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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태(入胎)와 출태(出胎)】

이 뭣고? 2021. 1. 19. 19:55

 

 【한 덩어리 쇠뭉팅이를 삼킨 것처럼】

 

거심진속윤회업(擧心盡屬輪廻業)이요

동념무비생사근(動念無非生死根)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요여태허무향배(要與太虛無向背)인댄 

상탄일개철혼륜(常呑一箇鐵渾侖)이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거심진속윤회업(擧心盡屬輪廻業)이요,

마음 일으키면, 마음을 일으키면, 마음에 생각이 일어나면 무슨 생각이건 다 윤회(輪廻)의 업(業)에 속하고, 착한 생각이나 악한 생각이나, 과거 현재 미래, 선악(善惡), 시비(是非) 일체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들이 모두가 다 생사윤회(生死輪廻), 육도윤회(六道輪廻)허는 근본(根本)이 되고,

 

 

동념(動念)이 무비생사근(無非生死根)이다. 

생각이 동(動)하면 다 생사(生死)의 근원(根源)이 아닌 것이 없더라.

 

 

요여태허무향배(要與太虛無向背)ㄴ댄,

태허(太虛), 저 허공과 같이, 저 허공과 더불어 향배(向背)가 없고자 하거든, -향배는, 향(向)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고 배(背)는 서로 등지는 것인데-  허공과 더불어 향하고 등지고 헐 것이 없고자 하면, 일체처(一切處)에 걸림이 없어.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걸림이 없고 자유자재(自由自在) 해... 허기를 바래거든, 

 

 

상탄일개철혼륜(常呑一箇鐵渾侖)이다.

항상 한 덩어리 쇠뭉팅이를 통째 생킨 것처럼 할지니라. 

 

음식을 먹다가 조그만헌 덩어리 하나만 넘어가도 그놈이 목에 딱 걸리면 끌끌- 하고 종일토록 생 트림이 나고 속이 답답하고 거북한데, 쇠, 쇠뭉팅이를 꿀떡 생켜 놨으면 그것이 어떻게 되겠느냐 그 말이여. 앉아도 불편하고 서도 불편하고 트림을 해도 불편하고 그것이 삭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매우 거북하고 불편헌 것이여. 항상 쇠뭉팅이를 생킨 것처럼 하라. 그래야 마침내 이 육도법계(六道法界)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게 될 것이다.

 

우리 수행자가 본참공안, 본참공안(本參公案)을 항상 놓치지 아니하고 앉아서도 ‘이 뭣고?’요, 서서도 ‘이 뭣고?’요, 일하고 밥 먹고 옷 입고 똥 누고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 희로애락(喜怒哀樂), 육체적(肉體的)인 모든 동작(動作)과 정신적(精神的)인 모든 작용(作用) 가운데에 항상 쇠뭉팅이를 생킨 사람처럼 그 알 수가 없는 의단, 꽉 맥혀서 알 수 없는 의단(疑團)이 현전(現前)허도록 그렇게 잡두리를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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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병인년(丙寅年) 삼동안거(三冬安居) 해제(解制)를 맞이했습니다. 방금 조실(祖室)스님의 법문(法門)을 녹음을 통해서 들었기 때문에 산승(山僧)이 더 거기에 덧붙여서 말할 것도 없습니다마는, 오늘 해제를 허면 여기 용화선원(龍華禪院) 선방(禪房)에 스님네나 보살님네, 그리고 또 용주사(龍珠寺) 중앙선원(中央禪院), 또 저기 태화산(泰和山) 봉곡사(鳳谷寺) 태화선원(泰和禪院), 모다 인근(鄰近)에 모다 선원에서 온 비구니(比丘尼) 선객(禪客)들, 여기에 모두가 다 참석을 했습니다마는, 오늘 해제를 허면 다시 또 걸망을 지고 또 어느 선방 또 어느 회상(會上) 어느 선지식(善知識) 어느 도반(道伴)을 찾아서 또 행각(行脚)을 허시게 되겠습니다.

