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승답파유리계(院僧踏破琉璃界)하고】
【선승(禪僧)은 그 온통 하얗게 꽁꽁 얼은 유리세계(琉璃世界)를 터벅 터벅 걸어서】
“물 없는 바다에 파도가 출렁거린다.”
“시즉고시(是則固是)나 갱대삼십년(更待三十年)하야사 시즉(是則)다.
말이 끝났으면 자리로...”
“또 하나 묻겠습니다.”
“자리로 돌아가서 앉어”
“원오극근(圜悟克勤)이 대혜종고(大慧宗杲)에게 ‘상수래야(相隨來也)니라, 서로 따라온다’ 하였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묻는고?”
“상수래야(相隨來也)니라.”
“다시 한 번 일러봐.”
“상수래야(相隨來也)니라.”
“일렀으면 자리로 돌아가.”
“내가 한 번 일러보겠습니다.”
“쿵!” (법상에 주장자 내리심)
“일락서산월출동(日落西山月出東)이라. 하하하”
“자리로 돌아가.”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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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전(年前)에 한번 여기 찾어 온 적이 있는 수좌(首座)스님이 와서 이렇게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모인 가운데에서 그동안 수행(修行)한 힘을 여지없이 발휘를 했습니다. 이 스님이 바로 깨닫고 바로 일렀느냐 못 일렀느냐 헌 것은 눈이 있는 사람이 보면 알 것입니다.
추창사하십리춘(惆悵沙河十里春)인디
일번화로일번신(一番花老一番新)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소루의구사양리(小樓依舊斜陽裏)헌디
불견당시수수인(不見當時垂手人)이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추창사하십리춘(惆悵沙河十里春)에
일번화로일번신(一番花老一番新)이다.
쓸쓸한 바닷가 모래사장에 십리(十里)에 봄이 왔는데,
일번화로일번신(一番花老一番新)이여.
꽃이 한번 늙으면... 늙어서 시들면, 또다시 봄이 오면은 다시 또 꽃이 새로와진다 그 말이여.
소루의구사양리(小樓依舊斜陽裏)에
다락집, 적은 다락은 예나 다름없이 저문 석양... 해 저문 석양 속에 서있는데,
불견당시수수인(不見當時垂手人)이로구나.
옛날 그 당시에 손을 드리워주던 그분은 볼 수가 없구나.
세월이 흘르고 흘러서 다시 또 갑자년(甲子年)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봄이 왔건만, 입춘(立春) 우수(雨水)가 지냈건만 또 이렇게 엊그제 봄눈이 나렸습니다. 아무리 눈이 내려도 봄눈이라 순식간에 다 녹아져버리고 버드나무가지에는 물이 오르고 여기저기 산에는 진달래와 개나리의 꽃 몽우리가 피기 위해서 입을 몽우리... 몽우리를 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봄이 갔다가 다시 오고 꽃이 졌다가 다시 피고 허건마는, 옛날에 우리를 위해서 자비(慈悲)를 드리워주시던, 손을 드리워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던 스승님은 뵈올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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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열반(涅槃)하신 뒤 오십육억 칠천만 년(56억 7천만년) 뒤에 미륵불(彌勒佛)이 염부제(閻浮提)에 하강(下降)허셔서 출세(出世)해가지고 무량중생(無量衆生)을 제도하시게 되는데, 그 오십육억 칠천만 년 되기 이전에 간간이 화현보살(化現菩薩)이 출현(出現)을 허셔서 불법(佛法)을 펴시고 또 중생을 제도(濟度)하시고 그러시면서 불법의 혜명(慧命)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 보살화현(菩薩化現)으로 나타나신 그러헌 성현(聖賢)들은 ‘내가 보살화현이다’ 하고 써가지고 나온 것도 아니고, 우리가 그 색상(色相)을 보아가지고는 분간(分揀)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헌 보살화현이 수십 가지 백억화신(百億化身)으로 출현을 허셔서 인연(因緣)있는 중생(衆生)을 제도하시게 됩니다. 돈독(敦篤)한 신심(信心)을 가진 이는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으로 나타난 그 보살화현을 언제 어데서 어떻게 만날런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반사지(蟠蛇地: 갈반지葛蟠地)라고 허는 곳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만나게 될 때에, 그 전에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헐 때,
“이 다음에 어디에서 보살님을 만나보게 될까요”
하고 여쭈어보니까,
“반사지(蟠蛇地)에 만나게 될거다.”
그래서 반사지에다가 토굴을 짓고 거기서 그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허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귀빈(貴賓)들이 와서 친견을 허고 가고 또 큰시님(큰스님) 네도 와서 친견허고 가고 모다 그러는데, 다 그... -자장스님은 국사(國師)로서 일국(一國)에 그 융숭한 존경과 예우(禮遇)를 받고 계셨는데- 하루는 어떤 덥수룩한 거지같이 생긴 영감이 칡넝쿨로 엮은 광주리에다가 죽은 강아지새끼를 담어가지고 어깨에다가 메고 와서,
“내가 자장을 좀 만나러 왔다.”
그러니까,
그 시자(侍者)가 우리 큰시님을 그동안에 친견허로 온 분들이 수없이 많지만, 다 ‘자장큰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다 이렇게 말하지 ‘나 자장을 보러왔다 자장 집에 있느냐?’ 이렇게 큰스님을 스님 소리도 넣지도 아니하고 막 마구잽이로 그러니까, 그 시자가 ‘참 고약한 사람이 왔구나’ 그래가지고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친견을 시켜야 할 것인가 안해야 할 것인가? 망설이니까,
“아,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하고 되물으니까,
“너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여. 니 스승 자장을 만나러 왔으니까 빨리 자장보고 나 왔다고 해라.”
이 막 그 위엄(威嚴)을 가지고허니까 그 위엄에 눌려서 그 시자가 그 들어가서 그 큰시님한테 가서
“밖에 이러이러헌 사람이 와가지고 막 큰스님을 함부로 이름을 부르면서 만나고 싶다고 그런... 그럽니다.”
“그래 어떻게 생겼더냐?”
