자.’ 이렇게 또 청규(淸規)를 만들았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너무 대중을 억압을 하고 감옥에, 교도소에 죄수처럼 무슨 죄 지었다고 그렇게 너무 행동을 갖다가 억압을 하고 규제를 헌 것이 너무 심허지 않느냐? 목욕탕에도 한 번씩 갔다 오고, 등산도 한 번씩 가고, 그런 정도는 괜찮지 않겠느냐?’ -또 강화도에 땅을 마련해가지고 청정채소를 허기 위해서 채소밭을 만들았습니다. 거기는 가끔 우리가 먹어야 할 채소를 재배허기 때문에 거기는 한 두 번 가서 운력 겸 바람 쐬기 겸해서 거기에는 한 번씩 단체적으로 갔다가 단체적으로 요렇게 돌아오도록 그렇겐 허고 있습니다마는- 법규(法規)라 하는 것이 자발적으로 그 법규내용을 이해를 하고 여법허게 정진허는 마음으로 자진해서 헌다면 구속이 안 되는 거고, 그것을 이해를 못하고 억압으로 생각헌다며는 정말 이 못 견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이신 분들은 다 충분히 이해를 하시고 자발적으로 청규를 잘 지키는 그런 분들이라고 생각이 되어서 너무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할 것은 없지마는, 새로 방부를 들인 신참도반(新參道伴)들이 꽤 많으시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된 것입니다. 

 

 

미유발명(未有發明)이어든 불허간독(不許看讀)이요,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견성(見性)을 해서 선지식(善知識)의 인가(印可)를 받은 뒤가 아니며는 경(經)도 보지 말어라. 염송(拈頌)이나 그런 어록(語錄)도 보지 말어라 이것입니다. 인가를 받은 뒤에는 [전등염송(傳燈拈頌)]도 봐야하고 경전(經典)도 봐야하고 유불(儒佛), 유교(儒敎)나 도교(道敎)나 그런 제자백가지설(諸子百家之說) 까지 라도 다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역량(力量)을 넓혀서 멀리 그리고 높이 날을 수가 있다 이겁니다. 

 

비공계청(非公界請)이어든 불허열경(不許閱經)이다. 

대중적으로 용화사의 경우는 큰 재(齋)가 들면 선방(禪房)스님네를 초청(招請)을 해서 <금강경(金剛經)>을 읽어주십소사 하는 그런 특별한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묵묵히 이 법당(法堂)에 올라오셔서 다 같이 <금강경>을 일, 일부러 이렇게 독송(讀誦)허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마는, 그런 때를 제외하고는 경전도 보지 말어라 이것입니다. 

 

[여법하삼년공부(如法下三年工夫)호대 약불견성통종(若不見性通宗)인댄 산승山僧이 체이(替爾)하야 입지옥(入地獄)호리라]

이렇게 삼 년(3년) 동안을 여법(如法)허게 정진(精進)을 허며는, 그렇게 허고도 약불견성통종(若不見性通宗)인댄, 견성(見性)해서 종지(宗旨)를 통달(通達)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대중을 대신해서, 너희를 대신, 대신해서 지옥(地獄)에 들어가리라. 몽산(蒙山)스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허신 것입니다. 앞에 말한 그러헌, ‘그와 같이 여법허게 수행을 헌, 삼년동안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확철대오를 못하며는 내가 거짓말한 것이 되니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내가 지옥에 가겠다.’ 얼마나 간곡한, 정말 우리 후래(後來) 수행자들을 위해서 참 눈물겨웁도록 간곡한 법문이, 법문을 해주신 겁니까? 그러니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앞에 말씀드린 바와 같은 그러헌 청규와 법도 하에서 몸과 목숨을 바쳐서 정진을 해야 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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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두는 염송(拈頌)이나 그밖에 문헌(文獻)상(上)에 오른 것이 천 칠백(1700) 공안(公案)이라 그러는데, 사실, 실제로 말하면 이 세계에 가뜩 차있는 것이 화두 아닌 것이 없는 거여. 그러나 문헌상에 오른 것만 해도 천칠백측공안(千七百則公案)이다 그러는데, 산승은 그 천칠백측공안 가운데에 최초(最初)의 화두요 궁극(窮極)에 화두요 모든 화두에 근원(根源)이 되는 것이 바로 「시삼마(是甚麽) 화두」여. ‘이 뭣고?’다. ‘이 뭣고?’ 한문으로 허면 ‘시심마(是甚麽)’ 그러기도 허고 ‘시삼마’ 허고, 중국 발음으로는 ‘시 씀마’그러는데,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인데, 경상도에 사투리로는 ‘이 뭐꼬?’거든. ‘이 뭐꼬’ ‘이 뭐꼬?’가 ‘이것이 무엇인고?’ 그 말이여. ‘이 ‧ 것 ‧ 이 ‧ 무 ‧ 엇 ‧ 인 ‧ 고?’ 일곱잔데 ‘이 뭣고?’하면 석자로 줄여지는데, 간결하면서도 그 화두의 그 뿌리가 되는, 핵(核)이 되는 의심(疑心)이 잘 드러난다고 그래서 ‘이 뭣고?’ ‘뭣고?’