 

행각을 허는 그 걸음걸음, 항상 쇠뭉팅이를 생킨 그 거북한 사람이 무슨 딴생각을 일으킬 수가 있겠느냐? 고인(古人)은 ‘부모상(父母喪)을 당한 상자(喪子)처럼, 깨닫기 전에도 그러헌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하고 깨달은 뒤에 수행도 그 또 부모상을 당한 초상(初喪) 그 상인(喪人)처럼, 상제(喪制)처럼 그런 마음으로 허라’ 이런 말씀도 있는데, 지끔 ‘쇠뭉팅이, 쇳덩어리를 삼킨 사람처럼 허라’고 헌 말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 표현이라고 허겠습니다. 그렇게 일체처 일체시에 화두를 잡두리 해나가지 않고서는 이 일대사(一大事) 문제를 해달... 해결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쇠뭉팅이를 어쩌다 꿀떡 생켜 놨으니 무엇이 딴 생각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다맛 거북해서, 앉으나 서나 거북허고 불안허고 허듯이, 앞도 맥히고 뒤도 맥히고 언제 전후좌우(前後左右) 두리번거릴 겨를도 없고 딴 생각을 잠시도 헐 겨를이 없이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에 대한 의심(疑心), 그 의단(疑團)만을 참구(參究)해나가는 그러헌 자세, 그러헌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일분일초를 그렇게 잡두리를 해나가라 이것입니다.

 

또 그렇게 해나가다가 또 얼마 안지내면은 또 산철결제를 허게 되고 그런데, 결제(結制) 중에는 모두 여러 도반들이 모여서 규칙적으로 시간생활(時間生活)을 허니까 개인적인 일체 자유행동이 허락이 되지 아니함으로 정진(精進)을 열심히 헐 수밲에는 없으나, 해제(解制)를 허면 각자 자유행동(自由行動)을 허게 되기 때문에 특별히 오늘 이 해제를 맞이해서 여러 도반(道伴)들에게 이 게송, 고인(古人)에 게송(偈頌) 한마디를 읊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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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수행을 아무리 잘해도 이 입태(入胎) 출태(出胎)에 매(昧)한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설사 금생(今生)에 정진(精進)을 해서 그 깨친바가 있다 하더라도 여간헌 큰 참 이 도력, 법력(法力)과 도력(道力) 그 정진수행력(精進修行力)을 갖지 않고서는 입, 태중(胎中)에 들어갈 때, 또 태에서 나올 때 그렇게 참 매하... 매(昧)하기가 쉽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 입태 출태라는 게 우리의 현실, 꼭 이 생사(生死)를 갖다가 이 육체가 죽으면, 이 육체에다가 기준을 두어가지고 육체가 움직이지 않게 되고 숨이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 하고, 새로 어머니 뱃속에서 출산하는 것을 생이라고 보통은 그렇게 얘기 허지만, 더 정밀(精密)허게 이 생사를 논(論)하자면,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난 것이 바로 생(生)이요 한 생각 멸(滅)하는 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생각도 한 생각 속에 구백(900)의 생멸(生滅)이 있으니 ‘한 생각 속에 구백(900)의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근데 그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생산데, 이 몸띵이 죽을 때 숨 딱 끊어진 것을... 가 이 입적(入寂)을 했다 그러고 그, 바로 그때를 갖다가 임종(臨終)이라 그러는데, 우리가 이 몸띵이는 아직 죽지 않고 활발히 활동을 허고 있으면서도 생각이,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한 그 생각의, 생각에 있어서의 기멸(起滅), 염기염멸(念起念滅) 이것을 생사(生死)라고 본다면, 그러면 그 입태(入胎) 출태(出胎)를 어떻게 그 볼 것이냐? 