“약허(若何) 약허(若何)허게 생겼고 미친 사람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래? 그 미친놈이 왔는가부다. 그 보내버려라.”
아 이랬단 말이여.
그러니까 시자가 나가서, 나가니까... 나가서,
“큰시님 지금 바뻐서 못 만나니까 가라”고 그러니까.
“니가 가라고 안 해도 내가 갈 거다.
지 놈이 그렇게 아만(我慢)이 탱천(撑天)해가지고 보살(菩薩)을 친견을 해?”
그러면서 그 가지고 있는 광주리를 거꾸로 이렇게 쏟으니까 죽은 강아지가 툭 땅에 떨어지자마자 사자(獅子)로 변해가지고... 변한단 말이여. 그래서 그 사자를, 청사자(靑獅子)를 타고 저 하늘 높이 휙 허니 날아가는데, 아 시자가 그것을... 그 광경을 보고서 급히 쫓아 들어가서 그 광경을 얘기허니까, 그 자장스님이 깜짝 놀래가지고 하! 나와서 보니까 저 하늘 갓으로 그 사자를 탄 그분은 날아가 버리고는 그 뒤 끝에 그 비행기 날아간 뒤에 하얀 흰 구름이 꼬리를... 꼬리가 길게 나부끼듯이 그러헌 자죽만 남기고서 이상한 향내가 진동을 헌것을 보고,
“하! 이거, 이 반사지(蟠蛇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親見)허기로 했는데 내가 문수보살을 못 알아봤구나.” 그렇게 후회를 했던 것입니다.
이러헌 그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널리 전해지는 일화(逸話)입니다마는, 꼭 이러헌 특이한 양상(樣相)으로 보살이 출현헐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전혀 냄새가 없이, 완전히 거지면 거지, 미친사람이면 미친사람, 또 오늘 이 법회가 시작하자마자 나와서 한바탕 이 법거량(法擧揚)을 시도(試圖)한 이러헌 분도 문수보살(文殊菩薩)일런지 보현보살(普賢菩薩)일런지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세(末世)라고해서 스스로 자포자기(自暴自棄)를 헌다든지, 또는 여자라고해서 자포자기를 헌다든지, 나이가 많다고해서 자포자기를 헌다든지, 또는 무식하다고해서 자포자기를 헌다든지, 이 도(道)에 있어서는, 법(法)에 있어서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을 초월(超越)한 것인 만큼, 스스로 자기와 도와는 인연이 먼 것처럼 포기허는 것은 제일 큰 잘못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세에 태어났을 수록에 백배 더 노력을 할지언정, 또 여러 가지 여건이 좋지 못하게 태어났을 수록에 백배 더 노력할지언정, 여건(與件)이 안 좋다고 해서 스스로 포기해버린다면 영영 공부와는 멀어져버릴 수밲에 없는 것입니다.
세속(世俗)에서도 어려운 여러 가지 역경(逆境) 속에서 거기서 좌절(挫折)허지 아니하고 두 번 실패하면 세 번, 세 번 실패하면 네 번, 이렇게 해서 끈질기게 계속 노력하고 극복해나가면 마침내는 큰 성공을 허는 예가 너무너무 많은 것입니다. 흔히 좋은 여건 하에서 모든 사업을 하게 되고 모든 학문을 게 되면 참 좋은 것 같지만, 좋은 여건 하에서 성공한 사람보단 오히려 대단히 불리한 역경... 역경 속에서 참 피나는 노력 끝에 성공헌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것이고, 그러헌 사람이 더 큰 기쁨을... 기쁨과 행복을 얻고 나아가서는 그 기쁨과 행복을 모든 사람에게 또 회향(廻向)을 헐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선지식(善知識)이 열반(涅槃)허시고 안계시지만, 우리는 그 우리를 위해서 남겨주신 그 법어(法語)를 통해서 생존시(生存時)나 다름없이 그 법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 법(法)에 의해서 열심히 노력헌다면 우리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달헐 수가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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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조실(祖室)스님 법문(法門) 속에 ‘우리 인간은 전부가 이별(離別)뿐이다’ 하는 말씀을 허셨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처음에 그 자식을 낳아가지고서는 그 자식을 위해서 그 부모는 몸과 목숨과 모든 그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바... 자식을 위해서 다 바쳐도 아까울 것이 없고, 다 바치고서도 자식만 잘된다면 한이 없이 이렇게 생각을 허면서 길렀지만, 그 자식이 차츰 커가면 결국은 부모의 품안에서 떨어져나가서 독립(獨立)을 허게 되고, 또 자식으로서는 부모가 평생도록 살아계시기를 바래지만 세월이 지내며는 그 부모도 결국은 이승... 저승으로 떠나시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 사랑하는 부부간에도 역시 마찬가지고 형제간이나 친구간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다 이별(離別)을 전제(前提)로 하고 우리는 만나게 되는 것이고, 벼슬이나 명예나 또는 재산이나 모든 그런 인간에 오욕(五欲)도 역시 언젠가는 나로부터 떠나고마얀... 