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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法可得, 여기 한 빈 자루가 있습니다】

이 뭣고? 2019. 4. 6. 14:38



부처님께서 설하신, 사십구년 동안 설하신 팔만사천 묘법문이, 다 그것을 한 대 모아서 녹여가지고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골수법문을 추출을 해낸다면 그것이 바로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라’
‘마음을 관하는 이 한 법이 모든 행을 다 포섭을 헌다’ 이겁니다.

‘마음을 관하는 한 법’이라는게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참선공부叅禪工夫입니다.
참선은 ‘이 무엇고’. 내가 나를 찾는 공부입니다.
내가 나를 찾는다고 허는 것은, 사람들은 밖에서 무엇을 찾는데는 다 익숙합니다.
물질적인건 무엇이건 밖에서 찾는데는, 어릴때부터 여태까지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밖에서 무엇을 찾아가지고 자기의 소유所有를 만들고 자기의 욕심慾心을 충족을 시키고 자기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이러는데에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구한 것은 언젠가는 인연因緣이 도래到來하면 나로 부터서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근데 이 참선법叅禪法은 밖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안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무엇을 구하느냐.
내가 나를 찾는 공부여.
‘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 있으며 무엇인가’ 정말 그것은 여러분들이 납득할 만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밖에도 있지 아니하고 안에도 있지 아니하고 그 중간에도 있지 아니한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찾는다고 말하는 그 말에도 어패를 면치못합니다만은 부득이해서 그러헌 말을 빌릴 수밲에는 없습니다.

———

​‘나’.
나라고 허는 것.
중생들은 나라고 허면 이 이목구비와 사지가 있는 이 육체肉体를 가지고 ‘내몸이다’ ‘나다’ 이리 생각합니다만은, 이 몸띵이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여가지고, 그래가지고 이 육체를 구성을 하고 있습니다 .
이것은 인연因緣이 도래到來하면 다시 그 지수화풍 사대로 흩어져서 없어지고 맙니다.

이 몸띵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主人公.
때리면 아픈줄 알고 욕허면 성낼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이놈이 바로 이 ‘나’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그것을 부모로부터 몸을 받아난 사람은 누구에게나 이 몸띵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있습니다.
​사실 이 ‘​​​주인공主人公’은 부모로부터 받아난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에부터, 이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에부터 언제 생겨난 역사가 없이 존재해 있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습니다.

​생겨난 때가 없기 때문에 멸하는 때도 없습니다.
그러헌 한 물견이 이 몸띵이를 주재主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로부터 받아난 물질로 이루어진 이 육체의 관리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심을 쏟고 정성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몸땡이를 주재主宰한 참나, 나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불법佛法은 바로 그것을 찾아서 깨닫는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

이 정법正法은 그 근원根源을 바르게 다스려서 어... 영원히 그러헌 원인을 제거 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나무를 가꾸고자 할 때 그 뿌리에 좋은 흙과 좋은 비료와 다 수분이라던지, 그리고 충분히 잘 공급을 함으로써 그 나무는 줄기와 가지와 잎이 무성해져서 결국은 훌륭한 열매를 맺게 되는거와 마찬가집니다.

근본을 다스리지 아니하고 뿌리에는 좋은 토양이 아니고 또 좋은 적당한 비료를 공급해주지 아니하고, 수분도 공급해주지 아니하고, 그리고 뿌리는 다 밖으로 들어나다시피한 상태에서 잎, 가지와 잎에만 아무리 정성을 쏟아봤자 그 나무는 시일이 가면갈수록 시들고 마는 거와 마찬가지인것입니다.

근본根本을 다스리면은 가지와 잎과 열매는 저절로 열리는 것이고, 근본을 버리고 지옆만을 붙잡고 아무리 늘어져 봤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정법을 믿고 우리의 참나를 찾아서 그걸 닦고 깨닫는다면 우리의 육체와 우리 주변에 모든 문제는 거기에서 저절로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라던지 부부간에 문제라던지 형제간에 또는 자식 자녀 문제라던지 친구나 일가친척에 관한 건이라던지 재산이나 명예나 권리에 관한 모든 문제가 그 근원은 나의 마음으로부터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내마음을 바로잡지 못하고 내가 내마음속에 있는 과거의 업종業種을, 업에 종자를 갔다가 정화淨化하지 못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체 아무리 부모와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부부형제간의 관계, 일가친척의 문제를 바로 잡을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봤자, 그리고 원망을 해봤자, 한탄을 해봤자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나의 마음.
우리는 마음이라는 말을 어릴쩍 부터서 듣고 그리고 그 말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라하면은 다 각기 자기나름대로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마음을 바로 본 사람, 바로 안 사람, 바로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이름만을 알고 쓰고 있을뿐 그 실상, 그 실체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습니다 .