 

그래서 ‘이 뭣고?’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냐 하며는, ‘이 몸띵이 끌고 다니는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놈.’ 그걸 뭐 ‘마음(心)이다’, ‘성품(性品)이다’, ‘자성(自性)이다’, ‘불성(佛性)이다’, 경전에 따라서는 뭐 ‘법계(法界)다’, 또 ‘무저선(無底船)이다’, ‘무공저(無孔笛)다’, 또 ‘한 물견(一物)이다’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만, 그 이름은 경(經)에 따라서, 나라에 따라서, 지방에 따라서, 이름이 수천수만 가지 이름이 있으나 그 이름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불러봐. ‘아무개야!’ 불러보면, ‘예!’허고 대답허는데 그 ‘예!’ 하는 그놈이 무엇이냐 이거거든. 

 

그게 뭐 입에서 나오니까 입이냐? 입이, 입이냐? 입도 아니고, 목구녁에서 나오니까 목이냐, 목젖이냐, 혀냐? 그러헌 것이 아니고, 그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놈’이 있거든. 그건 해부(解剖)를 해봐도 보이지도 안 허고 뭐 엑스레이(X-ray)를 통해서 봐도 그건 보이지 않는 거여. 도저히 그것은 눈으로 볼라야 볼 수 없고, 또 손으로 잡을라야 잡을 수 없고, 우리의 사량심(思量心)으로 아무리 알랴고 해도 알 수가 없어. 그런데 분명히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놈이 있거든. 그놈이 썽낼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도 알고, 그놈이 착하게 쓰며는 천사와 같기도 하고, 고약하게 쓰게 되며는 악마가 되고 나찰(羅刹)이 될 수도 있어. 그놈이, 결국은 그놈을 보고 그놈을 깨달으면 부처님이 되는 거고, 그것을, 그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놈을 깨닫지 못허면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허면서 갖인 고통을 받을 수밲에 없는 것이다 그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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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시중명극측(十二時中明極則)하고

제불무비등한득(諸佛無非等閑得)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단종철벽은산투(但從鐵壁銀山透)하고

불문여하우약하(不問如何又若何)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십이시중명극측(十二時中明極則)이다.

십이시(十二時), 지금은 하루를 이십사시(二十四時)라고, 사시간이라고 하지만, 옛날 자축인묘(子丑寅卯)로 허며는 십이시(十二時)ㅂ니다. 아침저녁 십이시(十二時) 중(中)에 명극칙(明極則)이다. 극칙(極則)은 ‘이 뭣고?’여. ‘이 뭣고?’ 알라야 알 수 없는 이 본참화두(本參話頭) 그 하나를 참구(參究)허고 그 하나를 밝히는 데에 총 전력투구(全力投球)를 허라 그 말이거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간에 오직 알 수 없는 의심 ‘이 뭣고?’ 초학자(初學者)는 숨을 들어마셨다 내쉬면서 ‘이 뭣고?’ 이렇게 익혀 들어가면 화두와 빨리 친화(親和)가 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중에 익숙해지면 들어마실 때나 내쉴 때나 전혀 그런 것에 구애(拘礙)받을 건 없고, 

 

 

제불무비등한득(諸佛無非等閑得)이다.

모든 부처님, 과거 현재 미래에 모든 부처님이 등한히 도를 얻은 것이 아니다. 한 분도 그럭저럭 지내갖고 견성성불허신 분은 없다 이것입니다. 