떠나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러헌 것이 바로 이 무상(無常)이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상 속에 몸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그 무상 속에 몸을 받아나서 무상 속에서 무상을 살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일평생을 살다가 마지막 숨을 거두고 갈 때까지 온전히 무상 속에서 일평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이 생사해탈(生死解脫)허는 법, 참 나를 찾는 법, 이 진리법(眞理法)을 설(說)해주시지 아니했다면, 우리는 완전히 무상 속에서 무상을 살다가 무상하게 이승을 하직(下直)을 하고 또다시 새로운 몸을 어느 땅 어느 때에 받어나서 또 무상하게 일생을 살다가 끝을 또 마치고, 이러헌 되풀이를 허면서 수없이 고의(故意)적으로, 또는 본의(本意)아니게 업(業)을 지어서 그 업으로 인해서 육도(六道)를 끊임없이 돌고 돌다가 축생(畜生)이나 아귀도(餓鬼道)나 그렇지 않으면 지옥(地獄) 같은 데에 한번 떨어지고 나면 영겁(永劫)을 두고 나올 기약(期約)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숙세(宿世)의 인연(因緣)이 있어서 금생에 이렇게 불법(佛法)을 만나게 되았습니다. 불법을 만난 그 인연으로 무상(無常) 속에서 영원(永遠)을 찾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아까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에 남전(南泉)스님과 또 근처에 있는 어느 토굴에 있는 스님과의 관련으로 이루어진 법문을 들었습니다마는, 우리는 공부를 해나가는데 있어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기도 하고 선지식이 또 학자(學者)를 찾기도 하고 해서, 서로의 안목(眼目)을 점검(點檢)을 하고 탁마(琢磨)를 해서 어찟튼지 바른 스승을 찾고 바른 도반(道伴)을 찾어서 삿된 디에(데) 떨어지지 않고 중간에 멈추는 일이 없이 구경(究竟)에 깨달음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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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을 허는 것은 우리의 지혜(智慧)의 눈을 뜨는데 가장 빠르고 가까운 최고의 법(法)입니다마는,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우리가 지어온 죄업(罪業)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애서 여러 가지 장애(障礙)가 많고, ‘도(道)를 닦는데에도 장애가 많고 세속에 살아가는 데에도 여러 가지 내 뜻과 같이 되지 아니헌 것은 과거에 지은 업장(業障)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부터서 조석(朝夕)으로 이렇게 참회(懺悔)를 하고... 험으로써 업장(業障)을 소멸(消滅)을 하고 그래야 도 닦아가는 데도 장애가 없고 세속에 어떠헌 생활을 하고 사업을 해나가는 데에도 뜻과 같이 소원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은, 가장 올바르게 닦아가는 수행은 지혜와 또 복덕과, 복(福)과 혜(慧)를 겸(兼)해서 닦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지혜(智慧)만을 닦고 복(福)을 닦지 아니하면 가장 그 비근(卑近)한 예를 들면, 머리는 좋은데 박복(薄福)해서 되는 일이 없이 내생(來生)에 태어나는 게고, 복(福)만 닦고 지혜를 닦지 아니하면 내생에 몸을 태어나되 복은 있어서 돈은 좀 많이 있으나 머리가 돌대가리가 되어서 그렇게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가정이나 이웃에도 그러헌 예를 보실 수가 있을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혜(智慧)와 복(福)을 함께 겸해서 닦아가라’ 부처님은 말씀을 허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이 지혜와 복, 복과 혜를 겸전(兼全)하신 최고의 성현(聖賢)이 누구냐 하면 바로 부처님인 것입니다.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헐 때 ‘두 가지가 구족하신 높은 어른께 귀의합니다.’ ‘두 가지가 구족하시다’ 하는 것이 바로 이 ‘복(福)과 혜(慧) 이 두 가지가 원만구족(圓滿具足)하시다’ 이것입니다. 우리가 도를 닦아가는데 있어서도 복과 혜를 항시 겸해서 닦아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도를 닦는 데에도 그렇고 세속에 사회인으로서 수행을... 생활을 해 나가는 데에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이 공안(公案)을 일르되, 이(理)와 사(事)를 다... 이와 사에 걸림이 없어야만 바로 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치(理致)에만 맞고 사(事)에 맞지 아니하면 이것은 원만(圓滿)하게 보았다고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치’만 맞고 ‘사’를 무시허게 되면 이것은 공(空)의 이치를 보는 것 밲에는 되지 않는 것이어서, ‘사’라고 허는 것은 현실(現實)을 ‘사(事)’라고 하는 것이고, 이치상으로는 선(善)과 악(惡)이 두 가지가 아니고, 바... 밝은 것과 어... 어두운 것이 두 가지가 아니요, 부처와 중생(衆生)이 두 가지가 아니요, 크고 작은 것이 두 가지가 아니요, 맑은 것과 깨끗헌 것이 두 가지가 아닙니다. 죽음과 생사(生死)와 열반(涅槃)도 두 가지가 아닌 것입니다.
이치상으로만 본다면 걸릴 것이 없습니다. 천칠백(1700) 공안(公案)을 하나도 맥힘 없이... 맥힘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가(印可)를 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에도 맞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치’에도 맞고 ‘사’에도 맞게 일러야 그 이것을 현중현(玄中玄)이라 하는 것이여. 현중현을, 현중현도리(玄中玄道理)를 바로 봐야 고인(古人) 고조사(古祖師)들은 그 사람을 옳게 보았다고 인가(印可)를 허셨습니다.