하루,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언제나 그 놈이 그 놈을 가지고 그 놈으로 그놈이 하루를 살고 또 하루를 살면서 일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놈을 알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잠, 단 일분 일초도 떠날수가 없고 언제나 같이 살고 있으면서 그놈을 알수가 없는 것인가.

눈을 통해서 모든 빛깔을 보고, 귀를 통해서 모든 소리를 듣고 분간하며, 코를 통해서 모든 냄새를 맡고 숨을 쉬고,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맛을 보고 그리고 말을 합니다.
손과 발 육체를 가지고 춥고 더웁고 부드럽고 까끄라운 것을 다 식별을 합니다.

그런데 대관절 눈을 통해서 보는 놈이 무엇인가 찾어보면 자최가 없습니다.
​눈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면서 왜 ‘보는 그놈’을 다시 볼려고 하면 보이지 아니하고 알수가 없는 것이냐.
여기에 우리가 ‘마음을 닦는다’, ‘도를 닦는다’, ‘불법을 믿는다’ 고 해도 일년 이년 삼년 십년을 절에를 다니고 법문을 듣고 또 참선을 해도 마냥 제자리 걸음이요 답답하기가 그지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보면서 보는 그놈을 찾으면 자최가 없으니 이노릇을 어떻게 해야하나.
그러면서도 그놈을 찾으라고 법상에서 큰스님네는 법문하실때마다 그놈을 찾으라고는 하고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는 아니하고.
무슨 공부를 해서 차츰차츰 성과가 눈에 보이고, 이만큼하면은 그 만큼 헌 결과가 나타나서 스스로도 흐뭇하고 남에게 이만큼 했다고 보여줄수 있으면 더욱 신명이 나고 재미가 있을텐데, 석달씩, 여름 석달 겨울 석달 집안을 갔다가 떠나서 선방에 가서 석달씩 그렇게 공부를 허고 와도 영감님 앞에 또는 아들이나 며느리 앞에 손자들 앞에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가서 공부를 해가지고 암 것도 내 놀 것이 없으면서도 그리고 그 다음철에는 또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만큼 공부를 했다고 내놓을것이 있으면 아들 딸 며느리 영감이 모두가 다 참 그 좋다고 이해를 하고 더욱 가시도록 협조를 하고 이해를 하시고 또 그분내들도 또 보람을 느끼고 또 그분들도 또 할려고 하시고 그럴텐데, 맨날 절에만 다니고 머리가 하얗게 되도록 절로만 다니시지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마당에야 그 참 딱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

​그런데 이 한철내 공부를 허고도 내놓을수 없는디에 이 참선禪에, 정법正法에 묘미妙味가 있는것입니다.
‘나는 이 만큼 했다’ 고 내놓을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유루법이요 유위법이라 그것은, 내놓을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또 없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
​타관他官에 가서 고생을 해가지고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가지고 와 봤자 그것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며, 도둑을 맞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써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석달 내에 자고싶은 잠도 다 못자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그 고생을 하면서 공부를 해서 암것도 내놓을건 없지만은, ​그 분이 정말 정법을 믿고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참선을 하셨다면 ​설사 아무것도 내놓을것도 없지만 그분은 영원한 것을 마음 속에서 잘 닦아서 얻을 것은 얻었다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것입니다.


​그러면 참선을 해서 아무것도 얻을것도 내놓을것도 없으면은 그걸 해서 뭐하느냐?

​암것도 얻을것도 내놓을것도 없는 이것이 바로 얻은것인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속에 제 팔식八識 속에 무량겁無量劫을 두고 지은 업業에 종자種子를 그것을 갔다가 순화하고 승화시키는 작업인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을 속에다 많이 쌓아 담은 것이 아니라, 제 팔식 속에 쌓여져 있는 업에 종자를 소멸을 하고 업에 종자를 승화를 시켜서 보리과菩提果를 증득허게 하는 거름으로 사용을 했다 이겁니다.
​있는 것을 녹여 없앴으니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그말이여.