 

 

단종철벽은산투(但從鐵壁銀山透)여.

다못 철벽을, 쇠로 된 벽에 딱 부딪힌 것처럼, 은(銀)으로 된 산에 딱 부딪힌 것처럼, 갈라야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고 뒤로 물러설라야 물러설 수도 없고 좌우를 돌아봐야 꼼짝 달싹 할 수가 없는 그러헌 절박한 상황에서 무엇을 생각허겄냐 그 말이여. ‘어떻게 허면 내가 여기서 살아나가느냐?’ 허듯이,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무엇을 허더라도 오직 알 수 없는 이 일건대사(一件大事), 생사해탈(生死解脫)하는 이 화두(話頭) 하나만이 항상 현전(現前)허도록 그렇게 잡두리 해나가. 

 

 

불문여하우약하(不問如何又若何)다.

여하약하(如何若何)를 묻지 말아. 공부가 잘되느니 못되느니, 방이 더우니 추우니, 날씨가 좋으니 궂으니, 일체 딴 생각을 잠깐도 헐 겨를이 없이 오직 공안 하나만, 본참공안 하나, 이 뭣고? 헌 사람은 ‘이 뭣고?’ 무자화두(無字話頭)를 허는 분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판치생모(板齒生毛)를 하는 분은 ‘어째서 판치생모(板齒生毛)라 했는고?’ 전,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를 하는 분은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알 수 없는 의단(疑團)만이 독로(獨露)해야지 사량분별로, 의리(義理)로, 아까 조실스님 법문에도 의리선(義理禪), 모다 그... 에 대한 말씀을 허셨지만, 사량분별이나 이론이나 경전이나 어록이나 어디서 본, 보고 들은 걸 가지고 그놈을 가지고 이리저리 따지고 더듬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여. 알 수가 없어야 해. 

 

- 송담선사 법문 62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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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산화상(蒙山和尙)이 대중(大衆)에게 보이시기를, 

약유내차(若有來此)하야 동감적요자(同甘寂寥者)ㄴ댄, 사차세연(捨此世緣)하고, 제거집착전도(除去執着顚倒)하고, 진실위생사대사(眞實爲生死大事)하야, 긍순암중규구(肯順菴中規矩)하고, 절단인사(截斷人事)하고, 수연수용(隨緣受用)호되, 제삼경외(除三更外)에는 불허수면(不許睡眠)하고, 불허출가(不許出街), 불허부청(不許赴請)호되, 미유발명(未有發明)이어든 불허간독(不許看讀)이요, 비공계청(非公界請)이어든 불허열경(不許閱經)이다. 여법하삼년공부(如法下三年工夫)호대 약불견성통종(若不見性通宗)인댄 산승山僧이 체이(替爾)하야 입지옥(入地獄)호리라. 

다못 대중이 한 회상(會上)에 모여가지고 같이 참선수행(參禪修行)을 함에, 세속(世俗)에 모든 인연(因緣)을 다 버려버리고, 집착전도, 잘못된 생각, 입중오법(入衆五法)을 제외한 쓸데없는 생각을 다 버려버리고, 진실로 생사대사(生死大事), 오직 생사대사만을 위해서, 그 선원에 청규(淸規)를 자발적으로 잘 지키며, 인사를 다 끊어버려. 먹고 입고 잠자고 하는 모든 수용(受用)은 인연(因緣) 따라서 해. 삼경(三更)을 제외하고는 수면(睡眠)을 하지 말아라. 결제 중에 일주문(一柱門) 밖에 나가지 말아라. 공양(供養)을 청장(請狀)해도 나가지 말아라.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서 견성(見性)을 해서 선지식(善知識)의 인가(印可)를 받은 뒤가 아니며는 경(經)도 보지 말어라. 대중적으로 큰 재(齋)가 들면 선방(禪房)스님네를 초청(招請)을 해서 <금강경(金剛經)>을 읽어주십소사 하는 그런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경전도 보지 말어라. 이렇게 삼 년(3년) 동안을 여법(如法)하게 정진(精進)을 그렇게 하고도 견성(見性)해서 종지(宗旨)를 통달(通達)하지 못하면, 산승(山僧)이 대중을 대신해서, 너희를 대신해서 지옥(地獄)에 들어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