처음에 한 철 내지 두 철, 늦어도 한 삼년 알뜰히 정진(精進)허게 되면 누구나 이 체중현(體中玄) 도리, 공(空)에 이치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이 공(空)의 이치만 보는 것 그것만을 가지고 옳게 일렀다고 인가(印可)를 허게 되고 본인도 의심 없이 자기가 바로 보았다고 생각을 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래가지고 법에... 법(法)에는 현밀(顯密)이 있어서, 은밀히 헐 말과 또 이렇게 나타내서 헐 부분이 있는 것인데 현밀을 가리지 못하고 마구잽이 말하게 되고, 이치로 보면 생사(生死)가 없기 때문에 육도(六道)도 인과(因果)도 모두가 인증(認證)을 헐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事)를 보지 못하면, 사의 이치를 보지 못하면 인과(因果)도 부정(否定)을 허게 되고 삼륜... 삼강(三綱)과 오륜(五倫)도 부정을 허게되고, 선악(善惡)도 부정을 허게 되아서 거침없이 무애도인(無礙道人)으로 이 세상에 천상천하(天上天下)에 거침없이 말과 행동을 막 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조사(祖師)들이 대단히 이것을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중현 도리를 바로 보아서 이(理)와 사(事)에 맥힘이 없어야 오후(悟後)에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에 맥힘이 없는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는 바른 스승을 만나냐 못 만나냐에 따라서 좋은 그릇이, 좋은 재목(材木)이 훌륭한 건물을 짓게 되기도 하고, 좋은 재목이 이 아까웁게도 큰 성과(成果)를 거두지를 못하고 버리게 되는 수도 있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인(古人) 말씀허시기를, ‘제호상미(醍醐上味)가 번성독약(飜成毒藥)이다, 제호의... -제호는 우유로 만드는 최고의 맛있는, 영양이 있고 맛있는 음식인데- 그 제호의 최고(醍醐)에 맛이 변해가지고 독약(毒藥)으로 변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잘 관리를 해야지 변질(變質)되아 버리면, 아깝다고 그것을 먹게 되면 병(病)이 나는 거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이치를 보는, 이치를... 공(空)의 이치를 보는 것도 대단히 희귀한 일이고 참 소중한 일이지만, 공(空)의 이치를 본 그 경계(境界)는 잠시도 거기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분일초도 ‘내가 봤다’는 생각, ‘알았다’는 생각,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 그러헌 생각을 가지고 거기에 주저 않게 되면 그 공부는 거기서 멈추게 되고 허는 짓은 미친 짓 밲에는 헐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참선(參禪) 허다 한 소식(消息) 해가지고 바른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법광(法狂)이라 해서 법으로 미친 ‘법광’이 되아가지고, 불조도 막 매도(罵倒)해버리고 쳐부셔버리고 욕을 퍼붓어버리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아니하고 마구잽이 말을 막 함부로 하고 이래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망치고 많은 사람을 갖다가 그르치게 되고 불법(佛法)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達磨)스님도 [혈맥론(血脈論)]에 ‘이금차도(而今此道)에 난득기인(難得其人)이라, 이 도(道)에 참 사람 만나기 어렵다.’ 학자(學者)는 바른 스승을 만나기 어렵고 또 선지식(善知識)은 바른 학자를 만나기가 어렵다고 통탄(痛歎)을 하신 것입니다.
선지식을 만났다고 해서 그 선지식한테 무엇을 얻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못 자기의 그 소견(所見)을, 바르냐 그르냐를 점검(點檢) 간택(揀擇)받는 일 뿐인 것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본 경계(境界)이기 때문에 너무너무 신기하고 너무너무 묘하고 힘이 솟구치고 환희에 넘쳐서 자기로서는 자기를 점검헐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바른 안목(眼目)을 갖춘 선지식(善知識)의 점검이 아니면 백(百)이면 백 다 잘못... 중간 잠꽌 지나가야할 그 경계에서 거기서 주저앉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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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외국(外國)에서 와서 한국에 와서 수행을 공부... 참선을 헌 분이 몇 분이 찾어 왔었는데,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이렇게 만리타국(萬里他國)에서 와가지고 그렇게 모다 정진(精進)을 헐랴고 애를 쓰다가, 구산(九山) 방장(方丈) 큰시님께서 열반(涅槃)하셔사, 하셨기 때문에 일부러 찾아왔다고 그러면서 한 분이,
“사대(四大)가 비아(非我)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이것이 내가 아니고, 모두 이 사대는 육체(肉體)란 말인데, 육체가 사대로써 이루어졌으니까, ‘사대가 내가 아니다’ 그 말은 ‘요 육체라고 허는 것이 내가 아니다’ 그 말이여.
“망념(妄念)도 본적(本寂)이다”,
망상 망념도 그것이 본래적적(本來寂寂)헌 것이다 그 말이여.
“적요상지(寂寥常知)해서”,
적적허니, 적적한 가운데에 항상 안다 그 말이여. 적적(寂寂)해서 모든 견문(見聞)이 끊어졌는데 끊어진 가운데에 항상 앎이 없는... 앎이 없는... 없이 아는 놈이 있다 이건데,
“그러헌 경계에 떠억 앉었으니 도무지 의심(疑心)이 일어나지를 안 허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겄습니까? 아무리 화두(話頭)를 방장(方丈)시님한테 무자화두(無字話頭)를 타가지고 참선(參禪)을 해도 도무지 의심이 안 난다” 이것입니다.
“앉었으면 환허니 망상(妄想)도 없고 번뇌(煩惱)도 없고 이 세상에 이 몸띵이가 있는 것까지도 다 잊어버리고, 도대체 끊어야 할 망상도 없고 버려야 할 생사도 없고, 이러헌 경지에서 이 소소영영(昭昭靈靈)하니 무슨 의심을 들을... 의심이 나지를 안허니 어떻게 공부를 해야겄습니까?”
말인 즉슨은 ‘사대(四大)가 내가 아니요, 망념(妄念)이 본래적적(本來寂寂)해서 적요상지(寂寥常知)’헌 그러헌 경계는, 옛날 고조사(古祖師)들 선지식의 어록(語錄)에나 <육조단경(六祖壇經)>이나 경전(經典)에도 많이 그러헌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대(四大)가 비아(非我)’니, ‘망념(妄念)이 본적(本寂)’이니, ‘적요상지(寂寥常知)’니, 그러헌 말을 듣고 그러헌 말의 뜻을 알아가지고 그러헌 경계를 따악 이렇게 맛보면서 그것을 딜이다 보고 있으면 대단히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이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안하고 기가 맥히지. 그러나 이것은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나 그러헌 경계를 지켜나가고 맛보고 앉었으면 이것은 올바른 수행법이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 육조(六祖)스님 이전에 이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參禪)허는 법이 생겨나기 이전에는 관법(觀法)으로 많이 공부를 지도(指導)하고 또 관법으로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질박(質朴)하고 강직(剛直)허고 그래서 그러헌 수행법을 써도 이 공부를 바로 하고 또 깨달은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츰차츰 내려오면서 사람들이 지해(知解)가 날카로워져, 알 지(知)자 알음알이, 알음알이의 그 지해가 날카로와지고 근기(根機)는 차츰차츰 경박(輕薄)해지고 그래가지고 그러헌 식으로 수행을 허게되면, 자칫하면 묵조사선(黙照死禪)에 떨어지고 자기 나름대로 아닌 경계를 긴 것으로 착각(錯覺)을 해서 삿된 경계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육조(六祖)스님으로부터서 시작을 해가지고 임제(臨濟)스님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이... 간화선(看話禪)을 통해서 학자(學者)를 제접(提接)을 하고, 대혜종고선사(大慧宗杲禪師)에 이르러서 이 간화선(看話禪)이 완전히 체계화(體系化)가 되았습니다.