​여기 한 빈 자루가 있습니다.
거기에다 무엇을 가지고 밤도 줏어담고 과자도 줏어 담고 해서 많이 줏어담아 가지고 왔으면 그 자루속에서 그 담아진 것을 꺼내서 보여줄 것이 있겠지만, 우리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허는 업의 자루속에 담아져 있는 무량겁을 통해서 그 쌓아 담은 업의 종자를 참선을 함으로써 그것을 녹여 없앴습니다.
그러니 가서 네 보일 것은 확 뒤집어 보여봤자 빈자루입니다. 빈자루를 내보였으니 거기엔 아무것도 내보일것이 없는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석달동안 공부를 하고 집엘 가서 “할머니! 가서 공부를 해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빈 자루라도 있으면 탁 까 뒤집어 보이는데 우리의 아뢰야식은 눈으로 볼수 있는 자루가 아닙니다.
눈으로 볼수 없는 자룬데 우주 법계가, 법계를 그 속에다 다 담아도 그 자루에는 다 차지도 않습니다.
허공을 그 속에다가 집어넣어도 그 아뢰야식이라고 헌 자루는 차질 않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자루인 것입니다.
그러헌 자루를 우리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루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짓고 지은 선업善業 악업悪業 무기업無記業이 세 가지 종류의 업業으로써 지은 수확헌 종자를 그 속에 다 가뜩 담어가지고 다닌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눈으로 무엇을 볼 때에 자기 종자에 해당되는 인연因緣을 만나면 그 많은 종자 속에 어떤 종자가 거기서 싹이 터 나옵니다.
수수나 조나 모든 종자가 습기와 적당한 열을 온도를 만나면 눈이 터나 오듯이 우리의 아뢰야식 속에 쌓아져 있는 선업 악업 무기업의 종자가 그때 그때 터져 나온것입니다.

눈으로 볼 때, 귀로 들을 때, 코로 냄새맡을 때, 혀로 맡볼 때, 손과 발 몸으로 감촉할 때, 생각으로 무엇을 생각할 때, 이러헌 육근六根이 육진六塵을 만나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만나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나면 육식六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불능不能이 있는데,
‘인연없는 중생은 제도 하지 못한다’.
아무리 부처님에 삼계대 성현이시고 신통이 구족하신 그러헌 대 성현이시지만 인연없는 중생은 제도할 수가 없다.

둘째는 ‘중생계衆生界를 다하지 못한다’.
중생계를 다하지 못한다하는말은, ‘중생이 하나도 없도록 중생을 없앨수는 없다.’
중생은 그 한량이 없는 큰 그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무량겁을 두고 지은 그 업의 종자가 가뜩 차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意을 통해서 언제 계속 거기에서는 싹이 터 나옵니다.
좁쌀도 나왔다가 보리쌀도 나왔다가 수수쌀도 나왔다가 그때 그때 싹이 트기에 적당한 인연을 만나면 조건을 만나면 거기에 있는 많은 종자 가운데에 그중에 어느 하나가 나오게 되고 그 다음에 또 나오게 되고 하는데 계속 싹이 다, 싹이 터서 다 발아를 해가지고 다 나가버리면은 언젠가는 그 종자가 동이 날텐데 그러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냐. 싹이 터나오면서 새로운 종자를 동시에 갔다가 또 저장허게 됩니다.

업식業識속에, 업장業障속에 있는 종자가 싹이 터나온 것을 현행現行이라 합니다. 현행現行. 나타날 현자, 행할 행자.
종자가 밖에 어떠헌 적당한 조건을 만나면은 현행을 합니다. 싹이 터나옵니다.
싹이 터나오면서 거기에서 속에있는 어떠헌 종자를 갔다가 훈, 훈熏을 합니다. 그 종자를 갔다가 또 찜질을 허는것입니다. 다시 말허면 종자가 싹이 터나오며서 다시 또 새로운 종자를 갔다가 저축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눈을 통해서 보거나, 귀를 통해서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맡을 보거나, 뜻으로 무엇을 생각헌 것은 그것이 하나의 현행現行이면서 그때 느꼈던 것이 고대로 아뢰야식 속에 또 녹음이 됩니다.
녹음이 된다고 허는 것이 바로 새로운 종자를 갔다가 수확을 해서 저장을 하는것입니다.
이리해서 그 업의 종자가 한 없이 퍼져나오고 한 없이 저장이 되기를 무량겁을 해왔고 앞으로도 무량겁을 두고도 그러헌 작업이 계속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도六道의 윤회輪廻가 끊일날이 없습니다.