 

우리가 눈으로 어떠헌 색상(色相)을 보고, 봄으로 해서 우리가 안식(眼識)이 생기고, 귀, 이근을, 이근(耳根)으로 그 성진(聲塵), 어떠헌 밖에 소리를 들으면 거기서 ‘아 저게 무슨 소리다.’ 이렇게 해서 이식(耳識)이 생기고, 이렇게 해서 그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생기는데, 그 한 생각이 그 육근을 통해서, 육근 중에 어느 한 기관(器官)을 통해서 딱 한 생각 일어나면[염기念起] 그것이 새로 태어난 거고, 그 생각이 이리저리 변허면, 변해가지고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이 염멸(念滅)이고 그것이 죽음인데, 그 어떠헌 경우를 만나서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 날랴고 헌,  -탁 대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접(接)해가지고 거기에 어떠헌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경과해가지고 결국은 구체적인 생각으로 생각이 동(動)하고, 또 생각이 동한 다음에는 그것이 육체적으로, 그 육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게 되겠는데-  그 미세한 아주 정미(精微)로운 그 생각이, 육진이, 육근이 육진을 만나가지고 육식(六識)이 날 그... 그 쪼옴이 바로 입태(入胎)고, 그것이, 그 생각이 또 없어지면 인자 구체적으로 발표가 되면 그것이 인자 출태(出胎)고, 태에 나와가지고 한 평생을 사는 것은 그 생각이 이리저리 발전했다가 그것이 꺼지게 되며는 다시 인자 또 입적(入寂)을 해가지고 입태 출태 이렇게 되는데,

 

그 우리의 육체가 한 평생을 살다가 죽으면 그 사람의 지은 과보(果報)에 따라서 새로운 몸을 받게 됩니다. 새로운 몸을 받기 이전까지의 상태가 우리 ‘중음신(中陰身)이라’, 또는 인자 ‘영혼(靈魂)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 중음신으로 떠다니다가  -그 중음신으로 떠다니는 시간이 사람에 따라서 죽자마자 태어나기도 하고 칠, 사십구재 지내가지고 또 다른 데로 태어나기도 하고, 또 백일동안 중음신으로 있다가 또 새로운 몸을 태어나기도 하고, 또 소상(小祥) 대상(大祥)을 지나가지고 태어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십년 내지 백년까지도 새로운 몸을 받아나지 못하고 중음신으로 자기 집이나 일가친척으로 이렇게 전전이, 전전해가면서 이 허공속에 왕래(往來)하면서 이렇게 중음신으로 그렇게 있는 경우도 있고 그런데,-  그렇게 다니다가 인연 따라서 새로운 그 숙주(宿主), 자기가 잉태(孕胎)헐 그 모태(母胎)를 찾아가지고 거기 인자 태중(胎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그래서 입태 출태라고 허는 것은 그, 그때에 입태 출태 허기 전까지는 자기의 그 정신(精神)이, 이를테며는 수행헌, 수행(修行)해서 깨달은 그 경지(境地)가 고대로 유지될 수가 있습니다. 수행력이 있는 사람은. 있는데, 그 출태 헐 그 찰나에 미(迷)해버리고, 또 출태헐 때까지도 안 미(迷)했던 사람이... 아 입태헐 때까지도 미(迷)허지 않은 사람이 출태하다가 탁 미해버리고 그렇다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가면서 앉아있는 동안에는 다 화두(話頭)를 들고 정진을 허는데, 화두가 그렇게 고대로 의단(疑團)이 있는데, 일어서다가 깜빡 화두를 놓쳐버리기도 하고, 또 뭔 소리가, 큰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면 그 소리 때문에 깜빡 화두를 놓쳐버리기도 하고, 내동 여태까지 정진(精進)을 잘하다가 그렇게 해서 새로운 어떠헌 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새로운 육진(六塵)이 우리에게 어떤 충격을 가해오면 그 육식(六識)이 일어나면서 그 화두를 놓쳐버리는 것을 우리는 항상 느낄 수가 있습니다. 