원래 이 화두공안(話頭公案)이라고 허는 것이, ‘이 무엇고?’
천칠백(1700) 공안 가운데에 가장 최초(最初)의 화두(話頭)요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화두가 이 ‘시삼마(是甚麽) 이무엇고?’ㄴ데, 대관절 이놈... 이 무슨 무건이냐 이 말이여. ‘이 몸띵이를 끌고 다니는 놈,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는 놈, 이렇게 말허고 이렇게 들을 줄 아는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佛法)이 생겨나기 이전(以前)에, 참선(參禪)이라고 헌 말도 생겨나기 이전에, 부처님이 출세(出世)하시기 이전에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自然的)으로 주어진 하나의 과제(課題)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관절 이 인생(人生)이란 게 뭐냐?
어데서 왔으며, 뭣허러 왔으며, 또 어데로 가는 것이냐?
대관절 이게 무엇이냐 이 말이여.
이 몸띵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썽도 낼 줄 알고,
착할 때에는 불보살(佛菩薩)과 같고,
한 생각 뒤집어지면 찰나(刹那)간에 나찰귀신(羅刹鬼神)이...처럼 포악허게도 될 수 있는 대관절 이놈이 무엇인가?
이것은 불법 이전에 모든 존재(存在)에게 주어진 한 과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헌 천연적(天然的)으로 주어진 이 과제(課題)를, 그것을 갖다가 어떠헌 근기(根機)에 사람이라도, 상근(上根)이나 중근(中根)이나 하근(下根) 어떠헌 근기라도 고대로만 허면은 깨달을 수 있도록 체계화(體系化) 한 것이 바로 이 간화선(看話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떠헌 보살화현(菩薩化現)이나 선지식이 출현(出現)허셔서 우리 말세중생(末世衆生)들에게 더 적합한 훌륭한 수행방법을 개발을 허실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때까지는 이 간화선(看話禪)만큼 훌륭한 수행법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막연허게 화두(話頭)도 없이 요요상지(寥寥常知)한 그놈을 딜이다(들여다) 보고 있다고 그러니 그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외도(外道)들이 배꼽 밑에 환하게 불... 불... 불이 켜진 것을 딜이다 보도록 그렇게 지도하는 그러헌 외도에 수행법도 있습니다마는, -물론 우리 불교에도 아침에 해가 뜰 때에, 해가 벌겋게 뜰 때에 그 해를, 해... 그 둥그런 그 해를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하루 종일 그 둥그런 벌건 달이 양 눈썹 사이 미간(眉間)에 종일 그것이 떠나지 않도록 그것을 관(觀)허고, 또 달이 뜰 때는 그 달을 한 시간 이렇게 쳐다보고 있다가 나중에도... 나중에 그 달을... 달이 없을 때에도 두 눈썹 사이에 그 달이 항시 있는 것과 마찬 가지로 관허고, 이러헌 일륜관(日輪觀)이니 월륜관(月輪觀)과 같은 이러헌 관(觀)을 통해서 수행(修行)하는 법(法)이 우리 불법에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이러한 이 관법(觀法)은 이 관법을 통해서 도(道)를 성취(成就)한 그런 특수한 선지식(善知識)의 직접적인 지도(指導) 하(下)에 허지 아니하면 백이면 백 다 미치게 되거나 삿된 디에(데) 빠지고야만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헌 관법은 함부로 허는 것이 아니고,
또 이 주력(呪力)을 외우는 것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이 주력도 밀교(密敎)에서는 이 주력을 굉장히 소중허니 생각허고 그 수행허는 방법으로 이 주력을 허는데, 이것도 이 주력을 잘못하면 스스로 자기의 생식기를 끊어버린다던지, 자기가 자기의 몸에 칼로 난도질을 쳐서 피를 흘린다던지, 머리를 기둥에다 받아서 박이 터지도록 헌다던지 이래서, 주력이나 또 이런 관법 같은 것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제 그이보고, 그분보고 ‘공안(公案)을 타파(打破)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걸 모른다고 그러고, 또 옆에 있는 분의 말을 들으니까 ‘모든 공안을 의리(義理)로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이리저리 결론을 내린다’고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마는, 이 공안이라 하는 것은 분별심(分別心)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의리... 의리... 사량분별(思量分別)로 따져서 알아듣는... 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일체 교리적(敎理的)으로나 이론적(理論的)으로나 철학적(哲學的)으로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은 따지는 것을 제일 경계를 허는 것입니다.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훌륭한... 자기 나름대로 훌륭한 결론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끝내 사량분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분별로 얻어지는 결과는 알음알이이고, 분별을 떠나서 바로 이 공안을 바로 깨달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활구참선(活句參禪)은 무이로(無理路)하고 이치 길도 없고, 무어로(無語路)하고 말길도 끊어져버리고, 또 더듬어 들어갈 것도 없다. 그래서 꽉 막혀야만 하는 것입니다. 꽉 막혀서 알 수 없는 의심(疑心)뿐이어야만 옳게 공부를 해가는 것입니다.
아까 조실스님 법문 가운데에 대혜(大慧)스님이 천하선지식한테 다니면서 법거량을 해가지고 모다 인가(印可)를 맏었... 맡었지만, 원오극근선사(圜悟克勤禪師)한테 가서 법담(法談)을 해서 여지없이 맥힘이 없이 답(答)을 했지만 원오극근 선사는 인가를 허시지 안했습니다.
“왜 내가 맥힘이 없이 다 일렀는데 인가를 안 해주십니까?”
“맥힘이 없이 네가 일렀기 때문에 내가 인가를 안 해준다.”
이것이 바로 이 소식(消息)을 말하는 것입니다.