지은 복이 있으면 천당에 가고 그놈이 다음엔 다시 인간에 떨어지기도 하고 축생으로도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죄를 지은바가 많으면 지옥에 가고 육도윤회六道輪廻를 끊임없이 계속허면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또 앞으로 무량겁을 두고 윤회, 생사윤회生死輪廻가 또 계속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그러헌 도력道力과 신통력神通力과 법력法力으로도 그것을 갔다가 다 없앨수가 없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그 방법이 바로 이 불법佛法이요 참선법叅禪法입니다.

———

​눈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다.
지금 이 탁자 위에도 노란 국화가 화병에 꽃혀 있습니다. 그것을 본 찰라, ‘아 국화로구나’, ‘이 겨울에도 국화가 피었구나’, ‘아, 좋은 향내가 나겠지’, ‘어떻게 저것을 겨울에 피웠나’, ‘온실에서 재배를 했겠지’ 이런 것을 국화 하나를 봄으로써 우리는 끝없이 생각이 그렇게 번져나갑니다.
그러다가 과거에 어떠헌 국화에 관련된, 자기와 국화에 관련된 어떠헌 일에 우리의 상념이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혹 눈물바람을 허기도 하고, 혹 과거에 어떤 때를 갔다가 그리워하기도 하고, 또 씁쓸할 웃음을 짓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러헌 식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동안에는 우리의 문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의 국화를 보았다.
‘노랗다’, ‘아름답다’ 그러헌 두 번째 생각으로 건너가기 전에 국화가 눈에 딱 띄였을 때, 그때 바로 참선을 하는 사람은 ‘이뭐꼬?’ 로 돌아와야 하는것입니다.

국화를 보고 ‘노랗다’ ‘아름답다’ ‘송이가 크다 작다’ 이렇게 둘째 생각 셋째 생각 넷째 생각 그렇게 번져나갈것이 아니라 국화가 눈에 탁 들어온 그 찰나에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이전에 ‘이 뭐꼬?’, ‘이 무엇고?’ ‘지금 이 뭐꼬 헌 이놈이 무엇고?’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그렇게 다구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국화를 봤을 때 뿐만이 아니라, 귀로 무슨 소리를 들었을 때, 새 소리를 들었건 차 소리를 들었건 개 짓는 소리를 들었건, 들은 그 찰나에 ‘이 무엇고?’ ‘이 무엇고?’

어떤 생각이 일어났다.
친구 생각이 일어났다. 그 친구와 자기와 관계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이리 생각해 허다 보면 과거에 그친구가 자기에게 섭섭히 한 일까지 생각해 가지고 공연히 심사가 사나와 지고 그 끝에 아들이나 손자나 며느리가 옆에서 뭐라고 허면 거기에서까지 신경질을 부리게 까지 됩니다.

참선叅禪헌 사람은 그게 아니라 친구생각이 낮다 두 번째 생각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뭐꼬?’
눈으로 무엇을 보거나 귀로 무엇을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무엇을 맛을 보거나 차겁고 더운 것을 느끼거나 지나간 일이 생각이 나거나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던지 간에 한생각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이 무엇고?’ 이렇게 다그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량겁을 두고 쌓아논 ​아뢰야식阿賴耶識 속에 업 종자種子를 돌려서 보리菩提의 종자로 승화昇華시키는 방법입니다

이미 업業에 종자를 보리심菩提心으로 승화를 시켰기 때문에 업에 종자는 소멸이 되얐다고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소멸이라기 보다는 승화昇華를 시켰다고 표현헌 것이 더 나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편의상 알기쉽게 소멸을 했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이무엇고?’ 이 한마디는 부작 천장 만장 보다도 더 수승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영원히 업장을 소멸하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오직 하나의, 최고의 방법입니다.


- 송담선사 법문 114번.