 

살아, 이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 육, 그 우리의 모든 육체적(肉體的) 정신적(精神的)인 그런 작용(作用)을 통해서 우리는 요렇게 생활을 허면서 그 속에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화두(話頭)를 들고, 그래가지고 화두가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되아서 그래가지고 더 이상 의심이 간절헐 수가 없고 더 이상 그 의단이 커질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 결국은 통 밑구녘 빠지듯이 그 의단(疑團)을 타파(打破)해가지고 결국은 자기의 면목(面目)을 깨닫게 되는데, 그 새로운 어떠헌 경지 ‧ 사건이 일어날 때 흔히 우리는 화두를 놓쳐버리는데 그렇지 않게 되고, 앉았을 때 화두를 든, 들었던 화두가 서도 상관이 없고 무엇을 눈으로 보더... 보아도 그 화두가 달아나지 않고 무엇을 들어도 그 화두(話頭)가 성성(惺惺)하고, 일체처 일체시에 생각 생각이 걸음걸음이 화두가 독로(獨露)해서 순일무잡(純一無雜)하도록 그렇게 단속(團束)을 해나간다면, 

 

이 몸띵이를 설사 버리고 죽게 되더라도,  -마지막 끙끙 앓다가 결국은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면 결국은 인자 죽게되는데, 그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러헌 혹독하고도 심한 그런 고통, 숨이 끊어질라고 헌 그 찰나에도-  화두를 놓치지 아니하고 터억 그 화두가 독로허도록, 의단이 독로허도록 그렇게 잡두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평상시(平常時)에 알뜰히 정진(精進)을 해놓지 않고서는 참 어렵다고 그럽니다. 내가 그러헌 경지, 죽어봤... 죽어본, 수없이 많은 죽었다 살았다, 태어났다 했겠지만 전생사(前生事)는 그저 잊어버리고 우리는 기억을 해내지를 못해서 그럽니다마는, 정말 그 마지막 숨 끊어질라고 헐 때의 그 고통은 그 죽어가는 사람의 그 표정이라든지 몸부림 허는 것을 보면 짐작헐 수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 임종(臨終)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임종을, ‘마지막 임종을 잘허기 위해서 정말 그때 참 잘허기 위해서 일생동안을 공부를 헌다’고 그렇게까지 말허는 스님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임종헐 때에 그 수망각난(手忙脚亂)허고 그 혼비백산(魂飛魄散)해가지고 정신을 채리지를 못헌 채 숨을 거두게 되면, 그건 물어볼 것도 없이 입태에도 매(昧)하게 되고 입태에 매한 사람이 출태에는 더 말할 것도 없겠죠? 그래서 옛날부터 다 이 훌륭한 그 수행인들도 임종할 때에 선지식(善知識)의 그 보살핌 속에서 숨을 거두기를 바래고, 선지식은 바래지 못해더라도 참 그 수행력(修行力)있는 도반(道伴)이 옆에서 임종을 지켜주고 또 그 정신을 차리도록 일깨워줄 수 있는 그러헌 도반 만나기를 그렇게 원(願)을 허는 것입니다. 한 생각 미(迷)해가지고 무량겁(無量劫)을 그런 미몽(迷夢) 속에서 자기 본성(本性)을 미해버린 상태에서 윤회(輪廻)를 거듭허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해제를 해가지고 산문(山門)을 나가셔서 어디 어느 산 어느 골짜구니 어느 도량(道場)을 가지더라도, 걸음걸음이 그러헌 자세, 쇠뭉팅이를 꿀떡 삼킨 그러헌 마음가짐, 그러헌 그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한걸음 한걸음을 옮기신다면, 바로 옮기신 그, 그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선방(禪房)이 될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 도반(道伴)이 있을 것이고, 바로 그 자리에 선지식(善知識)이 항상 계신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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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래긱반냉첨의(飢來喫飯冷添衣)를 

삼척지동야공지(三尺之童也共知)니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일개화두명역력(一箇話頭明歷歷)하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기래긱반냉첨의(飢來喫飯冷添衣)다.

배고픔... 배고프면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한 가지를 더 입어.

 

 

삼척지동야공지(三尺之童也共知)여.  

그것은,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두터운 옷을 입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말이여.