활구선(活句禪)은 콱 맥혀서 해 갈수록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맥히는 디에 묘가 있는 것이지, 공안을 이리저리 따져서 아는 데는 자기 멸망(滅亡) 밲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만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해갈수록 알 수가 없으니까 답답할 뿐이고, 콱 맥혔으니까 답답할 뿐인 것입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 의심... 의단(疑團)이 독로(獨露)허도록 그렇게만 공부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용맹, 가용맹(加勇猛) 헌답시고 공연히 조급한 생... 생각을 내 가지고 막 알날신심(遏捺身心), 몸을 막 갖다가 강짜로 압력을 가해가지고 막 어거지로 이놈을 파 들어가고... 이러헌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공부해나가는 데에 용심(用心)허는 정도는, 너무 긴(緊)허게 강으로 힘을 써도 못쓰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늘어져 쳐져가지고 맼아리가 없어도 못쓰는 것입니다. 그 정진(精進)을 헐 때 정신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거각(擧却)헐 때에 그 성성(惺惺)허면서도 적적(寂寂)하고 적적한 가운데도 성성하게 그 화두를 관조(觀照)해나가는 데는 그 득기중(得其中)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의... 의심(疑心)을 관(觀)허되 그게 묘한 그 묘관(妙觀)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인이 선지식의 법문(法門)을 자주 들으면서 열심히 노력허면 그 묘관을, 묘(妙)한 그 의심관(疑心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화두를 들랴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무잡(純一無雜)하게 들리는데, 그 깨끗하고 맑고 헌 그 경계는 말로써 표현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몸띵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중도 모르고, 앉어서나 서서나 누워서나 밥을 먹을 때나 일을 할 때나 행주좌와 어묵동정(語默動靜)간에 일여(一如)하고 순일무잡하게 되아갈 때 말로써 표현헐 수 없는 법(法)의 기쁨이 있습니다마는, 그 좋아하는 디에도 떨어져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딴 생각을 낼랴고 해도 딴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헌 것입니다. 처음에는 화두를 들 때만 있고 금방 딴 생각이 들어와 버리고 이러헌... 이러다가 계속해서 한 달 두 달 석 달 일 년 이태 이렇게 해가면 반드시 화두를 들랴고 안 해도 화두가 순일하게 들어진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날 고인(古人)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듯, 또 닭이 알을 품듯, 또 칠십 묵은 늙은이가 외아들이 먼 디 갔다가 안 올 때 그 외아들을 생각허듯, 이렇게 용심(用心)을 허라’고 말씀을 허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공부지만 이건 정말 목숨을 바치는 그러헌 피나는 노력과 정성(精誠)이 없이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이 경을 많이 보고 교리적으로 무엇을 많이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을 내가 찾는 것’이 불법이요 불법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고인이 게송을 읊으기를, ‘삼천겁(三千劫)을 계행(戒行)을 지키고 팔만세(八萬歲)를 경(經)을 외운다 할지라도 반식경(半食頃), 밥 반 그릇 먹는 사이라도 실상을, 단정히 앉아서 실상(實相)을 관(觀)한 것만은 못하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계행(戒行)을 지키는 것만도 거룩한 일이요 또 경(經)을 한 경 한 사구게(四句偈)만 읽고 독송(讀誦)을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팔만세(八萬歲)를 경을 외운다면 그 공덕이 얼마만큼 크겠습니까마는, 한 식... 반식경(半食頃) 동안 단정히 앉어서 ‘이 뭣고?’ 헌것만 못허다 이것입니다.
그러니 계행을 지키고 경을 읽는 것은... 읽게 하는 것은 내가 내 마음 깨닫게 허는디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이 공부를... ‘이 뭣고?’를 허는 것은 바로 실천(實踐)에 들어가는 것이고, 경을 읽고 계율을 지키는 것은 그 준비(準備)과정에... 과정 밲에는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노정기(路程記)... 어디에 목적지에 가는... ‘어디를 갈랴면은 어디에서 차를 타고 어디를 거쳐서 어디를 간다’ 그런 것이 씌어있는 것이 바로 경(經)이라 할진대, 밤낮 그것만 읽고 실지로 목적지를 향해서 출발(出發)허지 아니헌다면 언제 목적지에 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참선법은 최상승법(最上乘法)이라 하셨고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이렇게 말씀을 허신 것입니다.
부처님을 평생토록 모시고 지내고 평생토록 선지식을 가까이 모시고 지내도 스스로 공부를 허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당장 ‘이 뭣고?’
일어나는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 일어나는 그 당처(當處)를 관조(觀照)허는,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찾는 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잘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 재미도 없습니다. 이거 해가지고 무슨 견성(見性)을 하고 도통(道通)을 하고 성불(成佛)을 허까? 전혀 믿어지지를 아니 헐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전에 말씀이, 모든 조사(祖師)에 어록(語錄)이 그걸 올바르게 이해를 하고나면 결국은 ‘내가 나에 마음자리를 찾... 찾... 찾으라’는 그 말씀 하나로 귀결(歸結)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고 대들어야 합니다. 첫 숫갈 부터 배부른 법이 없습니다. 자꾸 스스로 헐랴고 애를 쓰고 부셔대고 몸부림을 쳐야만 되아지는 것입니다. 이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켜서 결국은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서 십층 이십층 건물이 되듯이, 한 생각 한 생각을 돌이킴으로써 결국은 거기에서 나에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은 창자 속에 들어있는 것도 아니요, 밥통 속에 들어있는 것도 아니요, 염통 속에 들어있는 것도 아니요, 머리 두골 속에 들어있는 것도 아니요, 허벅지에 들어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래면목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하는 우리의 그 생각들, 번뇌망상(煩惱妄想), 눈으로 무엇을 보았을 때, 귀로 무엇을 들었을 때,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무엇을 알 때, 그러헌 우리의 육식(六識)을 통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그 우리의 그 육식이 바로 우리의 본바탕 마음의 현로(顯露)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본성(本性)의 뿌리에서 나오는 가지요 물결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놈을 여의고 찾아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정코 분명(分明)한 사실(事實)인 것입니다. 이것은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바꾸지 못할 사실인 것입니다.
일어나는 그 생각을 버릴랴고 허지 말고 바로 그놈에 즉(即)해서 화두(話頭)를 들어버리면, 그것이 이 나를 찾아가는 공부에 길인 것입니다.