 

 

일개화두명역력(一箇話頭明歷歷)하면,

이 한... 한 개의 화두(話頭)가 명역력(明歷歷)하면, 소소영영(昭昭靈靈)하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이 화두가 현전(現前)하면,

 

 

여하개안자우치(如何開眼恣愚癡)리오.

어떻게 눈을 번허이 뜨고 어리석은 짓을 헐 수가 있겠느냐?

 

 

 

 

이 한 게송(偈頌)은 우리 수행인에게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간절한 게송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병인년(丙寅年) 삼동안거(三冬安居) 해제(解制)와 백일기도(百日祈禱) 회향(廻向)을 맞이해서 게송으로서 말을 맺고자 합니다. 

 

 

 

-송담선사 법문 325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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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탄일개철혼륜(常呑一箇鐵渾侖)이다,

항상 한 덩어리 쇠뭉탱이를 통째 삼킨 것처럼 할지니라.”

 

* 입태 출태라는 게, 이 육체에다가 기준을 두어가지고 육체가 움직이지 않게 되고 숨이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 하고, 새로 어머니 뱃속에서 출산하는 것을 생이라고 보통은 그렇게 얘기 하지만, 더 정밀(精密)하게 이 생사를 논(論)하자면, 육체가 아니라 우리의 한 생각 일어난 것이 바로 생(生)이요 한 생각 멸(滅)하는 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생각도 한 생각 속에 구백(900)의 생멸(生滅)이 있으니 ‘한 생각 속에 구백(900)의 생사(生死)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 생각이 일어났다 꺼졌다 일어났다 꺼졌다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생산데, 그 생각에 있어서의 기멸(起滅), 염기염멸(念起念滅) 이것을 생사(生死)라고 본다면, 그러면 그 입태(入胎) 출태(出胎)를 어떻게 그 볼 것이냐? 

우리가 눈으로 어떠한 색상(色相)을 봄으로 해서 우리가 안식(眼識)이 생기고, 귀 이근(耳根)으로 그 성진(聲塵)인 어떠한 밖의 소리를 들으면 거기서 이식(耳識)이 생기고, 이렇게 해서 그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생기는데, 그 한 생각이 육근 중의 어느 한 기관(器官)을 통해서 한 생각이 일어나면[염기念起] 그것이 새로 태어난 거고, 그 생각이 이리저리 변해가지고 그것이 없어지면 그것이 염멸(念滅)이고 그것이 죽음인데, 그 어떠한 경우를 만나서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려고 하는 그 미세한 아주 정미(精微)로운 그 생각이 바로 입태(入胎)고, 그 생각이 또 없어지면 그것이 이 출태(出胎)인 것입니다.

 

* 우리의 육체(肉體)가 한 평생을 살다가 죽으면 그 사람의 지은 과보(果報)에 따라서 새로운 몸을 받게 됩니다. 새로운 몸을 받기 이전까지의 상태가 우리 ‘중음신(中陰身)이라’, 또는 영혼(靈魂)이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 중음신으로 떠다니다가 인연 따라서 새로운 그 숙주(宿主), 자기가 잉태(孕胎)할 그 모태(母胎)를 찾아가지고 거기 태중(胎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입태하기 전까지는 자기의 그 정신(精神)이 있다가, 그 입태 할 그 찰나에 미(迷)해버리고, 또 입태(入胎)할 때까지도 안 미(迷)했던 사람이 출태(出胎)하다가 탁 미해버리고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아가면서 앉아있는 동안에는 화두가 그렇게 그대로 의단(疑團)이 있는데 일어서다가 깜빡 화두를 놓쳐버리기도 하고, 또 뭔 큰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면 그 소리 때문에 깜빡 화두를 놓쳐버리기도 하고, 내동 여태까지 정진(精進)을 잘하다가 어떠한 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서 새로운 육진(六塵)이 우리에게 어떤 충격을 가해오면 그 육식(六識)이 일어나면서 그 화두를 놓쳐버리는 것을 우리는 항상 느낄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