따라서 번뇌망상이 일어나서 못헌다고 한탄할 것이 없습니다.
그놈을 일어난 것을 걱정허지 말고, 망상 일어나는 것을 걱정허지 말고 일어나는 바로 그 생각에 즉(即)해서 화두를 들어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망상이야 제대로 없어져버릴 수 밲에는 없으니까요.
한 말로 말해서 ‘일어나는 망상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또 망상이 안 일어나면 혼침(昏沈)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 그러는데, ‘망상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렇게 다스려 가려니와 혼침이 오는 것을 어떻게 허느냐?’ 이것도 많은 수행하는 분들이 즉면(直面)허고 있는 한 문제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망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별로 그 혼침이 없었는데, 망상이 잠잠해지니까, 고요해지니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 허니 졸음이 오거든.
그 아무리 정신을 채리고 허리를 펴고 잠을 쫓을랴고 해도 눈 뚜껑이 천근이나 만근이나 되아가지고 누르는 통에 아무리 눈을 떠도 스르르르 감겨. 나중에는 잠 자면서도 끄벅그벅 해가지고 이마가 방바닥에 닿을 때 까지 꼬부라져도 텅! 허니 방바닥에 닿아야만 그때사 눈을... 고개를 흔들흔들 허면서 허리를 펴는데, 삼 분도 못되서 또 꼬부라집니다. 이... 그래서 고인이 ‘다생(多生)에 이 도(道)를 장애(障礙)하는 것은 수마(睡魔)보다도 더 큰 것이 없다.’ 이렇게도 말씀을 했습니다.
이 수마(睡魔) 일어나는 것은 참 고인들은 송곳으로 무릎을 찌르기도 하고, 또 막대기에다가 바늘을 꽂아서 턱 밑에다가 받쳐놓고 허기도 하고, 밤새도록 큰 돌맹이를 짊어지고 이산봉우리에서 저산봉우리로 밤새 왔다갔다 허면서 그 졸음을 극복을 허는 그러헌 분도 있고, 저녁에 잘 때는, 잠꽌 잘 때는 벼개를 나무로 동글동글허니 똥그란 공처럼 깎아가지고 비고 자다가 삐끗허면 머리가 방바닥에 툭! 내려지는 바람에 깜짝 놀래서 다시 일어나서 또 밤중에 공부하고, 이렇게 해서 잠을 갖다가 이겨나기 위해서 갖인 방법을 써오고 있습니다.
또 된장찌개 같은 걸 먹으면 잠이 온다 해서 그런 것을 안 먹으면서 허는 이도 있고, 밥을 많이 먹으면 또 잠이 온다 해서 될 수 있으면 밥을 적게 먹을랴고 또 그러는 분도 있고, 앉으면 잠이 오니까 계속 뜰에 나가서 포행(布行)을 허고 왔다 갔다 허면서 그래 정진(精進)을 하는 그러헌 분도 있고 헙니다. 이것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각자 자기 나름대로 자기에 맞는 방법을 스스로 개발을 허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문제는 망상이 일어나거나 잠이오거나 간에 일분일초라도 방심(放心)허지 아니하고 정신(精神)을 차려서 한 생각 한 생각을 단속(團束)해 나가는 거 이것이, 이 끈질긴 노력과 정성(精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나가면 언젠가는 그 망상도 저절로 없어져버리고 그렇게 퍼붓던 혼침도 간 곳이 없이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화두가 순일무잡하게 들어지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갖다가 ‘생력(省力)이라, 힘을 갖다가 덜었다. 이 생력이 바로 득력(得力)이라, 힘을 얻는 것이 된다’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 춥지도 덥지도 않는 이 봄철을 맞이해서 뒤로 미루시지 말고 알뜰히 정진해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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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경무인조불회(山徑無人鳥不回)헌디
고촌암담냉운퇴(孤村暗淡冷雲堆)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원승답파유리계(院僧踏破琉璃界)하고
강상고빙급수래(江上敲氷汲水來)로구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산경무인조불회(山徑無人鳥不回)헌디
산길에 사람이 없는데 새는 돌아오지를 안 해.
온 산중에 눈이 적... 적설(積雪)이 와가지고 허옇게 눈이 내렸는데, 그러니 산에 아무도 오고가는 사람이 없어. 그러고 새도 눈이 워낙 많이 쌓여 놓니까 어디에 가부렀는지 돌아오지를 않는다 그 말이여.
고촌암담냉운퇴(孤村暗淡冷雲堆)로구나.
외로운 마을에 눈이 내리니까 껌껌허고 암담헌데 차운 구름만 쌓여.
앞으로 얼마나 더 눈이 쏟아질런지 하늘과 땅이 온통 껌껌해가지고 차운 구름만 쌓인다 그 말이여. 이 세계가 새해를 맞이했건마는 평화로운... 평화(平和)가 돌아올 기미는... 조짐은 보이지를 않고 날이 갈수록 점점 무서운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러한 경계를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원승답파유리계(院僧踏破琉璃界)헌디
그 산중에 눈이 내려가지고 사람 왕래도 없고 새도 돌아오지도 않고 온 골짜기 골짜구니마다 눈이 쌓이고 찬 구름이 쌓이는데, 그 절간에 스님이, 참선(參禪)하는 스님은 그 허연 눈 덮인 산길을, 유리세계(琉璃世界)와 같은 그런 허연 세계를 터벅 터벅 터벅 걸어가지고,
강상고빙급수래(江上敲氷汲水來)로구나.
저 강(江) 위로 가가지고 그 강을... 강에 얼음을 구녁을 뚫어가지고, 얼음을 쳐서 구녁을 뚫어가지고 거기서 물을 길러오더라 그 말이여.
깊은 산중에 계곡으로 흘러가는 물을 홈대를 놔가지고 연결을 해서 물을 받아서 그렇게 먹고 살다가, 엄동설한(嚴冬雪寒)이 되니까 골짜구니에 물이 다 얼어버리고 홈대마저도 다 얼음으로 가뜩 차서 물을 먹을 수가 없어. 계곡에서는 물을 먹을 수가 없으니까 저 넓은 강 있는 디로 가면, 가서 그 얼음을 깨가지고 구녕을 뚫어서 물을 길러온다 그 말이여.
온 세계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 자기가 잘살기 위해서, 자기 나라가 잘살기 위해서 서로 나라와 나라끼리 싸우고, 무서운 무기를 발명을 해서 무력으로써 싸움을 해가지고 자기나라에 이익을 확보허기 위해서 이래 허는데 결국은... -물론 우리나라도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군대(軍隊)도 양성(養成)해야 하고 무기도 많이 맨들어야 하고 비행기나 군함도 많이 있어서 그걸 잘 해야만 왜적(倭敵)이 침범(侵犯)해 들어오지를 못하니까 부득이 해서 이것을 허기는 해야 합니다. 절대로 등한(等閑)히 헐 수는 없고 잘해야 하는데- 참 성현(聖賢)의 눈으로 본다면 이 중생세계(衆生世界)가 이래가지고는 안 될 일이거든.
어떻게든지 온 세계 사람들이, 온 나라가 이 성현의 뜻을 깨달라가지고 싸움으로써 자기의 나라를 지킬랴고 허지 말고 서로 돕는 자비(慈悲)로써 나아간다면, 무기를 맨드는 대신 서로 인류복지(人類福祉)를 위해서 그걸 쓰게 된다면 세계에 굶어죽는 사람도 없어질 것이요, 병들어 죽은 사람도 다 구제할 수 있을 것이요, 이웃지간에 서로 싸울 것이 아니라 도우면서 살 수 있는 이러헌 평화(平和)를 가져오도록 해야 하는데, 온 산천(山川)이 꽁꽁 얼어서 사람길이 다 끊어졌단 말이여.
그런데 그 수행하는, 그 산중(山中)에 그 절에서 수행하는 그 수좌(首座)가 눈길을 밟아서 저 강에 얼음을 구녁을 뚫고 거기서 물을 길어온 것은, 온 세계가 이렇게 싸움을 허고 있는 이 속에서도 우리 정법(正法)을 믿는 불자(佛子)들은 자성(自性)을 깨닫고, 나아가서는 온 중생(衆生)을 깨닫게 하고, 나아가서 못 이 세계(世界)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으로 가득차게 허려는 그러헌 자리이타(自利利他)에 신심(信心)을 가지고 이렇게 모이신... 모여서 공부를 헐랴고 헌 이것이 바로 거기에다가 비유를 해서 게송(偈頌)을 읊어봤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험악허고 어려울 수록에 우리는 참나 찾는 공부를 더욱 노력을 허는 수 밲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자(佛子)가 하는 길인 것입니다. 앞으로 이다음 법회가 열릴 때까지 정말 착실히 정진을 허시기를 부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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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헐 때 다르고, 금방 또 법당(法堂) 밖에 나가면 또 다르고, 또 저 후원(後院)에 가서 공양(供養)을 헐 때 다르고 허면은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양을 하실 때나, 또 이 법당 안에 계실 때나, 또 법당 밖에 나가서 책을 받으실 때나, 또 정거장에 가서 전철이나 버스를 탈 때나, 또 가정에 돌아가셔서 모다 가족 모다 생활을 허실 때나, 어디를 가나 한 생각을 딱 단속(團束)을 허신다면 참 그 마음가짐이나 또 말씨나 그 행동에 있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청정해지는 청정한 사람은 어디서 어떻게 보나, 위에서 보나 밑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앞에서 보나 언제나 훌륭하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송담선사 법문 23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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悟每擧 ‘有句無句 如藤倚樹.’ 問之, 師纔開口, 悟便曰 : “不是. 不是.” 經半載, 遂問悟曰 : “聞和尙當時在五祖曾問這話, 不知五祖道甚麽?” 悟笑而不答. 師曰 : “和尙當時須對衆問, 如今說亦何妨?” 悟不得已 謂曰 : “我問 : ‘有句無句 如藤倚樹. 意旨如何?’ 祖曰 : ‘描也描不成, 畫也畫不就.’ 又問 : ‘樹倒 藤枯時如何?’ 祖曰 : ‘相隨來也.’” 師當下釋然 曰 : “我會也.” 悟遂擧數因緣詰之, 師酬對無滯. 悟曰 : “始知吾不汝欺.” 遂著臨濟正宗記付之, 俾掌記室.
원오(圜悟)는 매번 ‘있다는 말과 없다는 말은 마치 등나무 덩굴이 나무에 의지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말을 가지고 대혜에게 묻곤 하였는데, 대혜가 입을 열려고 하면, 원오는 곧 말하기를 “아니다. 아니야.”라고 하였다. 그렇게 반년이 지난 뒤, 드디어 대혜가 원오에게 물었다. “듣자하니 스님께서 오조(五祖) 스님 회하에 계실 때에 이 말을 물었던 일이 있었다고 하던데, 오조 스님께선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오는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혜가 말했다. “스님께선 당시에 대중들 앞에서 질문하셨을 것인데, 지금 말씀하신다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원오가 마지못하여 말했다. “내가 오조 스님에게 ‘유구(有句)와 무구(無句)가 등나무 덩굴이 나무에 기대 있는 것과 같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니, 오조 스님은 ‘그리려고 하여도 그리지 못하고, 말하려고 하여도 말하지 못한다.’ 라 하셨다. 다시 내가 ‘나무가 쓰러지고 등나무덩굴이 말라버릴 때에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니, 오조 스님이 ‘서로 따라 온다.’ [相隨來也 . ] 라고 말씀하셨다.”
스님이 그 자리에서 확 깨닫고는 말했다. “제가 알겠습니다.” 원오 스님이 여러 인연을 가지고 물어 보니, 대혜가 모두 답함에 막힘이 없었다. 이에 원오 스님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너를 속일 수가 없구나.” 하고는,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부촉하고, 기실(記室) 을 담당하게 했다.
- [오등회원] 제19권 임안부경산종고대혜보각선사(臨安府徑山宗杲大慧普覺禪師) - 김태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